책이름 : 찬란한 음모 지은이 : 이원두 *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작가소개 1. 프롤로그 2. 부도날 때는 사랑을...... 3. 고감도(高感度) 실마리 4. 2백킬로와 닷새사이 5. 기분은 열녀 6. 주막집 증언 7. 처녀탐정 죽다 8. 뺑소니 사고 9. 인형의 비밀 10. 미행 11. 지하 우정(地下 友情) 12. 별장의 불 13. 에필로그 작가소개 경북 안동출신, 대구상고, 영남대학교를 거쳐 영남일보, 신아일보, 한국일보, (現)경향신문 편집부국장. 한국추리작가협회 회원.(작품 아르바이트 지도 등) 1. 프롤로그 (1) 깜빡, 쏟아지는 졸음을 떨치며 눈을 떴다. 칠흑같이 캄캄 어둡기는, 뜨나 감으나 마찬가지였다. 새서울 빌딩 8층-- 정확히 말해서 8층 천장 속에서 몇 시간째 그는 몸을 쪼그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얼기설기 얽힌 파이프와, 천장 패널 지주 사이에 몸을 지탱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 아니었다. 쪼그린 양쪽 어깨와 오금은 조금 전부터 저리다 못해 마비 되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야광 손목시계는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바늘 각도는 정확히 60 도. 네 시간째였다. 이렇게 쪼그리고 앉은 채, 달력의 날짜가 하루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야광시계 문자판에서 쏘아대는 녹색의 형광은 순간적으로 그를 상쾌하게 만들었다. 그 상쾌함을 타고, 근육 마디마디에 긴장과 힘이 스쳐 지나감을 느낀다.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쾌감과 같은 긴장이었다. 3년만일까?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옛날이었을지도 모른다. 일을 앞두고 느끼는 긴장과 쾌감은 여자를 안았을 때의 그것과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섹스의 오르가즘이 파도라면, 일을 앞두었을 때 느끼는 쾌감은 안개였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어느새 시계를 가리고 마는 안개의 짙은 흐름은 전 신경을 팽팽한 긴장 속에 몰아 넣어 준다. 아무리 오랜 --그것이 3년이든, 혹은 그것보다 훨씬 더 오래 되었건--이라고 해도 단련된 근육과 신경조직은 "지금부터 일이다!"라는 대뇌의 신호에 정확하게 반응해 주었다. 그는 옷 주머니에서 펜. 라이트를 끄집어 낸 다음,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속으로 10초를 헤아린 다음, 시계 초침에 눈을 돌렸다. 시계의 초침과 그가 헤아린 10초는 조그마한 오차도 없이 일치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심야의 정적이 안개처럼 흘러내리고 있음이 느껴졌을 뿐이었다. 그는 히죽, 만족스레 웃었다. 만사가 계획 대로였다. 속으로 헤아리는 초 단위의 정확성도 녹이 슬지 않았고, 무엇보다 새벽 2시부터 4시 사이엔 경비원의 순찰이 없다는 정보의 정확성에 만족한 것이다. 펜. 라이트를 비추어 주변을 살핀 다음, 조심스레 팔. 다리를 뻗어 굴신을 했다. 그 순간 긴장과 쾌감이 다시 한번 전신을 스쳐 흘렀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을 머리속에서 하나 하나 체크하기 시작했다. 먼저 몸을 뒤집어, 파이프 가닥에 걸쳐 엎드린 다음, 나사못을 돌려 천장 패널을 2장 뜯어내야 했다. 그 뒤엔 몸을 다시 뒤집어 철봉처럼 파이프에 매달려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계산대로라면, 거기가 바로 사장실. 금고는 사장 책상 뒤편, 창문 왼쪽 구석에 있을 것이다. 그 금고가 아무리 굳게, 이중 삼중으로 잠겨져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여는 데는 이분, 아니 오래 걸려도 사분이면 족할 것이다. --여태껏 내 앞에서 사분 이상을 견디어 낸 금고는 없다! 그것은 자랑이었다.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치마끈을 푸는 것처럼, 아니 스스로 치마끈을 푸는 여인 앞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남자처럼, 그는 금고 열쇠를 풀어 갈 적에 황홀한 흥분을 느껴 왔다. 일을 마칠 때까지의 소요 시간도 길게 잡아 십분. 두시 십오분이면 모든 걸 끝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뒤엔 사장실 푹신한 소파에서 세 시간쯤 잠을 잔 다음, 새벽 순찰이 끝날 다섯시 삼십분엔 화장실로 숨어 들어가 출근 시간, 붐빌 때를 기다리면 그만인 것이다. 그동안 넥타이 차림으로 모습도 바뀌어지는 것이다. 그는, 잠시 이 천장 속에 숨어 들 때까지를 되살려 보고 혼자 쿡쿡 웃음을 죽였다. 어제 저녁 퇴근으로 한적해진 복도로 숨어들다가, 재수 없게 경비원에게 들켜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의젓한 매무시와 걸음걸이에 그 경비원은 깍듯이 거수경례를 붙여 주었다. 경비원이 저만큼 사라진 다음, 그는 잽싸게 화장실로 숨어들었다. 일단 체크한 화장실을 다시 되돌아 다니며 조사해 볼, 그런 경비원이 없기를 기대했다. 그 기대는 보기 좋게 적중했다. 그는 화장실에서 간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다음 두 시간을 보냈다. 경비원의 두번째 순찰이 시작될 무렵 천장 속으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밤 열시. 슬슬 움직여 보자고 마음을 먹은 그는 다시 한번 행동 순서를 체크했다. 만사 순조. --남자는 머리속에서 두 번 되풀이 체크한 순서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십분 뒤, 그는 금고 앞에서 지그시 흥분을 누른 다음, 크게 한번 심호흡을 했다. (2) [지금 상태론 도저히....... 전연 가능성이 없습니다. 특허권의 양도는 고사하고 공동사용조차 말도 못 붙이게 하고 있습니다. 북두산업의 김칠성은.......] 잡화담당 상무는 한 마디씩 한 마디씩 말을 골라가면서 보고를 끝맺었다. 김칠성 사장을, 사장이란 직함을 떼어버린 채, 그냥 김칠성이라고 내뱉는 것을 보면, 그와의 절충에서 꽤나 고생을 한 것이 분명했다. 태양상사 회장실. 십이층 빌딩의 최상층 전부가 회장실과 그 부속실로 쓰이고 있었다. 대. 소 회의실과 응접실 두 개, 그리고 화장실에 잇대어 프라이베이트. 룸--침실이 곁들여 있었다. 접객과 회의는 대부분 응접실과 회의실에서 이루어지지만 극히 제한된 범위의 간부회의--라기 보다는 밀의(密議)는 회장실 소파를 이용했다. 그런 회의는 대부분 회사 기밀에 속하는 정책적인 것들이었다. 지금 회의도 그런 종류의 밀의였다. 소파에 상체를 깊숙이 파묻은 육십대의 정한한 몸체. 뒤 책상 위에는 자개로 박은 큼직한 명패가 주인의 위용을 자랑했다. 회장 현명준(會長 玄命俊) 태양상사를 이십년 만에 종합상사 상위 랭킹으로 키워 온 창업 오너였다. 건장한 체구와 깊은 주름 사이로 날카롭게 빛나는 두 눈엔, 언제든지 상대방을 제압할 준비가 되어 있는 위엄과 투지를 숨기고 있었다. 환갑을 맞았던 해에 회장으로 물러 앉았지만, 회사의 실제 경영권은 물론 그의 손을 벗어나지 않았다.. 회장이 된 지난 3 년간 변한 것이 있다면 대외 활동이 거의 없어져 버린 것. 보통의 경우, 회장은 대외 업무, 사장은 회사 살림--그렇게 분담되지만, 현명준 회장의 경우는 정 반대였다. 대외활동--재계활동은 거의 모두 사장에게 맡기고 자신은 오로지 회사 일에만 몰두했다. [결국 실패했다는 게로군!] 현회장은 잠시 침묵을 흘린 다음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아랫사람의 보고가 끝난 다음, 잠시 동안의 침묵을 즐기는 것은 현회장의 오랜 버릇이었다. 그 침묵이 보고 당사자의 기를 꺾어 버리는데, 얼마나 효과적인가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잡화담당 상무는 회장의 코멘트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 옆에 나란히 자리한 김우식 사장, 박현구 부사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회장의 관심사항--지시사항을 뜻대로 받들어 마무리 짓지 못한 것을 공손한 태도로 얼버무려 버리기로 약속한 것처럼 보였다. [북두산업이 따낸 봉제인형의 의장특허권을 매입토록!] 현회장이 앞에 앉은 세 사람에게 지시한 것은 열흘 전이었다. --북두산업은 봉제인형을 비롯한 잡화를 수출하는 중소기업. 태양상사 회장이 관심을 가질 정도의 규모는 결코 못 되었다. 그런데도 현회장이 북두산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서너달 전부터였을 것이다. 북두가 봉제인형을 아이디어 상품으로 개발, 의장특허를 얻어, 그 발표회를 가졌다는 것이 경제지에 보도된 것이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 --소리와 향기가 나는 인형? 이건 탐이 나는 걸! 간부회의에서 몇 번이고 현회장이 관심을 나타냈지만 멍청한 녀석들이 눈치를 채지 못해 결국 특허권 매입을 직접 지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봐, 김사장! 그 쪽에서 끝내 특허권을 팔지 않겠다면....... 어때? 북두산업을 통째로 인수하도록 해 보지 그래!] [북두산업을 인수합니까?] 김우식 사장은 뜻밖이란 듯이, 놀람으로 눈을 크게 떴다. [응!] [그쪽에서 회사를 처분한다고 했습니까? 그렇다면 정말 잘 된 일입니다!] [앞지르지 말게! 저 쪽 의사와는 관계없이 사버리자는 게야! 봉제인형 특허권도 특허권이지만, 하나쯤 무역창구가 더 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구.......] 현회장의 말에 세 사람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입만 다문 것이 아니라, 몸 전체가 굳어져 버렸다. --회장의 얼토당토않은 옹고집에 또 발동이 걸렸구나! 이렇게 굳어진 자세로 회장 앞에 한 시간만 더 앉아 있으면 석고상이 되어 버릴 것이라고 세 사람은 똑같이 걱정을 했다. [불가능할 것 같은가? 김사장!] [너무 뜻밖이어서....... 가부는 검토한 뒤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이런 건, 검토해서 결정할 일이 아니야! 팔지 않겠다는 사람에게 사겠다는 쪽이 하기 나름으로 흥정이 될 수도 있어! 그게 장사의 기본이야! 그런데, 북두산업 뒤는 누가 보살피고 있누?] [뒤를 보살핀다고 하시면.......] [쉽게 말해서 빽이 누구냐, 그런 뜻이야!] [북두산업의 빽이라고 하시지만....... 이름 없는 중소기업에 그런 게 있을 것 같지가 않군요!] [이름도 없는 중소기업? 그런데도 천하의 태양상사가 쩔쩔매고 있는 건 왠가?] 현회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앞에 앉아 있는 사장, 부사장이 자기 얘기의 핵심을 파악 못하고 있는 데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얼간이 같은 것들! 겨우 해방이 되었다는 표정으로 세 사람이 회장실에서 비서실로 나오는 것과 동시에 인터폰이 울렸다. 미스 김이 잽싸게 버튼을 누른 다음 응답했다. [네, 회장님!] [윤경식 과장 들어 오라고 해!] [네?] [윤경식 과장 말이야!] [윤경식 과장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래! 시집도 안 간 처녀가 벌써 귀라도 먹었다는 거야?] 인터폰을 통해 울려나오는 현회장의 고함에 미스 김은 혀를 낼름 내밀었다. 뜻밖이었다. 회장님이 저렇게 노하는 것은 뜸뜸이 있는 일이었지만 윤경식 과장을 호출한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아마도 일년은 훨씬 더 되었을 거야. 회장이 윤경식 과장을 찾는 건--. 아니 회장님이 자주 불렀을 때의 윤경식씨는 기획조정실장이었으니까, 그가 과장으로 강등된 뒤에 회장님이 찾으시는 건 이번이 처음일 거야! 미스 김은 재빨리 머리를 회전시키면서 총무부로 연결된 버튼을 눌렀다. "어머! '호메이니의 벽화'를 회장님이?" 총무부 아가씨의 놀람이 인터폰 속에서도 잡힐 듯이 느껴졌다. "누가 아니래? 하여튼 빨리 올라오도록 전해줘. 지금 이곳은 태풍 경보중이야!" 윤경식 과장 한때는 이사 승진 후보로까지 촉망받던 에이스급 부장이었지만, 지금은 과장으로 강등된 처량한 신세였다. 부장에서 과장으로 강등이 되었으면서도 묵묵히 출근을 계속하는 그의 뱃심에 놀란 것은 물론이었다. 그 놀라움은 어느 새 또 다른 각도에서의 놀람으로 이어졌다. 부장에서 과장으로--그것도 보직이 없는 총무부 대기로--강등시킬 만큼 회사에 손해를 끼쳤으면, 아예 목을 잘라 버리는 게 마땅한데도, 현회장이 그렇게까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느끼는 놀라움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저런 일들도 일년이 지난 지금에는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회장이 호출을 하다니....... 미스 김은 비서실에 들어서는 윤경식 과장 모습을 보고 인터폰을 눌렀다. "윤과장님 들어오셨습니다." "들어 오라고 해!" 회장의 목소리는 그동안 퍽 누그러져 있었다. 현회장은 들어서는 윤과장에게 턱으로 앉도록 지시했다. 회장실이라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조심스러워 하는 기색은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는 녀석. 그의 무심한 것 같은 표정에는 오히려 오만함이 서려 있다고 현회장은 생각한다. --누구에게도 속을 보이지 않는 무서운 녀석! 이것이 현회장이 갖는 윤경식에 대한 경계심이었다. 그런 것도 어쩌면 젊었을 때 자기가 갖고 있었던 것과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게 바로 마음에 든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회장 자신은 윤과장의 지금 나이 때 이미 태양상사를 창업했었다. 때문에 자신과 윤경식의 분위기가 비슷하다곤 하지만, 그릇의 크기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라는 자부심에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윤경식은 현회장 친구의 유복자였다. 친구도 보통 친구가 아니었다. 친하진 않은 사이였지만, 묘한 일이 계기가 되어, 그는 현회장의 생명의 은인이 되어 주었다. --현회장 대신 죽어 준 것이다. 그건 참으로 묘한 인연이었다. 현명준을 없애기 위해 습격해 온 상대방은 현이 숨어 있던 집에 불을 질렀다. 그때 불행하게도 그 집안에서 화를 당한 것이 바로 윤경식의 아버지였다. 상대방은 그의 불탄 시체를 현명준으로 생각해 주었기 때문에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그때 현명준에게 함께 귀국시켜 줄 것을 간청한 것이 임신중인 윤의 여인--윤경식의 어머니였다. 벌써 사십년 전 일본 코오베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현을 없애려고 했던, 실제로 없앴다고 믿었던 그룹은 지금 일본 전역을 휘어잡고 있는 것이다. 야쿠자--소위 광역 조직 폭력배(廣域組織暴力輩)의 핵심 세력으로 뿌리를 내린 것이다.. "이렇게 마주 앉아 보는 것도 꽤나 오랜만이군!" "네. 일년 이주일 만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올해 몇인가?" "대충 마흔쯤입니다." "대충 마흔이라....... 대충이 좋겠지, 나이 같은 건....... 헌데 이렇게 마주 앉고 보니까, 아버질 많이 닮았군!" "......." "...... 네 보고서를 보면, 북두산업의 자금 사정이 꽤나 심각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어느 정도인가?" "위험하달 수는 없는 정도입니다. 보고서에도 기록했습니다만, 그것도 앞으로 빠르면 석달, 늦어도 반년 안으로는 해결 될 전망입니다." "어떻게 해서?" "북두의 자금 사정이 악화된 원인은 첫째, 신형 봉제인형에 대한 설비투자, 둘째 오퍼업의 부진에서 온 수입(輸入)파트의 수입이 바닥으로 떨어진 데 있습니다. 그 중 수입파트의 업무가 근근 회복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른 얘긴 없나? 북두에 대해서?" "확인이 안된 얘기입니다만......." "뭔가?" "북두의 김사장이 최근 자기 소유 주식을 담보로 사채를 빌리려고 뛰고 있다는 얘깁니다." "호오, 그래서......."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는 얘깁니다. 사장이 자기 소유 주식을 담보로 하겠다는 것은 아무래도 말기현상이 아니겠느냐구, 특히 중소기업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고 사채업자들이 믿기 때문이죠." "그렇겠지, 결국 네가 확인한 바로는 북두의 자금사정이 나쁘긴 하지만 심각하지는 않다는 것이로군. 또 미확인 풍설로는 사장이 사채를 끌어 들이기에 동분서주할 만큼 심각하다는 것이구......." "그렇습니다." "수고했어. 이틀 동안에 정말 많이도 조살 했군. 과연 윤경식이야!" "한가지 물어 봐도 좋습니까?" "좋아, 딱 한가지...... 내가 왜 북두산업의 현황 조사를 너한테 은밀히 지시했느냐의 이유를 제외하고라면 뭐든지 물어도 좋아!" "그러시담, 물어 볼 것이 없군요!" "그럼 내가 한가지 물어봐도 괜찮겠는가?" "네. 죄송하지만, 딱 한가지...... 북두산업을 제가 어떤 방법으로 회장님이 원하시는 상태로 몰아 갈 것인가 하는 것 이외는 무엇이든 말씀드리겠습니다." "음!" 어금니를 주억거린 현회장은 말을 이었다. "대충 마흔쯤 된 나이라면, 회살 하나 맡아 경영해 보겠다는 생각은 없나?" "태양상사라면, 즐겁게......." "이봐, 태양엔 아직 내가 있어!" 현회장은 조금은 장난기를 섞어 엄숙하게 윤경식을 노려 보았다. 2. 부도날 때는 사랑을 ...... (1) "얘, 주옥아. 네 몸에선 재미있는 냄새가 풍기는구나!" "어떤 냄새 ? 냄새에도 재미있는 게 있고, 재미없는 게 있나요?" "그럼!" "어떤 냄새가 재미있는 냄새예요? 사장님에겐......." "네 냄새가 재미있지!" 김칠성 사장은 자신의 왼쪽 팔을 베개 삼아 누워 있는 주옥이를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토요일 오후 1시. 한적한 호텔의 침대 위. 물론 두 남녀가 정장(正裝)을 하고 있을 까닭이 없었다. 부부가, 한나절을 즐기려 호텔에 돈 주고 들 턱도 없는 일이었다. 남자쪽은 가끔 그러고 싶을 때가 있을지 모르지만, 콩나물 백원어치 사면서 십원을 깎자고 덤비는 주부족이 되면 어림없는 소리다 요는 김칠성과 박주옥은, 비정상적인 오후의 정사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어떤 냄샌데요? 가르쳐 주세요." 남자 품에 안긴 여인은 한껏 목소리를 코 끝에 걸어서 보챘다. "항상 느끼지만, 오늘은 한층 더 짙군.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몸이 안 좋다든가, 아니면 날아갈 것 같이 좋은 일이 있다든가......." "별루요. 전 삼백 육십 오일을 하루같이 살자는 쪽이니까요....... 변화 같은 것 없어요. 그것보다 무슨 냄새가 나다요? 저에게서." "쑥냄새. 이른 봄 밭두렁 양지쪽에 파릇파릇 돋아나는 햇 쑥냄새가 물씬 거려요! 이 귀여운 몸에선!" 칠성은 주옥이를 감은 팔에 다시 힘을 넣었다. 그러면서, "왜 쑥냄새가 나지?" 하고 물었다. "왜 일까요?" 하고 말을 받던 주옥이가 쿡쿡 웃기 시작했다. 한참만에 웃음을 거둔 주옥이, "왜 쑥 냄새가 나는지 알았어요. 알아맞춰 보세요." "흠, 네가 시골뜨기니까!" "피--. 그게 아니구요, 사장님 탓이에요!" "내 탓?" "네." "흠, 내가 네 몸에 쑥을 심었다는 얘기야?" "모르시겠어요? 사장님이 제몸을 쑥밭을 만들어 놨으니 쑥 냄새가 나는 거잖아요!" 주옥이의 목소리는 뜻밖에 앙칼졌다. 하지만, 그녀의 눈언저리에 장난기 서린 잔잔한 웃음이 번져 있음을 보고, 김칠성은 훅하고 들리지 않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놈! 날 만나기 전에 쑥밭이 되어 버린 주제에! 설마 나보고 처녀 복원시켜 달라는 건 아닐테지! 안도는 했지만, 앙칼진 여인의 목소리에 남자는 일순 흥이 깨어져버리는 것을 느꼈다. 젊지는 않지만, 오늘은 이렇게 주옥이를 품고, 저녁까지 몇번이고 몸을 섞으면서 쉬고 싶었다. 사십 중턱을 넘어서고 나자, 기분이 곧잘 노인쪽으로 달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늙었다곤 할 수 없지만, 이십대, 삼십대와는 비교가 안 되었다. 퇴색해 가는 젊음을 되찾고자 부르짖는 대열에 끼이게 된 김칠성은 회춘(回春)의 묘방으로 젊은 여인을 찾아 다녔고, 운좋게도 박주옥을 단골--미화해서 애인, 통속적으로 해서 정부로 삼게 된 것이다. 칠성이는 주옥이의 등을 토닥거려 주고는 침대에서 빠져 나왔다. 샤워실로 들어가기 전, 그는 옷걸이에 걸린 옷저고리 지갑에서 수표를 빼내 주옥이에게 건넸다. "지난 번 얘기했던 것. 오백이야!" "어머. 정말 도와 주시는 거예요!" 주옥이는 한번도 돈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김칠성이 뜸뜸이 집어 주는 것도 얼굴이 빨개지며 거절해 왔었다. 그런 주옥이가 지난 번 전화로 원조를 요청해 온 것이다. 오늘 주옥이와 만난 목적에는 이것을 건네 주기 위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표를 베드테이블 위의 핸드백에 넣은 주옥은 담요로 몸을 감으면서, "요즘, 회사 괜찮으세요?" 하고 물었다. "괜찮지 않으면...... 도와 줄테야?" "그런 건 아니지만, 조금 신경이 쓰이는 일이 있어서요!" "신경 쓰이는 일? 아니 주옥이 신경 거스릴 일이 우리 회사에 있다는 얘기야?" "그게 아니구요. 요즘 저희 회사에 사장님 회사 수표가 심심찮게 돌아오거든요. 전에는 없었던 건데......." "수표가?" "네" 김사장은 고개를 갸우뚱하다간, 이내 좁혔던 미간을 풀었다. "뭐, 별거 아닐 게야. 하청공장 같은 데서 와리깡이라도 부탁했겠지. 뭐라고 하든 태양상사는 자금 여유가 많은 회사가 아닌가!" "그렇담 좋지만!" 주옥이는 잠시 망설였다. 태양상사 경리부에 근무하는 주옥이는 김칠성이 너무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더 이상 얘기할 것도 없었다. 김칠성이 샤워를 마치고 나서 옷을 입기 시작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집어 든 것은 물론 김칠성. 그는 회사를 나올 때, 비서에게 호텔 번호와 방 번호를 항상 연락해 두는 것이다. 그럴 경우는 좀처럼 없지만, 긴급할 때의 연락처를 그는 꼭 일러 두는 것이다. "나야! 무슨 일이야?" 김칠성이는 어깨와 턱 사이에 수화기를 끼운 채 허리끈을 여미면서 전화를 받았다. "뭐라구? 바보 같은 소리 작작하라구. 거기 꼼짝말고 있어, 오분 안에 들어갈 테니까!" "꼼짝말고 있어!"는 김칠성의 입버릇. 화가 잔뜩 났을때의 전매특허였다. 지금도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호텔 도어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호텔과 북두산업이 세들어 있는 새서울 빌딩과는 코 닿는 거리였다. "성질도 급하시긴......." 박주옥은 입술 연지를 막 고친 입술을 거울 속에서 삐죽 내밀었다. 호텔방 문을 박차고 나선 기세가 조금도 죽지 않고-- 오히려 가속이 붙어, 험상 궂어진 얼굴로 김칠성은 사장실로 뛰어들었다. 비서인 문희경(文喜耕)이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뒤따랐다. 소파에 몸을 던진 김칠성은, "모두들 들어오라고 해!" 하고 희경에게 지르려던 고함을 중간에 꿀꺽 삼켰다. 모두들--경리부장, 수출부장, 영업부장이 이미 사장실 소파에서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경리부장 얘기해봐!" "네. 저도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조금 전에 은행에서 연락이 와서야 겨우....... "무슨 소리야! 경리부장이 수표 돌아 오는 걸 몰랐다면 누가 알아?" "대장에도 기록이 안된 수표입니다. 은행에 돌아온 건...... 그래서 혹시......." "혹시, 어떻다는 거야?" "혹시 사장님이 발행하신 건가 하고......." "웃기는 소리 말앗!" 얘기는 간단했다. 거래 은행쪽에선 북두산업 발행의 수표가 두 장 돌아왔는데, 잔고 부족이니까 돈을 갖다 메우라는 것이다. 두장의 합계 금액은 이천팔백 만원. 그것을 경리부장이 모른다는 것이다. 경리부장이 모르는 수표. 경리부장이 멍청하거나 수표에 문제가 있거나, 두 가지 중의 하나였다. 더구나 오늘이 월말 토요일. 월요일엔 당좌대월을 갚아야 하기 때문에 아침부터 서둘러 겨우 대월 오천만 원의 미봉책을 세워둔 터수에 느닷없이 이천팔백 만원이라니. 지금 당좌구좌는 잔고가 한 푼도 없는 건 물론이다. 한푼도 없는 게 아니라 대월 오천만원이 있으니까 마이너스 오천만원. 돌아온 수표는 부도가 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수표를 돌린 곳은 어디라고 그래?" "네, 태양상삽니다." "태양상사?" 김칠성은 입에 물었던 담배를 얼른 재떨이에 던졌다. 태양상사. 조금전에 박주옥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사장님의 회사 수표가 심심찮게 돌아와 신경이 쓰인다."던 주옥의 얘기. "태양상사가 왜 우리 수표를?" "네. 아마도 와리깡을 해준 것 같습니다." "그런 정도는 나도 알아! 누구에게 와리깡해준 건지 알아봐!" "네!" 밖으로 나가려는 경리부장에게, "여기서 전화 걸어!" 하고는 영업부장과 수출부장에게 눈을 돌렸다. "수출부장! 혹시 하청공장 중에 집이는 곳 없나?" "없습니다. 죽 체크했지만, 오늘 날짜로 지불된 곳은 없습니다. 또......." "또, 뭔가?" "네. 액면이 너무 큽니다. 우리 하청공장의 공임치고는......." 그랬다. 두장의 금액이 이천 팔백이라면, 하청 공임으로는 너무 컸다. 북두 산업은 로트별로 결재하기 때문에 한 건당 금액은 기백 만원을 넘지 않았다. 영업부의 업무는 오퍼세일. 그러니까 특별히 거금의 지불이 있을 수도 없고, 수출부의 원부자재는 전부 로칼 베이스이니까 여수표가 통할 까닭이 없었다. "사장님, 수표는 풍년봉제사의 이서(裏書)가 있답니다." 경리부장이 은행과 통화를 끝내고 보고했다. "풍년봉제사?" "네. 풍년풍자에 해년자, 풍년봉제사랍니다." "누가 자네한테 글자풀이 하라고 했어?" 김칠성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풍년봉제사. 생소한 이름이었다. 수출부장도 머리를 흔들었다. "수표책 가져 와봐!" 경리부장은 김칠성이의 고함소리에 금고로 달려가서 수표책을 끄집어 내었다. 김칠성은 찬찬히, 한장 한장 살폈다. 처음엔 발행한 뒤 계인이 찍힌 남은 쪽을 살폈다. 거기엔 거액의 발행은 없었다. 쓰지 않고 남은 쪽에도 이상이 없었다. 김칠성은 직접 금고쪽에 가서 안쪽 구석에서 다른 수표책을 집어 들었다. 이 수표책은 주로 사채 '와리깡'할 적에 발행하는 것이다. 거액이기 때문에 김칠성이가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 "돌아 온 수표, 혹시 가짜 아냐? 위조된 거라든가......." "아니랍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은행쪽은 틀림없는 진짜라고 합니다." "음. 이상하지 않은가! 이건." 이상하다고 해서 버려 둘 일은 물로 아니었다. 김칠성은 턱을 쑥 문지르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래 은행에 가기 위해서였다. "잠시들 기다려. 내가 연락할 때까지!" 그들은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일단 묶어두기로 마음먹었다. 사장 혼자 쏘다니게 하고, 사원만 '즐거운 토요일!'이 되어서는 공평하지 않다는 심술이 조금은 있었기 때문이다. 거래 은행 지점장은 자리에 있었다. 수표를 받아든 김칠성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수표에 찍힌 도장과 회사명판은 두말 할 여지가 없는 진짜였다. "월요일 아침까지, 어떻게든 내 힘으로 부도는 내지 않을 테니까요......." 지점장은 흥분에 젖은 김칠성에게 말을 건넸다. 다행스럽게도 내일은 일요일이라는 하루의 덤이 있으니까 그동안 돈을 융통해서 막으라는 얘기였다. "이 수표가, 사고 수표라면, 막지 않아도 되는 거지?" "사고 수표라면, 그럴 테죠. 하지만 김사장님!" "도장과 명판은 두말 할 나위 없는 진짜지만, 수표는 가짭니다!" 찍힌 도장은 진짜지만 수표는 가짜라는 김사장의 얘기에 지점장은 싱긋 웃었다. "김사장님! 사업엔 산도 넘고 골짜기도 뛰어넘어야 하잖습니까? 너무 흥분 마시고 월요일 아침까지 뛰어보세요! 오늘은 모처럼, 어디 함께 사우나라도......." 결국 얘기는, 빗나가고 말았다. 사우나에 따라갈 만큼 한가하지도 않았고, 첫째 가슴속에 들끓는 불길을 안고 뜨거운 증기를 쐬었다간 타 죽을 것 같았다. --못 마시는 술이었다. 홧김에 거푸 마신 스카치로 정신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취기에 휩쓸렸다. "술엔 약하군. 학생 때나 지금이나!" 취기에 흐느적거리는 김사장을 글라스 너머로 바라보던 박변호사가 비아냥거렸다. 은행을 나온 김칠성이가 찾아간 곳은 대학 동창인 박인규(朴仁圭)변호사였다. 사정 얘기를 들은 박변호사는 한마디로 잘랐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결국 자네만 손해야!" "왜?" "그 수표가 사고 수표라 치자, 하지만......." "치자가 아니라, 진짜 사고수표야!" "글쎄, 얘기 들어보라구. 사고 수표라면, 자네가 액면만큼의 금액을 법원에 공탁을 한 다음, 법정에서 싸울 수야 있어. 그렇지만, 자네가 꼭 이긴다는 보장은 없어! 그것보다 소송 과정에서 자넨 만신창이가 되고 말 거야!" "왜!" "자넨 수표가 사고 수표임을 자네 힘으로 입증해야 하고, 또 상대방은 자네가 거짓말한다고 맞설 테니까." "하지만, 진리는......." "진리나 정의는 교과서 안에서야. 그 단어는 교과서를 빠져 나오면 맥을 못 추지. 찬물 속의 자네 물건처럼......." "이 사람! 지금이 농담할 때야?" "그래, 미안해!" 하지만 박변호사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발행한 수표를 막을 수 없으니까, 사고라고 생떼를 쓴다고 상대방이 덤벼들어 회사의 자금 사정이나 사채 등을 집중으로 파고들었을 때, 그것도 대법원까지 몇 해 동안 끌었을 때, 북두산업이 견디어 내기엔 너무 벅차다는 얘기는 정확했다. 어쨌든 수표에 찍힌 회사 법인 인감과 명판이 진짜임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소송에서도 상당히 군색해질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이다. 그것보다 당장 이천 팔백 만원의 공탁금과 소송비용. 그 정도의 여유가 있다면 시침 뚝 떼고, 수표를 결재하는 것이 영리한 선택이라는 것이 박변호사의 충고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 호텔 스카이 라운지로 마시러 온 것이다. "술, 못 이기겠음, 자네 먼저 들어가도 괜찮아. 아니 들어가는 게 좋겠어! 난 아홉 시에 여기서 약속이 있어." 박변호사 말에 김칠성은 시계를 보며 일어섰다. 여덟시 사십분. "힘내게!" 하는 박변호사의 격려를 등뒤로, 그는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 엘리베이터에는 까만 양복을 입은 건장한 청년 두 사람과 역시 까만 원피스의 여인이 함께 탔다. 여인의 피부는 엘리베이터의 희미한 라이트가 무색할 만큼 희고 반짝였다. 김칠성의 눈길을 의식한 탓일까? 여인은 아주 엷은 웃음을 눈가에 지어 보였다. 호텔 현관에서 자동차를 불러 놓고 김칠성은 주위를 살폈다.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던 여인이 어느 쪽으로 갔을까 해서 였다. 특별히 그 여인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보다, 하얀 피부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였다. "혹시 북두산업 김사장님 아니세요?" 등뒤에서 들려온 허스키의 묵직한 목소리에 김칠성은 몸을 돌렸다. 까만 양복의 건장한 체구. 조금전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던 남자 두 사람이 등뒤에 서 있었다. "당신들은?" "오늘 교환 돌아온 수표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사장님께." "수표?" "네. 그건 함정이죠! 김사장님을 빠뜨리자는......." "당신은 누구요?" "아시게 됩니다, 곧. 너무 소리가 크군요. 듣고 싶으시면 조용한 곳에서......." 말씨는 극히 정중했지만, 그들의 행동은 날쌔고 거칠었다. 두 사내가 한쪽씩 김사장의 겨드랑 밑에 팔을 끼어 넣어 들어 올렸다. "이게 무슨 짓이야?" "쉿, 저쪽에서 조용히 말씀드리죠. 십분이면 됩니다. 우린 김사장님을 돕고 싶을 뿐이니까요!" "저쪽이 어디요?" 저 차 안에서 잠시 얘기를 나누죠." 왼쪽의 사내가 턱으로 길 건너를 가리켰다. 거기엔 검정색의 벤츠가, 뒷 도어가 열린 채 멈추어 있었다. 호텔 앞 도로를 건넌 두 남자는 김칠성을 번쩍 들어 차 속에 태우자마자 벤츠는 급속도로 출발했다. 김사장은 가까스로 벤츠의 뒷창으로 자기 운전수 미스터 김이 호텔 정문에서 차문을 열고 서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곤 그만이었다. 옆 사내가 포키트에서 끄집어 낸 손수건을 얼굴에 갖다 댐과 동시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이건 납치다! 마취다! 빌어먹을......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안간힘으로 남긴 것은 이 세마디뿐이었다. (2) 김칠성 사장의 부인...... 황인희 여사. 그녀의 낙천적인 성격은 사십대에 접어들면서부터 국보급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친구들은 늙지 않는다고 부러워 하지만, 그녀가 늙지 않고 삼십대의 젊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출산을 하지 않은 탓이었다. 타고난 낙천성은 남편인 김칠성에게 숨은 여인이 있음을 알고도, 오히려 태연할 수 있었다. "어머, 그 양반 솥뚜껑으로 자라 잡는 재주 있는 줄 몰랐어! 그러다가 달덩이 같은 아들 하나 들어오면 얼마나 좋겠어? 호호호." 하는 바람에 모처럼의 호의로 알려 준 친구가 무안을 당한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이 연락없이 하루 이틀 외박을 한다고 해서 안절부절할 까닭이 없었다. 월요일 아침 열시. 커피와 토스트로 늦은 아침을 가볍게 때운 황여사는 수첩을 보면서 오늘 일정을 확인한다. 점심은 동창계, 하오 세시부터는 주부 도자기 교실, 저녁은 꽃꽂이회 합동전시회 개막 리셉션....... --오늘도 바쁘구나! 하품을 하면서 커피라도 한잔 더 마셔야겠다고 일어섰을 때 전화가 울렸다. "아줌마, 전화!" 가정부에게 전화를 맡기고 천천히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사모님! 사장님 찾는 전환데요......." "회사로 걸라고 그래요! 보다시피 여긴 아줌마하고 나하고 둘 밖에 없잖아!" "회사예요. 사장님 안 계시다니깐, 사모님이라도 바꾸래요." "사모님이라두라니......, 버릇들이 없어. 중소기업 사원들이란......." 하지만 별달리 불쾌해서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전화는 사장 비서인 미스 문으로부터였다. 목소리가 몹시도 다급했다. "사장님 안 계셔요?" "어머, 미스 문, 별일 없었지? 자주 놀러 좀 오질 않구......." "그것보다 사장님 연락처 모르셔요?" "왜? 회사에 안 계셔?" 되물은 황여사는, 자기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다. 사장이 회사에 있다면, 여비서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 찾을 까닭이 없다는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미스 문의 숨 넘어 가는 소리로 짐작해서 어지간히도 다급한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이 양반이 어디서 태평연월을 읊고 있단 말인가! 황여사는 잔뜩 마음을 졸인 다음, 수화기에 대고 말을 이었다. "무슨 큰 일이 난 모양이군. 무슨 일이야? 뭐, 부도가 나게 됐다구? 그럼 안심해도 괜찮아! 그런 일이라면, 그 양반이 어련히 알아서 하려구! 난 또 회사에 불이라도 났나 했지!"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사모님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문희경은 힘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경리부장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사모님도 모르신대? 사장님 계신 곳......." "네." "뭐라셔? 사모님은." "부도 정도라면, 사장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잖겠냐구, 그러니까 안심하라는 거예요!" 그렇다고, "아, 그렇습니까?"고 두손 놓고 푹 쉴 형편이라면 오죽이나 좋을까? 거래 은행에선 매 오분마다, 부도를 내어도 좋으냐고 야단이었다. 부도. 기업으로서는 사형 선고가 내리는 판에 사장이 행방을 감추어 버리다니. "혹시......." 수출부장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혹시, 뭔데?" 경리부장이 얼른 받았다. 수출부장에게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묘안이라도 있나 싶어서였다. "혹시 사장님, 이런 것 아냐?" 수출부장은, 두손을 들어보였다. "에이, 이 사람!" 했지만, 경리부장도 불길한 생각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교환 돌아온 수표에 대해 취한 애매한 태도. 그리고 행방불명. 결국 자금 끌어대기에 지쳐 버려, 아니 자금원이 바닥이 나서 그만 두손을 들기로 작정하고 사전에 준비를 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것이었다. 더욱, 토요일 밤, H호텔에서 자동차까지 불러 놓고 잠적해 버린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덕분에 운전수 김씨는 오늘 아침까지, "사람 병신노릇 시켰다!"고 불만이 대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병신이 된 것은 미스터 김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바람맞힌 김칠성 사장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김사장은 미스터 김처럼 불만으로 펄펄뛸 수 없는 지경에 놓였음이 다를 뿐이었다. 멍청해진 정신을 가다듬은 김칠성은 벌떡 일어나다가, 다시 침대에 쓰러졌다. 머리가--관자놀이랑 후두부에 쪼개지는 듯한 아픔이 스쳤기 때문이다. 이윽고, 일어나 앉은 김칠성은 주위를 살폈다. 낯익은 방, 그리고 자신이 알몸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 방이 뜸뜸이 박주옥이와 함께 이용했던 곳이란 것을 알기까지는 한참 시간이 흘러야 했다. 침대 옆, 보조 테이블에 붙박힌 디지탈 시계가 "10:10"이란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커튼을 걷어내고서야 10:10이 오전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차츰 머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H호텔에서 건장한 남자에게 끌려 벤츠를 탔던 데서 필름은 끊겨져 버린 것이다. 다만 두어 번, 젊은 여인과 함께 주스랑, 우유를 마신 것 같았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오늘이 며칠인가?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나자, 그는 날짜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왜 자기가 미스 박과 이용했던 이 호텔에서 자고 있었는지도 알고 싶었다. 프론트에 전화를 걸려고 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웨이터가 웨건을 밀며 들어왔다. "주문하신 식사입니다. 함께 계셨던 여자 분은 다녀오실 때가 있다고, 오늘은 혼자 드시라는 전갈이 있었습니다!" "주문했던 식사? 여자 분?" "네. 그리고 아침 신문도 함께......." 김칠성은 뺏듯이 신문을 잡아챘다. 신문의 발행일자를 보고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화요일이었다, 오늘은. 그러니까, 자신은 토요일 밤부터 화요일 아침까지, 계속해서 잠을 잤다는 얘기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경제면과 사회면을 넘겨 보고는 풀썩 주저앉았다. 끝나 버린 것이다. 북두산업은 부도를 내고 도산, 은행과 주요 채권자들이 사후 대책위원회 구성을 위해 오늘 모인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김칠성은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미스 문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나야, 회사는 쑥밭이 되었겠지? 음, 괜찮아. 조용히 경리부장과 함께 와줬음 좋겠어. 그래, 바로 와줘!" 그는 다시 박변호사에게 와 달라는 전화를 걸고는 집으로 전화를 했다. "어머, 당신!" 황여사의 목소리는 생각했던 대로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는 갈아입을 옷가지를 갖고 오도록 호텔 위치를 알렸다. "어머, 호텔이에요? 몇 년만일까? 당신과 호텔에서 데이트하는 것이......." --이 태평한 여자야! 김칠성은 울컥 짜증이 치밀었지만, 그런 낙천적인 것이 황여사의 매력이었고, 그것에 반해 결혼까지 몰고가는데, 숱한 라이벌을 찍어 넘어뜨려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었다. --이건 분명한 음모다. 사고 수표에 이어 사장납치. 분명히 배후가 있는 것이다! 김칠성은 담배를 피워물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할까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허스키의 묵직한 남자 목소리. "그동안 고생했읍니다, 김사장님. 테이블 서랍에 위로금 천만원이 들어 있으니까, 그걸로 푹 쉬십시오. 회사 걱정은 저희들에게 맡기시고!" "누, 누구냐, 네놈은!" 김사장의 고함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전화는 끊겼다. 테이블 서랍에는 정말 돈이 들어 있었다. 백만원 뭉치가 열 묶음. 모두 헌 지폐였다. "그러니까, 자넨 이 모든 게 음모라는 얘긴가?" 박변호사는 김칠성의 얘기가 끝나자 물었다. 넓지 않은 호텔방에는 김칠성 사장, 박변호사, 북두산업 경리부장, 미스 문, 그리고 김사장 부인 황여사가 자리를 함께 했다. 두개 있는 소파에는 김사장과 박변호사가, 보조의자는 황여사가 차지했고, 경리부장과 미스 문은 더블베드에 나란히 걸터 앉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어? 이번 사태를." 박변호사가, 자기 얘기를 확실히 믿어 주지 않는 것 같아 불만스레 김사장은 되묻는다. "그렇담, 배후는?" 하는 박변호사. "몰라!" "북두산업이, 다른 사람이 탐낼 만큼 대단한 기업인가? 특수한 기술이라도 갖고 있는......." "향기와 소리나는 인형?" "응! 하지만 그건 별것 아냐!" "사장인 자네가 별것 아니랄 정도라면, 그것도 얘기가 안 되는군! 그리고 납치당했다고 주장하는데, 그걸 증명할 수 있어?" "납치당한 사람의 말 이외에 또 뭐가 더 필요한가?" 김사장은 퉁명스레 내뱉으며 후두부를 지그시 눌렀다. 흥분 때문에 가라앉았던 통증이 다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걸 보게!" 박변호사는 주머니에서 종이를 끄집어내어 김사장에게 내밀었다. "호텔 계산서야. 분명히 두 사람 분의 사흘치 숙박료와 식사대를 청구하고 있어. 그래도 납치야?" 박변호사의 말에 김사장은 입을 다물었다. 할말이 없었다기보다, 누구도 믿어 주지 않는 얘기를 계속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음모는 내 손으로 파헤칠 수밖에 없게 됐구나.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며, 누가 왜, 이 김칠성이를, 북두산업을 노리는가? 부도 총액은 일억이 넘었다. 거기에 은행대출 팔천, 당좌대월 오천, 그리고 사채가 이억. 부채 총액은 오억에 달하고 있다는 것이 경리부장의 보고였다. 그중에 부도 일억은 도대체 믿을 수 없는 숫자였다. 그렇게 많은 금액의 수표가 발행되었을 까닭이 없었다. "미안해, 자네 얘길 믿지 않는다는 것보다, 현재 상황이 그걸 믿을 수 없게 되어 있다는 얘기야." 박변호사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을 이었다. "뭣보다 자넨 몸을 숨기는 게 급해. 부정수표 단속법에 따라 즉각 수속될 수도 있으니까. 변호사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의 얘기야! 우선 몸을 피할 만한 곳을 생각해내게! 아주머닌 괴롭겠지만." "그럼요. 이 삼복에 교도소라니, 날씨가 선선해지면 몰라도......." 잠자코 있던 황여사가 끼여드는 바람에, 박변호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머닌, 이 사람이 시원할 때라면 교도소엘 가도 괜찮다는 얘긴 가요?" "그건 아니지만......." "가만 좀 있어, 당신은. 지금은 당신의 그 태평연월이 끼어 들 때가 아니야!" 김사장의 고함에 황여사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이곳 일은 당분간 나한테 맡겨 놓고 고향에라도 다녀오지 그래! 그동안 음모라면 윤곽도 잡힐 테고, 일단은 구속이 안되는 쪽으로 손을 써 볼 테니까!" 박변호사의 말은 정말 우정 어린 충고였다. "고맙군. 하지만 내 고향은 함경도 청진이야!" "맞아요, 당신 고향은 함경도...... 그렇다고 이북 오도청엘 다녀올 수도 없고...... 강원도는 어떨까요? 같은 동해안이니까, 함경도완......." 황여사의 진지한 표정에 박변호사도 맞장구를 쳤다. "그렇군. 강원도 동해안에라도 다녀 와! 한 두어 주일." 3. 고감도(高感度) 실마리 (1) "미스터 조 나왔음 좀 보잔다구 전해!" 박인규 변호사의 말에, 아침 커피를 갖고 들어온 여사무원은 알았다는 목례를 남기고 돌아섰다. 문을 닫고 나가버린 여사무원의 뒤에는 은은한 향기--라기보다는 화장품 냄새가 풍겼다. --나도 나이가 들었구나. 젊은 여인의 화장품 냄새에 민감해지고 있다는 것은 늙어가는 증거라는 것이 그의 오랜 지론이었다. 그 지론을 처음 갖기 시작했던 때--이십대 때는 그런 냄새 같은 데는 무관심했었고, 관심을 갖는 사람이 못마땅하게까지 느껴졌었다. 그랬던 것이 어느새 스스로가 그 못마땅함에 젖어 들고 있음을 깨닫고 놀란 것이 오년 전이었다. 그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페어 글라스 너머로 덕수궁의 짙은 숲과, 그 언저리의 구획들이 한 눈에 들어 왔다. 박인규 변호사 사무실은 덕수궁 옆 Q재벌 본관 빌딩 이십 층이었다. 그 자신이 Q재벌의 고문 변호사였기 때문에, 빌딩을 신축한 Q재벌 회장의 특별 회장의 특별 배려로 입주를 한 것이다. 처음엔 너무 고급스러워 사양했지만, 지나고 보니 새삼 아주 잘 옮겨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창밖으로 던지는 시선을 받아 주는 덕수궁의 숲이 마음에 들었다. "부르셨읍니까?" 미스터 조였다. 헨리 조라고도 했다. 캘리포니아 바 멤버인 미스터 조는 박변호사 사무실과 제휴관계에 있는 미국의 잭 앤더슨 법률사무소 소속이었다. 한미간의 기업교류에 대비해서 연수차 서울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한국인이지만 국적은 미국이었다. 한국식 이름은 조현범이라고 했다. 고아 입양 케이스로 미국에 건너가서 그곳에서 이십년 동안 용하게도 한국어를 하나도 까먹지 않고--아니 열심히 배워서 서울 생활이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오랜만이군, 거기 앉지...... 헌데 요 며칠 좀 바빠진 것 같군." "미안합니다. 실은 아파트를 하나 구해 보려구 쫓아다니는 중입니다. 워낙 호텔 생활은 비싸서요......." 그랬을 것이다. 적어도 일년은 연수가 계속될 것으로 치면, 호텔 생활은 편리할지는 몰라도 엄청 비싸게 치인다. 그래서 박인규 변호사 자신도 그에게 적당한 전세살이를 권해왔던 것이다. "그래, 적당한 곳을 찾았나?" "네. 제 친구, 언젠가 저녁식사를 함께 했던 장동렬이를 기억하시죠? 그 친구 삼촌 소유의 아파트가 비어 있다고 해서......." "그것 잘 되었군! 헌데 어쩔 셈인가?" "근간 그 삼촌이란 사람과 만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 뒤라야 결정을......." "그게 아니구. 내 부탁 하나 들어줄 생각 없나?" "가능하다면...... 어떤 일입니까?" "음!" 박인규 변호사는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조현범--이 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도 그랬지만, 그에겐 어쩔 수 없는 벽을 느꼈다. 유창한 한국어를 쓰곤 있지만, 역시 그는 분명한 미국인이라는 사실. 지금도 그걸 느낀 것이다. --식객처럼 붙어 있는 입장에서도 일의 내용에 따라서는 부탁을 거절할 수도 있다는 확실한 태도가 과연 미국인다웠다. 더욱 그것이 조금은 서운하게 느껴지는 자신은 분명히 인정 많은 한국인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일의 내용은 기업 조사야! 흥미없나?" "기업조사라면, 우선 오케입니다. 이제 저도 한사람 몫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인정하신 거군요!" "아니! 분명히 말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부탁이야! 이 법률사무소와는 무관한...... 그리고 변호사가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그런 일이야!" "어떤 내용입니까?" 미스터 조는 조금은 실망한 표정으로 앉음새를 고쳤다. 박인규 변호사는 북두산업 김칠성 사장 케이스를 되도록이면 자세하게, 그러나 자신의 견해는 조금도 섞지 않고 냉정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북두산업은 사장도 모르는 사이에, 부도가 났다는 얘깁니까?" "말하자면...... 요는 자네가 조사해야 할 일은, 첫째 부도가 난 수표의 정체가 무엇인가, 둘째 김칠성 사장을 호텔 앞에서 납치해서 손쓸 시간을 빼앗아버린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알아내는 거야." "두 가지뿐이군요!" "왜, 너무 간단해서 싫은가?" 두 가지뿐이라는 미스터 조의 말에 박변호사는 맹랑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선생님 하고, 김사장은 어떤 사이십니까?" "동창생, 고등학교와 대학의 동창생--." "어떻습니까? 김사장의 말은 믿을 만합니까? 평소 때의 행동으로 미루어 봐서......." 박변호사는 다시 한번 음! 하고 치솟는 신음을 속으로 삼켰다. 미스터 조는 이미 자기가 부탁한 일에 착수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난 김사장을 항상 믿지는 않네. 하지만, 이번 일만은 그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고 믿고 있네. 그래서 조사해 보겠다는 생각이 든 거야!" "어떤 때는 김사장이 미덥지 않습니까? 또 이번 일만은 전폭적으로 믿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칠 때는 허풍일 가능성이 오십 프로야. 가령, 한강을 수영으로 왕복할 수 있다든가 할 땐 믿을 수가 없지. 하지만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겠다고 허우적거리는 건 절대로 믿어야 할 일이야. 그게 내 지론이야. 김사장이, 새로 사업을 확장한다고 큰소리를 쳤다면 난 믿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연약한 소리로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믿는 거야. 또 한가지, 그가 한 말을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도 내가 믿는 이유 중의 하나야. 말하자면, 거짓말이라면 좀 더 조리 있게 논리적으로 꾸며댔을 것이 아닌가!" "선생님은 센티멘탈리스트군요! 좋습니다. 언제까지 레포트하면 되죠?" "되도록 빨리! 그리고 자네한테 대한 보수는 하루 이십 달러씩. 실비는 따로 지급하지!" 박변호사는 우선 써야 할 경비라면서 미스터 조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땡큐!" 그는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면서 물러갔다. --잘 해 주겠지! 박인규 변호사는 덕수궁 쪽으로 눈길을 쏟았다. 퇴색한 고궁의 처마 끝에 아침 햇살이 반짝였다. 그 햇살은, 언젠가 이 방을 찾아온 친구가, 덕수궁을 바라보면서 내뱉었던 말을 되살려 주었다. --생활 속에선 범죄가 남고, 퇴색한 유적 속에는 역사가 남는다더니...... 변호사 사무실에서 고궁을 내려다보는 것도 정말 괜찮군! 누구였던가, 그런 멋진 말을 했던 친구는. 박변호사는 오늘 저녁엔 그 친구와 한잔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누구였는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박변호사 방에서 물러 나온 미스터 조, 조현범은 부산하게 서둘기 시작했다. 북두산업의 거래은행 지점장과 또, 이곳 박변호사 사무실과 접촉이 잦은 세무사와의 면담 약속을 한 다음, 그는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커피ㅅ에서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그는 턱을 쓱 문지르다가 갑자기 박변호사가, 왜 이 일을 자기에게 맡겼는지가 의심스러워졌다. 일을 맡겨 준다는 자체에 감격한 나머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의문이 뒤늦게 뒤통수를 쳐 온 것이다. 기업조사를 할 만큼, 아직은 서울 생활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서울에 와서 겨우 한달--미국 국적의 자기가 어떻게 한국의 로업 내부 사정을 조사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일까, 박인규 변호사는. 조사 업무라면, 적어도 이곳 저곳에 비온 뒤 들판에 돋아나는 기 버섯처럼 수많은 소스가 필요한 것이다. 한국말로 뭐라든가...... 그렇지. 마당발이라고 할 만큼 발새가 넓어야 한다는 것쯤은 극히 상식적인 일이 아닌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변호사 사무실 사람들밖에 없는 것쯤은 박변호사도 알고 있는 일이다. --결국, 박변호사는 이 사건의 조사 결과에 대해 큰 기대를 갖고 있지 않다. 친구의 말을 믿긴 하지만, 그것을 제 삼자에게까지 믿겨지게 하는 것에 대해선 별다른 기대를 걸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다. 또 한가지, 이 일을 통해 자신의 능력이나 성실도를 한번쯤 테스트해 보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조현범은 그렇게밖에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그에게 투지를 일으키게 했다. 큰 기대하지 않는 사람에게 깜짝 놀랄 결과를 한번 레포트해보자는 개구쟁이 같은 생각이 그의 투지에 불길을 당겨 주었는지 몰랐다. 그는 장동렬의 도움을 받기로 마음 먹었다. 신문사 경제부 기자인 장동렬은 서울에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동렬이 무슨 언론 재단 프로그램으로 미국연수 왔을 때, 우연히도 조현범과 같은 세미나를 일년 동안 청강하게 되어 사귀게 된 것이다. --서울에 오게 되면 은혜를 꼭 갚을게! 몇 번이고 동렬이가 다짐할 만큼 그들은 가까워지다. 실제로 현범의 이번 한국체재에 있어서 도착하던 날 공항에서부터 그는 열심이었다. "나의 웅녀(熊女)야!" 하면서 소개해 준 같은 신문사 주간부 기자인 약혼녀 강연숙과 함께 서울에서의 보호자를 자청하고 나섰다. 현범은 장동렬에게로 다이얼을 돌렸다. "일당 이십 불에, 경비는 따로 지급? 그것 괜찮은 일인데. 어때 저녁이나 사지 그래! 우리 웅녀도 함께 나갈게!" "오 케이!" 현범은 전화를 끊었다. 아마도 저녁 식사 때까지 동렬인 적어도 어느 정도의 기본 정보를 갖고 나올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전화를 끊은 다음 시계를 보았다. 북두산업 거래은행 지점장과의 약속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은행은 이 호텔에 이어져 있는 쇼핑센터 안에 있었다. 걸어서 3 분 거리. 그는 남은 커피를 맛있게 마신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글쎄요. 김칠성 사장으로선 절대절명의 궁지에 빠졌던 모양입니다. 처음엔 수표가 가짜라고 펄펄 뛰더니만 잠적을 해버렸으니까요....... 아까운 케이스죠. 북두는 그렇게 도산할 기업이 아니었는데......." 지점장은 극히 사무적으로 말했다. "수표는 분명히 북두의 김사장이 발행한 것이었나요?" "위조 수표를 분간 못할 만큼, 어리석진 않습니다, 우리 은행은!" "미안합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한가지, 그 수표를 교환에 돌린 쪽은 누굽니까?" "그건......." 지점장은 메모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건 태양상사로군요. 종합상사인 태양인데요." "태양상사와 북두는 어떤 관계입니까? 어떤 거래가 있었나요?" "알 수 없죠, 거기까진. 한가지, 연수표나 약속어음은 직접거래가 없었더라도 돌고 도는 게 대부분 아닙니까? 와리깡이라구, 할인을 하기도 하고......." "그렇겠군요. 그럼 태양상사가 직접 북두로부터 수표를 받지 않았다면, 이서(裏書)가 있겠군요." "네. 풍년봉제사라구...... 아마도 북두의 하청 봉제사 같습니다만......." 지점장은 보던 메모를 책상 위로 밀쳐 버렸다. 아는 것은 모두 다 말했으니까, 그만 물러가 줬음 하는 눈치였다. 거래하던 기업이 부도를 내고 줄행랑을 치는 바람에, 거액의 대출금까지 떼여, 근무 성적이 엉망이 되어 버린 그의 얼굴엔 그 일을 새삼 꼬치꼬치 캐묻는 상대방이 밉살스럽다는 표정도 함께 번져 있었다. 현범은 은행을 나와 세무사 사무실로 발길을 옮겼다. "아무리, 국내사정이 어둡다 하더라도 태양상사를 모르시다니......." 세무사는 현범의 질문이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세무사는 현범이 미국 유학에서 갓 돌아온 것쯤으로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미안합니다. 태양상사가 그렇게 유명합니까?" "유명 정도가 아니죠. 작년도 매출액 기준으로는 종합상사 랭킹 1 위, 수익 기준으로는 7 위가 아닙니까?" "매출 1 위, 수익 7 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현범은 세무사의 말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매출액이 1 위라면, 적어도 수익률도 거기에 버금가는 것이라야 마땅한데 7 위로 뚝 떨어진다는 게 이해가 안갔다. "그게 바로 한국의 특징이죠. 수출입국에 맞추기 위해선 이익보다 외형(外形)중심으로 해야 하니까요. 손해 보는 수출도 수두룩하죠." "그럼, 풍년봉제사는 어떤 회사입니까?" "그건 알 수 없는데요. 조선생 눈에는 태양상사나 풍년봉제사나 다 같이 생소한 기업이겠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하늘과 땅이죠. 풍년봉제사 같은 봉제공장은 밤하늘의 별만큼, 바닷가의 모래알만큼 흔하디 흔하죠. 그런데 이런 건 왜 조사를 해야 합니까?" "네. 좀 투자를 해 볼까 해서요!" 현범은 싱긋 웃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북두는 도산, 김칠성은 자살이라, 북두칠성이 없어진 밤하늘이 한껏 쓸쓸해지겠군." 커피잔을 치우던 주옥이는 손길을 멈추고 소리난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경리부장이 보던 신문을 접어 테이블 위에 밀치고 있었다. "뭐라고 그러셨어요? 부장님." "아니...... 혼잣소리야. 자 서둘러 일하자구. 난 이사님 방에 잠시 다녀올테니까......." 경리부장은 담배 불을 부벼끄면서 일어섰다. 태양상사 경리부. 삼십여 명의 부원 중에 여자가 넷. 오늘은 박주옥이가 커피당번이었다. 지난 사흘 동안, 그러니까 북두산업이 느닷없이 부도를 내고 도산, 김칠성 사장이 증발해 버린 이후, 그녀는 하루하루를 남의 날같이 보냈다. 불쑥 "나야!" 하고 김사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올 것 같아 자리도 비우지 않고 지켰었다. 주옥이는 커피잔을 서둘러, 탕비실(湯沸室)에 쏟아 넣고 신문을 펼쳤다. <自殺로 淸算한 방만경영> 이런 제목이 꽤 큼직하게 나 있었다. 그녀는 빨려들 듯이, 기사를 쫓아 눈길을 쏟았다. <지난 2일 부도를 낸 북두산업 사장 김칠성(47세)씨는 4일 새벽, 동해안 강원도와 경북의 접도지역 해안에서 투신자살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조사에 의하면 김칠성씨는 3일 자정쯤 부인(黃仁姬)에게 "잘 있어라"고 자살을 암시하는 전화를 건 다음, 투숙하고 있던 강릉의 H호텔을 나와, 자신의 승용차로 현지까지 가서 투신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건은 현장을 지나가던 트럭에 의해 신고되었으며, 현지 경찰은 현장에 버려진 승용차 소유주를 추적하여.......> --거짓말이다! 주옥이는 읽던 신문을 팽개쳤다가 다시 주워 들었다. 기사를 더 읽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읽고, 읽었지만 김칠성의 자살은 사실이었다. 무엇보다도 기사와 함께 실린 사진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김사장 부인, 황여사가, 현장에서 유해를 끌어안고 비통해하는 사진이었다. --거짓말이다! 그녀는 다시 속으로 부르짖었다. 누가 무라고 해도, 김칠성 사장은 자살 같은 것을 할, 그런 시시한 사람이 아니란 걸 주옥이는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북두산업이 부도를 낸 것 자체가 그녀에겐 석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건, 지난 토요일 김칠성 사장과 즐겼던 기억이 웅변 이상으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김사장은 주옥이가 부탁했던 오백 만 원을 수표로 줬지 않았는가. 이튿날이면 부도가 날 것을 뻔히 알고, 여자에게 연수표를 끊을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것도 하룻밤, 지나가다가 잠자리를 같이한 사이라면 몰라도....... 주옥이는 김사장과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설명하기는 싫었다. 지난 사흘 동안에, 그녀는 자신이 김칠성 사장을 몹시 사랑했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와 알고 지내게 된 기간이 그녀에겐 적어도 푸근하고 안은 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어느 쪽이냐 하면, 원래 그녀는 중년 취향이 강했다. 파더 콤플렉스. 주옥이는 아버지 없이 자랐다. 그녀가 여고 삼년 때, 어머니의 재혼으로 일단 '부모'가 갖춰지긴 했었지만, 의부는 아버지의 이미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또 새 남편과 딸 사이에 끼어 눈치를 살펴야 하는 어머니의 엉거주춤함이 못마땅해서 졸업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버린 것이다. --나도 E대학생이 되고 싶어요. 가 이유였지만, 처음부터 합격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 주옥이가 상경해서 찾은 곳은 경리학원. 거기를 졸업해서 취직한 곳이 태양상사였다. 그렇게 독립해 버린 딸을 오히려 홀가분하게 생각한 탓일까, 시골집에선 최근 조그만 연탄 아파트를 사줌으로써 관계에 결론을 내렸다. 그게 주옥이에게도 훨씬 마음 편한 일이 되었다. 그녀에겐, 김칠성이가 세 번째 남자였고 지나놓고 보니, 그녀의 남자는 모두 중년이었다. --나에겐 파더 콤플렉스가 있나봐. 그렇더라도, 그게 결코 나쁜 건 아니라고 주옥은 다짐했다. 실제로 그녀는 중년의 가슴 속에 묻혀 응석을 부릴 때 가장 즐거움을 느꼈다. 그 응석에 손발을 척척 맞추어 받아 준 이가 김칠성이었다. 집을 마련하는데 한 오백만원 모자란다고 했을 때, 선뜻 수표를 건네주면서, 이사 걱정까지 해 주었었다. "주옥이가 이살 한담, 뭘 선물해야 좋을까?" "뭘 하실 생각이에요?" "글쎄, 비누나 성냥, 초 같은 건 시시하구......." "그래요. 요즘은 성냥 대신에 라이터, 초 대신 샹들리에, 비누 대신 세탁기를 한대요!" "흠, 세상 많이 변했군. 연탄 아파트엔 샹들리에 보단, 세탁기가 제격이겠군. 그래, 세탁기로 하지. 전자동으로......." 그렇게 말한 게, 지난 토요일의 김칠성이었다. 그가 사흘 뒤에 자살해 버리다니....... '자살 실천 오개년 계획'같은 걸 세워두고 있을 사람이야 설마 없겠지만, 너무도 엉뚱하고 돌발적이라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어쩜 여기엔 숨겨진 내막이 있을지도 몰라. 주옥이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전화를 돌렸다. 김칠성의 비서, 문희경은 자리에 있었다. "어머! 언니......." 문희경도 김칠성의 자살에 큰 충격을 받았을까,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보다 주옥이가 놀란 것은 "언니......"라는 말이었다. 희경이가 김사장과 자신과의 관계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주옥이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이답지 않게 모른 척 하면서 전화 심부름을 해주는 것이 때로는 대견했고, 때로는 무안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언니!"라고 하면서 그 모른 척의 베일을 후딱 벗어버린 걸 보면 희경이도 김사장의 죽음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음에 분명했다. 주옥이는 희경이의 그런 마음을 솔직히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언니!"라고 불러 주는 동생이 갑자기 생겼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는 것이니까. "그래, 그쪽은 어때?" "어떻긴. 벌집 쑤셔놓은 것 같아. 근데 언니! 태양상사가 우리 회사 인수한다는 것 사실이에요?" "태양에서 북두산업을?" "응. 그렇다고들 하면서 야단들이야! 정말이야 언니?" "낸들...... 이제 처음 듣는 소린데. 근데, 김사장님 장례는 언제야?" 주옥이는 아무래도 믿겨지지 않는 죽음이지만 김사장의 마지막 길을 숨어서라도 전송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영전에 향이라도 살으면서 합장하고 싶었지만 그게 어렵다면 조용히 전송하고 싶었다. 장례는 내일 오전, 강릉의 병원에서 치루어진다는 걸 들은 주옥이는 결근계를 쓰기 시작했다. (2) 태양상사가 도산한 북두산업을 인수하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주옥이가 장례로 강릉을 다녀온 사이 소문은 태양상사 안에 좍 퍼져 있었다. 결근한 하루 사이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리고 태양상사의 인수결정을, 적어도 태양의 사원들은 자연스런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북두의 부도로 입은 태양상사의 손해는 거의 일억. 태양이 받아 둔 어음 수표 가운데는 아직도 북두산업 발행분이 상당액수가 결제일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결국 태양상사는 북두의 거래은행을 제외하면 최대 채권자가 되는 셈이며, 또 은행쪽으로서는 북두 규모의 중소무역회사를 인수, 경영할 생각은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은행은 확실한 담보를 잡아놓고 있었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이를 공매처분하면 원본 회수는 걱정이 없다는 것이 강점이었다. 손털고 만세 불러야 할 쪽은 결국 일반 채권자들, 특히 최근 김칠성이 상당 규모의 사채를 동원했었기 때문에 북두에 자금을 댄 사채업자들이 벙어리 냉가슴을 앓아야 할 입장에 놓인 것이다. 이들 사채업자들이 비록 사장은 자살했지만 조금만 정신을 차리도록 도우면 북두는 제기할 것이라고 태양을 부추겨 인수토록 했다는 얘기가 그럴듯하게 돌아다니기까지 했다. 사채업자들의 부추김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실제로 태양의 경영자측은 북두산업에 대해 상당한 매력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가장 매력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북두산업이 개발한 <소리와 향기가 나는 봉제인형>의 의장특허권과 일본 F전자의 사무기기 대리점권이었다. 일년 전에 북두의 김칠성 사장이 의장특허를 따낸 <소리와 향기가 나는 봉제인형>은 봉제인형에 대한 해외수요를 만회한 회심의 걸작이었다. 중공의 등장으로 가격경쟁력을 잃어가는 봉제. 섬유류의 히든 카드라고까지 김칠성 사장이 자랑할 정도의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디어는 별 게 아니었다. 봉제인형에 발성기구 --오르겐과, 고체방향제를 내장한 것이 전부였다. 강아지는 개소리, 팬더는 곰소리 등을 사전에 녹음하여 내장한 다음, 꼬리 뒤에 숨겨 둔 태엽을 감아 발성시키는 것이었다. 태엽을 감는 수동식과, 배터리를 내장한 자동식의 두가지 종류였다. 어느 쪽이든 발성기구가 움직일 때, 밀봉된 고체 방향제 뚜껑이 열리도록 연동장치가 되어 있기 때문에, 소리와 함께 은은한 향기가 풍겨 나오는 것이 자랑이었다. 봉제 인형의 인기는 특히 일본에서 급격히 높아갔다. 그러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선 무리한 사전투자가 필요하다. 발성기구를 비롯한 각종 금형(金型)류의 제작에 필요한 자금이 예상을 훨씬 웃돌아 버린 것이다. 거기다가, 북두의 가장 큰 자금 소스가 되었던 오퍼업(業) --일본 F전자사와의 사무기기 오퍼가 장기간 올스톱 되어 버린 것이다. 주로 금융기관을 상대로 한 특수 사무기기였기 때문에, 남모르는 재미를 보아 왔던 것이 오퍼업이었다. 표면상의 오퍼 수수료는 L/C가액의 팔 퍼센트 전후이지만, 적어도 십퍼센트 이상의 블랙마진이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오퍼 업이 각 금융기간의 온라인화 계획으로 수요가 제로에 가깝도록 떨어져 버린 것이다. 온라인을 위한 메인컴퓨터와 시스템-- 소위 소프트웨어가 미결된 상태에서 단말기(端末機)도입이 중단되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것이 북두사업 김칠성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수출판에 예상 밖의 신규투자와 수입 파트 수입의 격감은 결국 사채 쪽으로 손을 돌리게 되어 무리하게 자금을 컨트롤하게 되었고 끝내 도산--자살로 막을 내리게 한 것이다. "진작, 우리와 손을 잡았더라면......." 태양의 중견 간부들은 어느 정도 "그것 보란 듯"이 뒷공론을 즐겼다. 봉제인형 의장특허권 공동사용을 북두에 제의했다가 거절당한데 대한 "분풀이"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북두산업은 마지막 고비를 못 넘기고 쓰러졌다는 거예요?" 주옥이는 모처럼의 만족한 저녁식시가 끝나 버린 데 조금은 아쉬움을 느끼면서 윤경식에게 말을 건넸다. 일류 호텔 이십 층의 스카이 레스토랑. 저녁식사 시간으로서는 조금 이른 탓일까, 별로 붐비지 않았다. 은은한 백 뮤직이 한층 더 아늑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퇴근 무렵 윤경식이, "상의할 일이 있으니까, 저녁이라도......." 하고 말을 건넸을 때만 해도 주옥이는 조금 망설였던 게 사실이었다. 우선, 강릉에서 밤차로 돌아왔기 때문에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망설이는 주옥이를 보고, 윤이 북두산업 관계라고 덧붙이는 바람에 따라 나선 것이다. 두 사람이 자리를 한 게, 이 호텔의 스카이 레스토랑. 이름도 잘 모르는 프랑스 요리를 윤경식은 주섬주섬 주문했다. 그리고 포도주도....... 윤이 테이블 메너나, 주문의 방식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내가 라면시킬 때보다 더 자연스럽잖아? 주옥이는 엉뚱한 감격을 느끼면서 그런 윤경식을 새삼 찬찬히 훑어보았다. 윤경식(尹敬植) 사십 이쪽 저쪽으로 짐작되었다. 그의 별명은 "호메이니" 또는 "벽화"로 통했지만, 정식으로 부르자면 "호메이니의 벽화"였다. 그런 별명이 붙게 된 것은 그가 부장에서 하루아침에 과장으로 강등되고 나서부터였다. 그는 한때 태양의 기획실장이었다. 기획실장이라면, 같은 부장급이지만, 차기 이사의 제일후보였다. 그만큼 그는 사내의 촉망을 한 몸에 받은 에이스급이었다. 그런 그가 가장 정열적으로 추진했던 것이 이란 프로젝트였다. 일본을 비롯한 각국이 이란에 석유화학 플랜트에 관심을 보일 때, 윤이 찾아낸 것은 이란의 카페트였다. 현지에 대규모 플랜트를 건설, 중동과 동남아시아의 값싼 인력을 투입하여 페르시아 카페트를 양산(量産)하여 태양이 창구가 되어 구미(歐美)에 수출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상당한 규모의 사전투자가 이루어진 뒤에 터진 것이 이란혁명. 고집스런 "호메이니"의 등장은 태양의 이란 프로젝트를 공중에 날려 버렸고, 그와 동시에 윤의 출세도 끝장이 나버린 것이다. 출세가 끝장난 정도가 아니라, 과장으로 강등되어, 총무부에 배치가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총무과장은 아니었다. 단지 총무부에 배치되었을 뿐, "사표 내라는 게여! 그건"하는 뒷소리가 상당히 설득력을 갖게 되었어도 그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꿈이여, 다시 한번은 아니겠지만, 그는 총무부 한쪽 구석에 벽화처럼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해서 붙여진 별명이 호메이니 때문에 생긴 벽화--호메이니 벽화가 된 것이다. 벽화처럼 앉아 담배만 피우고 있는 것같이 보였지만 윤은 제 나름대로 열심이었다. 책상에는 항상 무역관계, 해외시장 관계 등의 원서들이 쌓여 있었고, 그는 부지런히 그것을 읽으며 데이터를 정리했다. "박사 논문이라도 쓰실 참이세요?" 한번은 주옥이가 커피를 갖다 주면서 말을 건넸었다. 물론 오래전에. "응? 그래, 호메이니 연구라도 시작할까?" 하고 그는 빙긋이 웃어 보였다. --속을 보여 주지 않는 무서운 사람. 이것이 주옥이가 갖고 있는 그에 대한 지식의 전부였다. 그런데 이렇게 마주 대해 식사를 함께 하면서 느낀 것은 전연 다른 면의 윤경식이었다. "......뭐라고 물었지?" 윤은 포도주 잔을 들면서 주옥이에게 되물었다. "북두가 도산한 것은, 넘길 수 있었던 마지막 고비를 못 넘긴 탓이냐구요!" 주옥이는 약간 짜증기를 섞어 다시 말했다. 남의 말을, 더군다나 숙녀의 얘기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미안! 잠시 딴 생각을 해서......결국 북두의 도산은 그렇게 된 셈이지......." "그건, 안 내도 좋았을 부도가 났다는 뜻인가요?" "꽤나 당돌하군! 미스 박은...... 제삼자가 보기엔 그럴 수도 있었다는 얘기야. 단지, 김칠성 사장으로서는 다른 속사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이었겠지....... 두고 보라구. 내가, 이 윤경식이가 북두산업을 휼륭하게 재생시켜 보일 테니까!" 윤은 자신 만만한 미소를 포도주로 발그랗게 물들은 주옥이의 눈언저리 쪽으로 흘렸다. --설마, 호메이니의 벽화가! 주제파악 잘못한 것 아냐? 주옥이는 윤의 자신에 넘친 미소를 한껏 비아냥거려 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어쩌면 이 사람이라면 해낼지도 모른다고는 생각도 들었다. "왜? 안 믿겨?" "아니, 그건 아니지만......." "태양상사의 벽화가, 주제넘게 북두를 생각한다는 건가?" 윤은 여전히 미소를 띄우곤 있었지만, 말씨는 얼마간 날카로워졌다. "다만, 과장님은 태양상사 소속이시니깐, 북두완 관계가 없잖냐는 생각을 했을 뿐예요." "내일부턴 달라. 북두로 옮기기로 했으니까." "과장님이 북두로요?" "응! 오늘 미스 박을 이렇게 불러낸 건, 날 좀 도와 달라는 뜻이야. 나랑 함께 북두에 가지 않겠어?" --벽화를 따라 다녀? 난 그럼 벽이 되는 셈인까? 주옥이는 갑자기 웃고 싶어졌다. "이건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이지만......."하고 윤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곤 포도주를 조용히 마신 다음 담배에 불을 붙였다. "태양이 북두를 인수한다는 건, 표면적인 것뿐야. 태양은 부도난 금액만 회수하면 그뿐이란 생각인 것 같아." "그렇담......." "얘길 들어! 그리곤 곧 잊어 버려! 생각 해봐! 규모의 차인 있어도, 태양이나 북두나 같은 무역상사야! 상사가 상사를 흡수합병하는 케이스는 있어도, 자회사로 인수하는 케이슨 생각할 수 없어. 더군다나 부도내고 도산해 버린 상사를......." "하지만, 북두는 저력이 있다고 여태 말씀 하셨잖아요?" "그것과는 별개야. 저력이 있더라도, 도산은 도산이야. 특히 상사는 문을 닫으면 남는 거라곤 종업원밖에 더 있겠어? 결국 태양의 힘으로도 북두가 갖고 있는 저력을 현금화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지!" 주옥이는 윤의 본심을 알 수 없었다. 북두는 억울하게 도산했다고, 장황하게 설명한 후에, 이젠 딴 소리를 하는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고, 또 정말 북두는 빈 껍질만 남은 것인지, 아니면 괜찮을 정도의 힘이 있는 건지도 아리송해져 버렸다. "어려우네요. 과장님 말씀은......." "간단해. 어려울 것 하나도 없지. 요는 태양이 북두를 당분간 죽이진 않을 거라는 거야. 그동안, 이 윤경식이가 북두를 소생시켜 보이겠다는 거야." "어떻게요?" "궁금하지? 말로는 설명할 수 없어. 어떻게 하면 된다는 공식 같은 것도 없구 그렇지만 할 수 있어! 미스 박은 곁에서 지켜보기만 하면 돼!" 윤경식의 말은 단호했다. "제가 왜 지켜봐야만 되나요?" "싫담, 지켜보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경리부에서 일해 줘야겠어." "왜요?" "경리의 흐름을 감시해야 되니까!" "제가요? 경리 감시를?" "놀랄 것 없어! 다만 지켜보면서, 그 흐름을 나한테 알려 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것도 당분간만......." "당분간이라면, 언제까지예요?" "꽤나 따지는군. 그게 내가 미스 박을 미덥다고 생각하는 장점이긴 하지만...... 좋아! 내가 북두의 사장이 될 때까지야!" 하마터면 주옥이는 들고 있던 포도주 잔을 떨어뜨릴 만큼 놀랐다. 사장이 될 때까지라니!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시집도 안가고 경리부 한쪽 구석에서 썩으라는 건감? 하고 주옥이는 정색을 했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의 호화스런 프랑스 요리에는 살이 끼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북두산업 재건위원획 구성된 것은 바로 그 이튿날이었다. 말은 재건위원회지, 실제는 태양상사가 중심이 되어서--라기보다는 단독 접수하는 것이었다. 재건위원장은 태양의 경리담당 이사인 이영길(李英吉)이었고, 부위원장엔 북두산업 경리부장의 이름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태양상사의 사원들, 특히 박주옥이를 놀라게 한 것은 "호메이니 벽화" 윤경식이가, 재건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나란히 이름을 적힌 사실이었다. 그리고 오후에는 태양에서 북두로 옮길 사원의 명단과, 북두사원 중에 태양으로 옮겨올 사람들이 발표되었다. 주옥이는 윤경식이가 부탁했던 대로 북두로 옮겨질 사원명단 속에 자신의 이름도 끼어있음을 알았다. 북두로 옮긴 주옥이에게 주어진 첫 번째 일은 부도를 낸 수표와 어음의 정리 관리였다. 재건관리위원회가 인수한 첫 한 주일간은 참으로 뒤숭숭했다. 첫째 북두에서 잔뼈가 굵은 핵심 사원들의 반발이었다. 재건위원회라고 하지만 법적근거가 무엇이냐고 대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사장이 비명에 간 지금, 사원들 손으로 회사를 재건하겠다고 맞선 것이다. 명색이 주식회사인 북두산업의 경우, 주주총회 결의없이, 회사 경영권을 양도, 또는 양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하지만, 태양쪽의 준비는 빈틈이 없었다. 그들은 죽은 김칠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주로부터 위임장을 받아 두고 있었다. 북두산업의 주식 분포는 보통의 다른 중소기업과는 달랐다. 대표이사였던 김칠성의 소유주식은 십오퍼센트. 그리고 부인인 황여사 소유가 삼십퍼센트. 부부 합쳐서 사십 오 퍼센트뿐이었다. 나머지는, 북두의 하청공장 다섯 곳에 평균 십프로씩 주식참여를 시켜 놓고 있었다. 그 총수가 전체 주식의 사십 구 퍼센트. 하청공장 관리를 스무스하게 하자는 복안이었다. 나머지 육퍼세트는 김칠성의 친구들이었다. 태양은 이 가운데 하청공장 주인들의 전 주식과 김사장의 미망인 황여사의 위임장을 받아 놓았던 것이다. 결국 혼란스러웠던 일주일은, 주로 핵심 사원의 무마에 소비되고만 셈이며, 그들의 무마가 끝나자, 재건위원회 위원장인 이영길이 사장으로, 부위원장의 한 사람인 북두의 경리부장이 상무가 되었다. 같은 부위원장인 윤경식은 평이사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부도어음과 수표를 정리하던 주옥이는 부도 규모가 얘기를 듣던 것보다 훨씬 큰데 놀랐다. 최종적은 부도 총액은 5억에 이르고 있었다. 부도의 대부분은 어음이었으나, 공교롭게도 태양상사가 이서(裏書)를 해서 유통시켰거나 직접 교환에 돌린 것은 모두 당좌수표였다. 금액도, 어음은 몇 백만 원짜리가 대부분이었지만, 수표는 천만대가 전부였다.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기업이 연불(延拂)수단으로 이용할 때 발행하는 것은 어음이었다. 만에 하나 부도가 났을 때, 수표는 "부정수표단속법"에 의해 형사 문책이 따르지만 어음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북두의 김칠성은 고액은 모두 수표로 발행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계획적으로 그는 수표를 남발하고 도산해 버린 것일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계획 도산으로는 믿겨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계획을 세운 본인이 자살을 했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었다. 주옥이는 수표 가운데 "풍년봉제사"의 이서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태양상사가 교환에 돌린 것이지만 첫 이서를 풍년봉제사가 한 것이 다섯장에 거의 일억 가까운 금액을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봉제사라는 이름이 말하듯이 봉제품 하청공장인 것 같은데 금액이 너무 큰 게 마음에 걸린 것이다. 일억 가까운 봉제 가공임(加工賃)이라면, 그 물량은 얼마나 될까, 얼른 계산이 안 나왔다. 어쩌면, 봉제사 간판을 달아놓고 사채놀이를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옥이는 어쨌든 풍년봉제사는 한번 찾아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미스박 전화." 건너편 자라의 남자 사운이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주옥이는 정리하던 수표를 주섬주섬 서랍 속에 넣은 다음, 전화를 받았다. "미스 박이세요?" 낯선 여인의 목소리. 젊었다. "그래요. 제가 박주옥이에요. 누구세요?" "S신보 주간부의 미스 강이에요. 잠시 만나뵈었으면 하구요." "S신문 주간부?" 주옥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도대체 신문도 안 읽는 주옥이었다. 뉴스는 대체로 TV나, 잡담을 통해 듣는 쪽, 그러니까 "주간부"라고 들었을 때, 신문사도 주간부, 야간부로 나누어져 있나 생각할 정도였다. "잠시면 되겠어요. 죽은 김칠성 사장님에 대해서 좀 듣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저 지금 지하 다방에 와 있어요!" 상대방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아마도 김칠성 사장 일이라면, 주옥이가 한달음에 달려올 것이라는 것쯤 알고 있다는 투였다. 강이라고 한 여기자는 주옥이보다 한두 살 나이가 더 든 것 같았다. "강연숙이에요." 하며 명함을 내밀고는 느닷없이 찾아온데 대해 사과를 했지만, 그렇게 정중하지는 않았다. 요는 이 쪽이 예의를 갖출 만큼 갖추고 있으니까, 너도 그렇게 해달라는 투로 주옥이의 눈엔 비쳤을 뿐이다. "박주옥씬, 죽은 김칠성 사장님과는 특별한 관계람서요?" 커피를 시킨 다음 강이 당돌하게 물어왔다. "특별한 관계란 무슨 뜻인가요?" "남자와 여자의......." "이상하네요. 강연숙씨의 생각. 남녀관계란 건 특별한 게 아니라 단순한 것이라곤 생각지 않으세요?" "단순한 것?" "네. 남자와 여자의 관곈 특별한 게 오히려 이상하겠죠? 단순할수록 농도가 짙어지는 것 아녜요?" 주옥이는 조금 상기해짐을 느꼈지만 단숨에 말을 마쳤다. --이 알량한 여기자가 어디서 김사장과의 관계를 냄새맡고 찾아 온 걸까? 열심히 헤아려 보았지만,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혹시 김칠성의 비서였던 미스 문이 얘길했을지 모르지만, 이제 와서 굳이 숨기거나 해야할 필요는 없다고 주옥이는 다짐한다. "미안해요. 그런 것 따지자고 찾아온 것 아니었는데....... 기분 상하게 했다면 용서해요." "괜찮아요. 사과할 것까진......." 하면서 주옥이는 눈으로 강에게 용건을 빨리 얘기토록 재촉했다. "박주옥씬, 김칠성 사장의 자살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설마, 제 입으로 김사장 잘 죽었다는 대답이 나오길 기대하는 건 아니겠죠?" "설마......." "거짓말 같아요. 그냥 죽었다면 믿겠지만, 자살이라니......." "그래요. 김사장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대답이더군요. 거짓말 같다, 자살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예요. 한사람 빼놓곤 한결 같더군요." "그 한사람, 누구예요?" "김사장 부인, 황여사!" 강연숙의 짧은 대답을 들으며, 주옥이는 며칠 전 신문에 실렸던 비통에 젖은 황여사의 사진을 상기해 본다. "당연하겠죠. 직접 시체 확인까지 했으니까....... 어쩜 악몽 같았던 며칠이었겠지만......." 주옥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게 아니예요!" 하면서 강연숙이 말을 막았다. "그게 아니구....... 황여사 얘긴, 달라요." "어떻게?" "황여산, 김사장이 "이젠 끝났어. 잘 살아라"고 전활 했으니까 자살한 게 아니냐는 거예요. 이상하지 않아요?" "그 얘긴, 신문에서 저도 읽었어요." "부인의 입장에서 남편의 자살을 얘기하는 말투로는 너무 냉정하다는 생각 안 드세요?" "......." "그리고, 경찰도 좀 어떻게 됐나 봐요!" 열을 올리는 강연숙의 입 언저리를 바라보면서 주옥인 커피만 마셨다. "경찰은 당연히 김칠성 사장의 시체를 해부해 봤어야 했어요.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아니면 타살인지......." "강연숙씬, 김칠성 사장님이 피살이라도 되었다고 생각하나요?" "아뇨." "그럼?" "의문이 남는다는 얘기죠." "시체 해부는 유족이 원하지 않을 수도 있질 않나요?" "그래요. 하지만 "변사"로 봤을 땐, 직권해부가 가능해요. 자살의 선입견이 작동했다면 유족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지만......." 강연숙의 얘기는 결국 김칠성의 자살에는 의문점이 많다는 것이었다. 가장 그녀의 관심을 끈 것은 "자살현장"의 지리적인 위치라고 했다. 강원도와 경북의 접도지역--김칠성이 스스로 운전했던 황여사의 포니는 강원도 쪽에 세워 놓고, 투신은 경북지역에서 했다는 것이, 강연숙의 의심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대체로 그런 경운, 관할 문제로 서로가 애매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결국 강연숙씬, 김칠성 사장님의 자살은 연국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상상하기 따라서는......." "이봐요, 강연숙 씨! 죽은 사람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즐기는 것, 잔인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나요?" 하고 주옥이는 일어섰다. 강연숙은 주옥일 따라 일어서면서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화나게 해서. 하지만, 김사장의 자살사건, 제 나름대로 쫓아보겠어요. 도와주세요." "도와드릴 건, 하나도 없군요. 차라리 경찰에 가서 부탁해 보시죠." "결국엔 경찰에도 가게 되겠죠. 그건 제 의심이 정확했을 때 얘기. 지금은 미스 박을 화나게 할 만큼 황당무계한 공상단계이니까요......." "아시면 됐어요. 황당무계한 공상으로 사람 피곤하게 만들지 말아 주세요." 주옥인 지하다방을 나왔다. 강연숙과 헤어진 주옥인 퇴근할 때까지 줄곧 강의 얘기가 마음에 걸렸다. --정말, 김사장님 자살엔 제삼자가 끼어들 만큼 의심스러운 데가 있는 걸까? 아님 부도를 낼 만큼 어수룩했던 성격이 마지막 가는 길가지 맵짜게 맺질 못하게 한 걸까?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는 "풍년봉제사"를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필요하면 외삼촌의 도움을 청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외삼촌, 백영철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직 경찰이었으니까 뭔가 힘이 되어 줄 것임에 분명했다. 4. 2백킬로와 닷새사이 책상 서랍 명함통에서 명함을 잡히는 대로 집어 든 백영철은 자기 명함이지만, 아무래도 낯선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명함이란 것을 장사 도구로 쓰기 시작한 것도 반년 남짓 되었지만 도대체 쑥스럽기 그지없었다. "F여행사 고문 白英哲"이 가지런하게 두 줄로 인쇄되어 있고, 왼쪽 밑 귀퉁이에는 보다 잔 활자로 주소랑, 전화번호, 텔렉스가 적혀 있었다. 뒤집으면 영어로 같은 것들이 인쇄되어 있었다. 사십구 세. 물론 명함에 나이 같은 것이 적혀 있을 까닭은 없지만, 그는 쑥스럽게 명함을 들여다 볼 적마다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는 것이 버릇이 생겨 버렸다. 일년 전까지만 해도 알아 주는 베테랑 수사관이었지만,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 옷을 벗어야 했다. 그뒤, 한 반년 쉬고 있을 때, 그를 아끼던 "윗분"이 마련해 준 직장이 F여행사 였다. 사장, 회장을 역임한 고문은, 위엄이라도 있겠지만, 어중간한 경력과 나이 때문에 붙여진 고문이란 직함에도 특정한 일감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사람은 쓸모 없이 늙어 가는가. 백영철은 고문이란 자리보다 차라리 깃발들고 단체관광객을 안내하는 일이 훨씬 즐거울지 모른다고까지 생각하면서 반년을 지내오고 있었다. 영어와 일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그는, 그 동안 특별한 외국손님--주로 관광객이었지만--을 안내 하기도 했지만, 회사쪽의 기대는 주로 경찰을 비롯한 당국에 대한 로비였다. 따라서 회사 사무실에 죽치고 앉아 있는 것은 서로 눈치가 보여, 가능한 한 밖으로 돌았다. 어저는 명함 없이 덜렁 나돌아 다니다가 곤란한 처지를 두어 번 겪었기 때문에 오늘은 일찌감치 명함부터 챙긴 것이다. 오늘은 아무래도 옛 동료나 상사를 찾아 봐야겠다고 서둔다. 그전에 박인규 변호사 사무실에 들려야 함은 물론이었다. --일이 없어 한가하다면, 심심풀이나 한 번 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전화를 어제 받았기 때문이다. 박인규 변호사가 현역 검사로 있었을 때, 백영철은 여러 차례 그의 수사 지휘를 받은 인연이 있었다. 때로는 엉터리 같은 수사를 했다고 호통도 받았지만, 어느쪽이냐 하면 따뜻한 검사였다. 어떤 형태로든--중거 불충분으로 기소를 할 수 없는 엉망같은 수사결과가 되었더라도--일을 매듭짓고 나면, 소줏잔을 나누면서 관계 수사관을 위로해 줄 줄 아는 영감님이었다. 서울 지검산하의 검사가 아무리 많아도 그런 영감님을 찾기는 다섯 손가락 안쪽이었다. 그런 박인규 변호사가 일부러 전화를 걸어 "심심풀이 일감"을 주겠다는 건, 부탁이 있다는 것으로 해석 되었다. 좋지 않게 경찰 옷을 벗고, 여행사에서 식객노릇 하는 그를 잊지 않고 찾아 준 것이 고맙기도 했다. 박변호사 사무실에 들른 다음, 옛 동료나 상사를 찾아, 일테면 로비를 해야 했다. 최근 단체 관광객들에 대해 매춘관광이다 뭐다 해서 시끄러워 졌기 때문에 그 방면 얘기도 듣고, 손 쓸 일이 있으면 손도 써 놔야 했기 때문이다. 막 일어서려는 백영철은, 때마침 울리는 전화 소리에 도로 주저앉았다. 전화는 치안본부 현계환(玄季煥)씨로부터였다. 백영철을 이곳 여행사에 취직을 알선해 준 옛날의 직속 상관이었다. "바쁜가? 요즘......." "한가하진 않습니다. 그런데, 웬일이십니까? 전화를 다 주시구." "미안. 어쩐지, 전화도 안 걸어줘서 서운했다는 얘기 같이 들리는군." "그렇지 않습니다. 바쁘실 텐데, 전화를 주시다니...... 좀 놀랐기 때문에, 그만 말이 빗나간 겁니다. 죄송합니다." "허허. 점점 이쪽을 미안하게 만드는 군. 실은 말야, 부탁이 있어서......." "무슨......." "음. 시간이 있음 일본 대사관엘 가서 하야시 참사관을 한 번 만나 줬으면 해서 말야." "하야시 참사관, 일본 대사관입니까?" "음, 저쪽에서 믿을 만한 사람 하나 소개해 달라는 게야. 그래서 백형 얘길 했는데, 괜찮을까? 일에 지장이 없을까?" "무슨 일로 그런 답디까?" "음. 하야시 얘기론, 서울에도 일본처럼 사립탐정이 있었음 좋겠다고 한 걸 보면, 무슨 조사 같은 것인가 봐." "혹시 뒷날, 간첩죄로 묶여 가는, 그런 일이라면, 내키지는 않습니다만......." 백영철의 말에, 현계환씨의 호쾌한 웃음이 수화기 가득 쏟아져 나왔다. "오케이. 그런 건 아닐 게야 하야시란 친구, 나와 파리 생활을 삼년 간 같이 한 사이야. 직함은 참사관이지만, 일본 경찰청 소속이야. 파리 인터폴에 파견 근무를 오래 한 친구야." "알았습니다." "오케이, 저쪽에선 오후 두시쯤이면 좋겠다더군. 부탁해, 언제 저녁이나 같이 하자구." 현계환씨의 전화는 끊겼다. 결국, 현계환씨는 일방적으로 하야시를 만나는 시간까지 정해 놓고 백영철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이건 부탁이 아니구, 명령이군. 백영철은 쓴웃음을 흘리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언제 와 있었을까. 여사무원이 책상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담배 연기와 함께, 무슨 일이냐고 눈길을 보내자. "고문님, 손님이에요." "어떤 손님......." "젊은 아가씨예요." "젊은 아가씨...... 그럼 늙은 아가씨도 있나?" 그는 여사원에게 실없는 농을 던지고, 입구 쪽으로 눈을 돌렸다. 거기엔 박주옥이 생글거리고 서 있었다. "웬일이냐? 네가......." "외삼촌 보고 싶어서요." "너 회사에서 모가지 된 게로구나. 이렇게 아침 일찍 마실 다니는 걸 보면......." "피! 고문님은 이 시간이 아침 일찍이겠지만, 시계는 벌써 열 한시반이 넘었어요." 백영철은 주옥의 말에 끌려 시계를 본다. 열시 삼십 육분. "열시 삼십 육분이 아니구?" "어머, 외삼촌은 시계까지 점잖게 높아지셨어요?" "그럴 리가 없어! 내 시곈 이래 뵈두......." "알아요. 결혼 시계란 것. 그것도 이십오 년 전의......." "시간은 정확해! 늦을 까닭이 없다구!" "알았어요, 실은 은행엘 가는 길에 잠시 들른 거예요." "무슨 일로?" "모처럼 찾아온 조카를 이렇게 문간에 세워 두고 얘길 들으실 참이세요?" "그럼 저기 가서 앉을까?" "그것 보담, 제가 아이스크림 맛있게 만드는 가겔 알고 있는데요......." "그 비싼 아이스크림을? 아서라 얘야!" 결국 두 사람은 근처 다방엘 들어갔다. 주옥이가 상경해서 경리학원에 다닐 때만 해도 외삼촌인 백영철의 집에서 기거했다. 사촌이 있었지만, 결혼해서 분가를 했기 때문에, 외삼촌 내외는 결혼할 때까지 함께 있자고 말렸지만, 주옥이는 직장을 갖자마자 따로 나와 버렸다. 그때만 해도 백영철은 베테랑 수사관으로 하루 하루가 생기에 젖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때문에 주옥이는 좀 버릇없이 까불어 보이기로 한 것이다. "저 회사 옮겼다우." "어디루?" "그것보다. 외삼촌, 이 사람 좀 찾아 주시겠수?" 하고 주옥이는 메모를 백영철에게 건넸다. "풍년봉제사라... 그 이름 한번 웃겨 주는군. 이건 찾아 뭣하게?" "봉제살 찾는 게 아니구, 봉제사 사장 정진대란 사람......." "그러고 보니, 주소까지 적혀 있군, 그럼 네가 이 주소로 가보면 될 게 아니냐?" "가봤어요. 하지만, 그 주소엔 그런 사람도, 그런 봉제사도 없어요!" "주소지에 없다? 그럼 못 찾는 거지. 서울엔 적어도 팔백만 명이나 살고 있으니까......." "그러지 마시구, 외삼촌!" "어딜 가서 찾니?" "외삼촌은 그래도 형사였잖아요!" "네 말이 좀 이상해지는구나. 형사면 형사지, 그래도 형사라니......." "그건......." "머리가 나쁜 형사였다 이거지? 그래서 그만 둔 것 아니냐!" "그만 두신 건, 참으로 애석해요. 외삼촌 같은 형사가 있을 수록 좋은 건데......." "그건 또 왜냐?" "저어, 형사들이 어리숙해야, 범인들도 어리숙하게 일을 저지를 것 아녜요! 형사가 영리하면, 범죄도 따라서 지능적이고, 잔인해져 버리거든요!" "그건, 나에게 대한 칭찬이냐?" "물론이죠!" "묘한 걸로 칭찬을 받는구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처신 잘 한다는 소문이 쫙 퍼지니?" "풍년봉제사 정진댈 찾아주심 되는 거예요.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이......." 얘기를, 겨우 본론으로 되돌려 놓았다고, 박주옥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꼭 찾아야 하니? 이 사람, 너완 어떤 관계냐?" "아무 관계두...... 단지 제가 신세졌던 분하고 관계가 있질 않나 하구요." "신셀 졌다는 사람은 누구냐?" "어떤 회사 사장님이었어요. 얼마 전에 부도 내고 자살했지만......." "부도를 내고 자살? 가만 있자, 귀에 익은 얘기구나...... 그렇지! ㅂ두칠성인가 하는?" "어머, 외삼촌도 아세요? 북두산업, 김칠성 사장님?" "아니!" "그러심?" "그 사람 부도 내고 죽었지만, 젊은 여자아이들한테는 꽤나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구나!" "무슨 뜻이에요?" 주옥이는, 외삼촌인 백영철씨가 자기와 김칠성과의 관계를 혹시 알고 있지나 않나 해서 긴장했다. "북두칠성 얘긴, 네가 두 번째다. 어제 오후엔, 네 또래 여기자가 찾아 와서 여든 살에 이빨 안 난 것 같은 허황된 얘길 늘어놓더니...... 오늘은 모처럼 찾아온 조카딸이 홍두깨를 들이밀고...... 도대체 그 사람, 어떤 사람이냐?" "그것보다, 그 여기잔. 누구예요?" "강연숙이래더라. 연숙인 내 딸아이, 네 언니 이름과 같아서 잊질 않았구나" "그래, 강연숙이가 뭐래요?" "칠성인가 하는 이의 자살 사건에 미심쩍은 게 없느냐구, 신문에 난 걸 보고 전직 베테랑 수사관으로서 뭐 짚이는 게 없느냐고 묻더라." "그래서요?" "자살한 사람, 장례까지 다 치룬 뒤에 다시 뭐가 짚이느냐구 했지." "그것뿐이세요?" "아니. 하긴, 그 아가씨 말을 들어보면 뭔가 있을 것 같기두 하구...... 그래서 아예 추리소설이나 쓰라구 했다. 기자 같은 것 집어 치우구. 근데, 그 사람과 풍년봉제사는 어떤 관계냐?" 주옥인 간단히 요점만 설명했다. 풍년봉제사의 주소는 북두산업발행 수표의 이서(裏書)에 쓰여져 있었지만, 대표가 정진대인 것은, 태양상사 담당 세무서 직원을 통해 겨우 조사를 했다고 덧붙였다. "덕분에 간짜장 두 그릇과 커피값이 들었어요. 그걸 알아 내는데......." "네 얼굴값은 빼고 말이냐?" 두 사람은 유쾌하게 웃었다. "헌데, 아까 회살 옮겼다구 했지? 어디루? 왜 옮겼니?" 웃음을 거둔 백영철이 주옥에게 물었다. 외삼촌은 정말 그래도 형사야 잊어 버린 척하며서도 물어볼 것은 절대로 놓치지 않는 걸 보면--주옥은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면서 대답했다. "실은 옮긴 게 아니구 옮겨졌다우." "옮겨졌다? 무슨 이삿짐처럼?" "이삿집이라뇨? 어엿한 숙녀 조카를 가지구." "그래, 미안하다. 말이 빗나가 버려서...... 어떻게 된 거냐? 차근차근히...... 좀 알자꾸나!" "외삼촌이 서울시 경찰국에서 이곳 여행사고 옮긴 것과 비슷하다면 비슷하구,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구--" "이렇게 된 거냐? 너두?" 백영철은 손바닥을 세워 목언저리를 한번 잘라 보였다. "호호호. 그런 건 남자나 당하는 것 아녜요?" "그럼, 어떻게 된거냐?" 주옥은 정색을 하는 외삼촌을 향해 태양에서 북두로 옮겨진 경위를 자세히 얘기했다. "흠! 그것 묘하구나. 그러니까, 네가 방금 신세졌다던 사장이 경영했던 곳이 바로 북두산업이군! 말하자면, 진주군 편에 서서 패장의 일을 더듬어보자는 거로구나!" "어머, 진주군은 뭐구 패장은 뭐예요?" "음, 진주군은 進駐軍이구, 패장은 敗將이지 뭐!" "어머머, 따지고 보니까 말이 되네요. 외삼촌도 재미있는 문자를 다 쓰시네요!" "이놈 봐라! 이래 뵈두 옛날엔 진서만 썼다! 헌데 조금 얘기가 이상해지는구나!" 백영철은 이마에 주름살을 그리면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어디가 이상하세요?" "음, 첫째 그 호메이니의 벽화라는 작자가 널 데리고 회사를 옮겨갔다는 것, 그리고 태양상사가 그 까짓 돈 몇 푼에 구멍가게 같은 상사를 인수한다는 것......." "어머, 외삼촌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럼, 나 말고,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있었니?" "네. 있었구 말구요." "누구였니?" "호메이니의 벽화--그 사람도, 태양이 북두를 인수한 것으로 생각하면 오해라고...... 단지 떼인 돈만 건지면 된다고 그랬어요! 상사가 문을 닫고 나면, 종업원과 부채만 남는다고 그랬어요!" "인수가 아니라, 떼인 돈만 건진다...... 북두에 그런 여력이 있다면 왜 부도를 냈누?" "그건 죽은 김사장이 경영이 방만했던 데 원인이 있나 봐요. 호메이니 벽화의 얘기로는......!" "그 사람, 이름이 뭐랬지? 벽화인가 호메이닌가 하는 사람 말야!" "윤경식이에요." "그 사람이 손댔다가 실패했다는 이란 프로젝트란 어떤 것이었는지 들어 봤니?" "네, 소문으로는 카페트--페르시아 카페트 공장을 대규모로 벌여보자는 것이었나 봐요!" "페르시아 카페트라......." 백영철은 타다 남은 담배에 다시 불을 붙였다. --씨명(氏名) 스즈키 시게노부(鈴木茂信) 삼십육 세. 한국어 영어 능숙. 최종 숙박지. 강원도 K시의 R호텔. 한국 입국. 4월 18일. 체류기간. 90일....... 4월 18일 입국에 비자 유효기간이 90일간 이라면, 이미 체류 기간은 끝났구나--. 백영철은 생각하며 건너편에 앉은 사나이에게 눈길을 던졌다. 주한 일본 대사관 이층 한쪽 응접실에서 백영철은 하야시 참사관과 마주앉은 것이다. 현계환씨가 말했던 2시 정각에, 백영철이 대사관을 찾았을 때 수부에는 이미 하야시 참사관이 직접 내려와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한 초면 인사를 나누면서 들어선 것이 이 방이었다. 응접실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지만, 화려하기보다는 조금 썰렁한 생각이 드는 그런 분위기였다. 백영철도 들어서면서 그가 오랫동안 경험했던 경찰서장의 부속실을 연상할 정도로 멋이 없는--그러나 극히 실용적인 꾸밈새였다. "비자 기간은 이미 끝났군요. 이 사람......." 백영철은 담배에 불을 붙인 뒤 입을 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싱거운 소리라고 생각되었지만, 상대방이 쉽게 얘기의 실마리를 풀게 하기 위해선 이쪽이 바보스런 질문을 먼저 던져보는 게 가장 효과가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고, 그것은 때때로 크게 빛을 발하기도 했다. "네, 적힌 대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요는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 사람의 체류 기간 연장이라면 법무부 쪽에 부탁하는 것이 빠른 길이 되겠습니다만......." "그렇죠, 그 사람이 여기 더 머물러야 할 필요성이 있다면...... 그러나--" "그러나 무엇입니까?" "이 사람 스즈키 시게노부는 행방불명입니다." "행방불명?" "그렇습니다." "무슨 사고라도? 아니면......." "현지처와 사랑놀음에 빠져서 도끼자루 썩는 걸 모르고 있다면, 그런 다행이 없겠습니다만...... 아마도 1백퍼센트 사고라고 짐작됩니다. 미스터 백--아니 백선생이 행방불명이 된 이 스즈키씨를 찾아 주셨으면 합니다만......" "경찰이 더 빠르겠죠. 그런 일이라면. 또 1백퍼센트 사고라고 믿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백영철의 말에 하야시 참사관은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이것이 그 증거입니다." 거기엔 빨간 표지의 일본 여권--스즈키의 패스포트와 함께 16절 크기의 메모가 겹쳐 있었다. "이 패스포트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우송되어 왔죠. 대사관 앞으로......." 하야시의 대답을 들으며, 백영철은 메모에 눈길을 쫓았다. 첫장은 조금 전에 읽었던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아마도 첫 페이지만, 복사를 해서 보여 주었던 것 같았다. 두 번째 페이지에는 스즈키가 입국한 이후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었다. 행적이라고 해야 그가 투숙했던 호텔 이름과, 체크인, 체크아웃의 날짜뿐이었다. 그 메모는 유월 이십 사일 강원도 K시의 R호텔에 체크인한 뒤의 스즈키의 기록은 없었다. 다만 한국 출입국 관리당국에 조회한 결과 스즈키의 출국 사실이 없다는 (참고)가 붙어 있었을 뿐이다. 사흘 전 현재의 확인이었다. 메모 뒷장에는 정규 규격보다는 훨씬 큰 편지 봉투가 핀으로 꽂혀 있었다. --주한 일본 대사관 귀중이라고 적힌 그 봉투엔 유월 이십일자 포항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었다. 출입국 관리당국의 확인이 3일전이란 건 큰 의미가 없었다. 현실적으로 비자 기한인 7월 18일 이후, 스즈키의 정상적인 출국은 불가능해져 있기 때문에, 7월 18일 현재로 출국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 한국에 비정상적으로 머물고 있다는 얘기이며, 더욱 패스포트 없이 출입국이 될 턱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 스즈키 시게노부는 뭘 하는 사람입니까? 또 방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백영철도 차츰 자신의 옛날 형사시대 때 버릇이 되살아남을 깨달았지만, 이 자리에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의 행방을 쫓아 주시겠습니까?" 하야시 참사관이 백영철에게 되물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해보죠." "어떤 경우라야 해 주실 생각입니까?"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협조할 수 있습니다." "말씀해 보시죠." 하야시 참사관도 허리를 쭉 뻗으며 백영철을 주시했다. 조금 긴장된 표정이었다. 그런 하야시를 건너다보며 백영철은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천천히 한 모금 깊게 연기를 빨아들였다. "첫째 하야시 참사관이 스즈키 시게노부의 행적조사를 한국경찰에 의뢰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밝혀 주실 것......." "둘째 조건은 무엇입니까?" "이 패스포트가 대사관으로 우송되어 온 지 오늘로써 40일이 넘었습니다. 왜 그 즉시 스즈키의 행방을 쫓지 않고 지금에 와서야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그것이 조건입니까?" "또 한가지, 스즈키의 직업과 이번 방한 목적도 함께 설명을 해 주셨으면 니다." "좋습니다. 한가지, 어디까지나 이 일을 은밀하게 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만약, 스즈키가 이곳에서 범법한 사실이 밝혀지면, 그의 생사와 관계없이 언제든지 한국 경찰에 연락 드리겠습니다. 물론 그 순간부터 백선생은 이 일과는 관련이 없어지게 됩니다. 좋습니까?" 하야시의 말에 백영철은 순간, 한 방 맞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 말은 하야시의 얘기를 다 들은 뒤에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저 정도라면 혼쾌하게 맡아도 되겠다고 생각한 백영철은 하야시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스즈키의 생사에 관계 없이라고 한다면...... 하야시 참사관은 이미 그의 생존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습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입니다. 그것보다 스즈키 시게노부는......." 하야시는 수첩을 꺼내 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스즈키 시게노부는 퇴직 경찰관으로 동경에서 흥신소를 경영하고 있다고 했다. 삼십 육 세의 젊은 나이의 퇴직이라면, 경찰이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아 자진해서 그만 두었거나, 아니면 어떤 일로 해서 밀려났거나 두 가지 중의 하나였겠지만, 하야시는 거기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다만, 퇴직해서 흥신소를 경영한다면 경찰직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을 내세우기는 어렵겠다--는 것이 백영철의 짐작이었다. 요는 스즈키가 경찰 재직 중에 어떤 사정으로 등을 밀려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그런 스즈키의 이번 방한은 "휴가차"로 되어 있다는 것. 그는 등산과 야조(野鳥)관찰이 주된 취미--이번 휴가도 한국 야조 관찰과 등산을 즐기려 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스즈키의 직업이나 이번 한국 여행은 대사관이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 못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스즈키의 여권이 이곳으로 우송되어 왔을 때만 해도, 잃어버린 사람이 곧 나타날 것으로 생각했었죠." 하야시는 백영철이 내세웠던 두가지 조건 가운데, 한가지 대답을 강조하듯이 또박또박 이어갔다. 그러나 스즈키의 행방은 동경에서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스즈키 시게노부는 한국여행 중에, 일본의 어느 유력자에게 주기적으로 행선을 보고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게 중간에 끊겨 버렸다. 소식이 끊긴 것과 거의 때를 같이해서(물론 이건 뒤에 알게 된 일이었다.) 그의 패스포트가 주한 일본대사관에 우송되어 왔다. 대사관에선 처음엔 별로 중시하지 않고, 잃어버린 사람이 신고를 해올 때까지 기다리던 중에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최근, 일본의 유력자로부터 "스즈키 시게노부"가 한국에서 실종된 것 같으니 은밀히 알아봐 달라고 대사관에 요청해 왔다는 것이다. "그 유력자란 누구입니까?" 백영철은 하야시의 얘기가 끝남과 동시에 물었다. "미안합니다. 거기까진 밝힐 수 없습니다." "결국 스즈키는 그 유력자의 의뢰로 한국여행을 하다가 실종되었다는 추리가 가능하군요." "그렇죠!" "또 그 유력자가 은밀히 조사를 해 달라고 했다면...... 그 유력자가 스즈키에게 의뢰했던 일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겠군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기업 비밀이란 것 이 있죠. 경쟁 상대에게 알려서는 안 되는......그럴 경우엔 일을 은밀히 하는 것이 상관례(商慣例)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유력자는 기업인입니까?" "노 코멘트 "좋습니다. 일단 맡아보죠!" 백영철은 시계를 보았다. 세시. 지금쯤 현계환씨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백영철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부탁합니다. 이건 우선 경비로 쓰실 돈입니다. 백선생에 대한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해드릴 생각입니다." 악수를 나눈 하야시 참사관이 내민 흰 봉투를 백영철은 말없이 받아 넣었다. --강원도 K시라면 동해안의 작은 국도로 경북의 포항과 이어진다. 아니 포항을 출발해서 강원도로 접어들면, 첫 번째 도시다운 도시가 바로 K시인 셈이다. 스즈키가 마지막으로 투숙한 곳이 K시, 그의 패스포트가 주한 일본대사관으로 발송된 곳이 포항시. 두 도시는 그렇게 스즈키와 맺어지고 있다. 그 거리는 국도로 약 2백킬로....... 스즈키가 R호텔에 투숙한 유월 이십 사일과, 패스포트가 우송된 유월 이십 구일. 결국 닷새라는 시간과 이백 킬로라는 거리를 자신이 추격해야 한다고 백영철은 생각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을 현계환씨에겐 보고한 다음, 그의 지시를 따르기로 한마음엔 변화가 없었다. --그는 치안본부쪽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주옥이로부터 대여섯 번이나 독촉전화를 받고 나서야, 백영철은 풍년봉제사 정진대 소재 조사에 손을 댔다. 스즈키라는 일본인의 행적을 쫓기 전에 우선 주옥이의 부탁부터 매듭지어야겠다는 생각에 후딱 하루쯤 쫓아 다녀 봐 주어야지 하고 엉덩이를 일으켰던 것인데 막상 부딪히고 보니까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주소지에 없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주민등록을 쫓아가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짐작했었다. 아무리 주옥이 말대로 수상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사장인 사람이, 주민등록과 따로따로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전출 신고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난 반년 동안 네번 주소를 옮겼고, 마지막에는 주민등록과 사람이 마침내 헤어지고 말았다. "글쎄요. 강원도 어디서 농장이라도 한다고 하면서 떠났는뎁쇼." 연탄 가게를 겸하고 있는 반장 노인의 말이 결국은 사흘 돌아다녀 얻은 수확이었다. --이건, 정말 수상한 건지 모르겠다! 백영철은 지난 삼십년 가까이 몸에 익혔던 버릇이 꿈틀하는 걸 느끼면서, 치안본부로 발걸음을 돌렸다. 담당과엔 마침 낯익은 얼굴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반겨 주었다. "웬일이세요? 백선배님!" "때로는 친정식구도 보고 싶어지니까." "그건 권장할 만한 현상이군요!" "권장 많이 했다간, 현직들 포키트에 찬바람이 썰렁거릴텐데......." "이거 왜 이러십니까? 함께 밤새며 골목지키던 사이에, 찬바람이 좀 썰렁해지면 뭐 대순가요? 자 갑시다. 제가 주스 한잔 대접해 드릴 테니까!" "고마워. 오늘은 말로만 마신 걸로 해 두자구! 그것보다, 이 사람 소재 좀 찾아 주지 않겠나?" "누군데요?" "정진대라고 하는데......." 백영철은 포키트 수첩 갈피에 끼어 두었던 메모 쪽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 녀석, 또 뭘 저질렀나요?" "그 녀석이라니...... 자네가 아는 사람?" "이거 왜 이러십니까? 금고털이 진대를 선배님이 모르시면 누가 압니까?" "뭐? 금고털이 진대?" "네. 그 녀석 성이 정가란 것 벌써 잊으셨나요?" "그랬구나!" 백영철은 옆에 있는 빈 의자에 풀썩 주저 않았다. --바보같이! 까맣게 잊고 헛수골 하다니...... 금고털이 정진대. 부자가 같은 금고털이로, 몇 번인가 백영철의 손에 신세를 진 터수였다. 섬세한 감각의 손가락과 민감한 귀가 그들 부자의 장사도구의 전부였다. 드라이버 같은 걸 쓰는 것은 무뢰한들이나 할 짓이라고 묘한 긍지를 갖고 있는 금고털이의 천재였다. 그들 부자 손에 걸리면 어떤 금고도 눈 깜짝할 사이에 옷을 벗고마는 것이다. 다이얼을 돌리면서, 손끝의 촉각과 다이얼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로크된 번호를 귀신같이 풀어내는 것이다. "미국연방 은행 금고라도 들여보내 주기만 하면 감쪽같이 열어버립죠." "그렇게 솜씨가 좋담, 어떻게 해서 내 손에 잽혔어?" "그건 얘기가 다릅죠1 제가 금고 여는 게 서툴러 잽힌 게 아니라, 도망다니는 게 어설퍼서 잽힌 것분입죠!" "엉뚱한 데서 뽑내는군!" "엉뚱하다니요? 오입쟁이가 여자 옷벗기는 솜씨보다, 제가 금고 여는 솜씨가 훨씬 예술적입죠!" 그런 정진대였다. "그 녀석이 설마 백선배님 회사에 몹쓸 짓을 한 건 아니겠죠?" "아니야! 그런 게 아니구......." "그럼 안심이군요! 가만 계세요. 제가 전산실에 조횔 의뢰해 보죠!" 젊은 형사는 맥빠진 백영철에게 친절했다. "그럴 것 없어! 주민등록지는 확인했으니까......." "그렇담?" "주민등록과 사람이 따로따로 놀고 있어, 지금은...... 참, 그 녀석 본적지나 알아봐 줄래? 주민등록 쫓느라고 그건 빠뜨렸어!" "그러죠!" 젊은 형사는 한참만에 돌아왔다. 그동안, 아마도 젊은 형사가 시킨 것이겠지만, 백영철은 배달된 주스를 조금씩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녀석, 본적지는 강원도 K시로군요. 여기 주소를 메모해 왔습니다." "고마워!" 일어서는 백을 젊은 형사가 다시 주저앉혔다. "회사 과장님이 좀 들렸다 가시래요. 한 십분이면, 틈이 난다구요!" "과장님이 어떻게 내가 온 줄 아셨지?" "그분도 경찰관이니까요. 구내 움직임도 모르면서 외사까지 살핍니까?" "또 수신제가, 치국평천한가?" "백선배님 그만 두신 뒤엔, 진서(眞書)로 농담하는 것도 시들했거든요! 오늘 모처럼 문자를 한번 써먹자고......." 젊은 형사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장난스레 웃었다. 백영철은 이 젊은 친구가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같이 한 적이 있었는지 곰곰 생각해 봤지만, 잘 생각나지 않았다. 단지, 말하는 투로 봐선 상당히 허물없이 지냈던 것 같기도 했고, 그만큼 얼굴도 익었지만....... --나도 늙긴 늙었군. 백은 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참, 진대녀석 말인데요. 삼년 전 출감했을 적에 이젠 예술은 그만둔다고 그랬대요!" "흠!" "그리고 사업인가 뭔가 한다고 쫓아다녔다더군요." "맞지! 사업이라면 손을 댄 흔적이 있거든!" "선배님도 아시고 계시는군요!" "그런데, 그것도 신통치 못했던 것 같아! 봉제에 손을 댄 것 같은데, 공장은 벌써 걷어치운 것 같구......" "허. 선배님, 자세히도 아시는군요. 하지만......." "하지만은 뭔가?" "제가 들은 얘기론, 고향 가서 농장이라도 하겠다고 했다더군요!" "고향에서 농장?" "네. 서류대로라면, 강원도 K시 근처가 되겠습니다만......." "그건 어디서 들었나?" 백영철이 다잡아 물었다. 젊은 형사는 담배불을 붙인 다음, "조금 전, 전산실에서 조회를 부탁할 때 들었죠!" "누구에게?" "누구랄 것 없이 금고털이 진대는 우리 세계선 알아주는 단골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현범은 털썩 소파에 몸을 던졌다. 지쳤다기보다는 끓어오르는 짜증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모든 것이 안개 속이었다. 태양상사가 그랬고, 북두산업이 그랬다. 더욱이 사장도 몰랐다는 수표 때문에 도산되었다는 북두산업을 태양상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접수하고 나선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한편으로는 석연치 않은 일로 느껴졌다. "뭐랄까...... 그렇지. 태양상사는 좀 잔혹한 편이지. 태양상술(太陽商術)이라면 피도 눈물도 없다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지. 이익이 있는 곳에는 언제 어디든 태양이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니까. 마치 밀림지역 시체가 있는 곳에 하이에나가 있듯이 말야!" 장동렬의 얘기였다. 도서관으로 세무사 사무실로 뛰어 다니면서 긁어모은 자료를 기초로 하여 경제부 기자인 장동렬을 만났지만, 그의 대답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장동렬은--아니 그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양상사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상하군. 이익이 있는 곳을 외면해 버릴 기업가가 있다면 데리고 와봐! 이익이 있는 곳을 하이애나처럼 찾아다닌다는 것은 그만큼 기업정신이 왕성하다는 얘기가 아닌가!" 현범의 쏘아붙이듯 하는 반박에 동렬도, "그렇긴 하지만, 태양은 그 정도가 심하다는 것이야!" 하며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현범으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장사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 아닌가. 일반인들에게 적용되는 도덕에 굳이 상(商)자를 덧붙여 (상도덕)이라고 구별하는 것은 그만큼 상(商)이 갖는 비도덕성을 한 수 접어주자는 얘기가 아닌가. 문제는 태양상사가 썩 좋은 이미지를 만드는데 실패했다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현범은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태양으로 봐서는 그렇게 큰 규모도 아닌 부도액을 건지기 위해, 사장이 자살해 버린 북두 같은 구멍가게 상사라도 접수해야 한다고 나선 철저함이, 결국은 이미지를 손상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절대로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북두산업 사장이 발행 한 적이 없는 수표가 어떻게 해서 태양상사 손에 들어갔는가 하는 점이었다. 북두산업 사장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의 음모이거나 함정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꽤나 지쳐 있군! 잠시 들어 와서 차나 한잔씩 하지." 마침 외출에서 돌아오던 박인규 변호사가 조현범의 늘어진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이 입가에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차나 한잔씩"이라고 했지만,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 아닐 것이라고 현범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처음 북두산업 얘기를 들은 이후, 아직 한번도 박인규 변호사에게 경과를 보고한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현범으로서는 뜻밖이었다. 아직까지 보고할 만큼 가닥을 잡지 못했다는 것--그만큼 스스로의 무능이 노출당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 뭣 좀 알아 봤나?" "글쎄요. 아직은 안개 속을 헤매고 잇는 기분입니다만......." "그렇겠지. 워낙 엉뚱한 사건이라서. 헌데 그 이란 프로젝트란 것은 내용이 어떤 거였나?" "이란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아직은--이 피 비(E.P.B=경제기획원)나 비 오 케이(B.O.K=한국은행) 등으로 쫓아 다녀 봤지만, 태양상사가 이란에 투자한 사실은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한국은 자본자유화가 안된 곳이니까, 해외투자나 외국자본도입엔 반드시 이 피 비의 외자 심의회와 비 오 케이의 사전 승인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헌데도 태양상사가 최근 몇 해 동안 해외투자를 한 사실이 없었습니다." "흠!" "따라서 이란 프로젝트란 것은 하나의 허구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아마도 해외지사를 통한 외화 불법유출 케이스가 아닌가 합니다." "흠!" "만약 외화 불법유출에 의한 투자가 이란 프로젝트라면 그 사업자체도 극히 비정상적인 것으로 봐야겠죠!" "논리적으로 말하면 그렇겠지! 그건 그렇고 북두산업의 수표의 출처는? 미스터 조의 짐작으로는 어떨 것 같아?" 현범은 박인규 변호사가 짐작이라는 말에 유난히 힘을 주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어떤 확증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조현범 자신의 추론을 들어보자는 속셈으로 받아 들여졌다. "변호사님은 김칠성 사장의 말이 진실이라는 전제를 끝까지 고집하시는 것입니까?" "고집이 아니라, 믿고 있지. 더욱 김칠성 그 사람이 그렇게 죽기까지 해버렸으니까, 믿지 않을 수 없잖아?" "그렇담--그 수수께끼의 수표는 김칠성 사장이 정말 발행하지 않았다면--수표용지와 인감을 도둑 맞았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판 함정이겠죠!" "인감을 도둑 맞았다는 얘기는 없어!" "그럼 함정이거나 음모겠죠!" "누군가? 그 함정을 판 사람이......." "아마도......." 조현범은 남은 커피를 마시기 위해 말을 끊었다. "누구라고 생각하나? 그 음모를 꾸민 사람이?" "김사장이 직접 관리하는 금고를 아무 의심없이 열고 닫을 수 있는 사람....... 김사장이 의심하지 않는 사람." "회사 안에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없겠죠!" "그럼?" "김사장의 부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현범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박인규 변호사는 놀람으로 눈이 둥그래졌다. "허허. 비약이 심하군! 아무리 짐작이라구 해두......."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까?" "이 사람, 부부는 일심동체야! 특히 김사장 부부는......." "하지만, 돌아누우면 타인이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현범의 말을 박인규 변호사는 아예 상대도 하려 들지 않았다. 5. 기분은 열녀 --이럴 줄 알았으면 힘센 남자라두 하나 달구 올 걸 그랬어! 다리가 더 이상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은 둘째로 치고 우선 숨이 턱에 닿아, 후회의 한숨을 쉴 처지도 못 되었다. 박주옥은 선머슴애처럼, 풀섭에 털썩 몸을 던졌다. 덕분에 엉덩이가 얼얼했다. --예쁜 히프 라인 다 망가지겠다! 그녀는 한쪽 손으로 등에 진 백을 내려 놓으면서 한쪽 손으론 얼얼해진 엉덩이를 쓸어 아픔을 달랬다. 다행히 히프라인이 망가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번 주에는 엉덩이가 꽤나 수난을 당한다고 그녀는 픽 웃었다. 사흘 전이었다. 사무실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을 때, 좀 갈라진 목소리의 천박스러운 낱말들이 느닷없이 쏟아졌다. "박주옥이지? 쓸데없는 일에 엉덩이 흔들며 끼어들지 말어!" --내 엉덩이가 어때서? 주옥이는 천박스런 말투에 발끈했지만, 이미 전화는 끊긴 뒤였다. 그건 K시를 ㅎ고 다니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이튿날의 일이었다. 가까스로 정진대의 소재를 외삼촌을 통해 알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하늘시 구름구 같은 것이었다. 단지 정진대가 전과 6범의 금고털이 전문가라는 것, 고향인 K시 근처에서 농장을 한다고 했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주말을 이용해서 K시의 복덕방, 목로집, 노인정 같은데--그럴듯하게 남의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ㅎ었지만, 딱부러진 대답은 듣질 못했다. 다만, K시의 남쪽, 경북과 접도지역에 농장이 있을 거라는 얘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있을지도 모른다는 농장이 꼭 정진대의 것이라는 보장이 없고 보면, 더 이상 쫓아다니는 것도 생각해 봐야 할 일이라고 맥빠져 있을 때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 --어쩜, 거긴 정말 정진대의 농장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남에게, 적어도 이 박주옥이에겐 알려지기를 꺼려해야 할 무엇이 있다! 그래서 나선 길이었다. 토요일 일과를 마친 다음 강릉을 거쳐 K시에서 자고 오늘 아침 일찌감치 서둘러, 농장이 있음직 하다는 곳을 찾아 나선 것이다. 고생깨나 할 것은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낯선 산속을 무작정 헤매는 부담은 각오한 것보다 훨씬 힘이 들었다. 아직 해는 충분했지만, 갈 길은 멀었다. 우선 농장과 정진대를 찾아봐야 했고, 그 다음 야간 열차편에라도 서울로 돌아가지 않으면, 월요일부터 결근이 된다. 아직 태양상사쪽과 북두의 재래파가 완전한 융합이 안되어 어수선한 터수에 태양상사파의 여직원이 무단 결근을 해버리면, 신사에 좋을 까닭이 없다는 것쯤 주옥이도 알고 있는 것이다. 쉬고 나자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팠다. 주옥이는 벗어 팽개친 쌕을 뒤져 샌드위치 꾸러미를 찾아냈다. 마실 것이라곤, 수통에 반쯤 남은, 아침에 여관에서 받아 넣었던 시골 우물물뿐이었다. --맥주라도 있었으면....... 숙녀의 오찬으로는 너무 초라해서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고생이 모두 김칠성 사장의 자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사장이 살아 있었담, 열녀문이라도 세워 줄텐데....... 처녀의 열녀문. 그녀는 혼자 웃었다. 김칠성이가 살아 있다면, 이 고생이 아니라 지금쯤은 자기가 새로 산 연탄 아파트에서 짙은 시간을 즐기고 있었을 것이며, 그가 죽은 지금, 자기를 알아 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망인인 황여사에게 찾아가서 열녀문을 세워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는 일. 그러니까 열녀문은 처음부터 무리한 얘기였다. 무엇보다 누가 뭐래도 자신은 처녀, 처녀에게 열녀문이라니, 누구 혼인길 막을 참인가? 그녀는 수통의 찬물로 마음을 돌리고 샌드위치를 덥썩 베어 물었다. 배가 부르자, 나른함이 엄습해 왔다. 주옥이는 굴신운동으로 나른함을 털어 버리며, 그만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설까 보다고 생각해본다. 하지만, 기왕 빼든 칼, 여장부의 체면을 위해서도 두세 시간, 더 찾아보기로 마음을 고쳤다. --무슨 소리지? 그녀가 색을 짊어지고 다시 일어섰을 때, 바람에 실린 소리를 들었다. 자동차 엔진 소리 같다고 깨달은 그녀는 부리나케, 능선을 기어올라, 소리나는 쪽을 찾았다. "어머! 저런 데 길이 있었구나!" 능선의 접목 사이로, 저 밑에 트럭이 한데 엉금엉금 기고 있었다. 자세히 살피던 주옥이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럭이 기고 있는 곳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트럭은 계곡 사이를 흐르는 개울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아침에 그녀 자신이 국도에서 산으로 접어들었을 때 건넜던 그곳에서 한참 산속으로 거슬러 이어져 온 개울임이 분명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개울엔 물이 없었다. 산속 게곡의 개울치고는 이상하게도 바위랑 큰 돌멩이 같은 게 없다고, 무심코 발바닥 밑에서 사각대는 모래 소리를 즐겼던 곳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힘이 솟았다. 트럭이 이 산속까지 들어온 건, 설마 등산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고 보면, 이 근처에 무엇인가 있음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농장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트럭이 개울을 따라 험한 산속을 거슬러 올라 와야 할 상대가 있을 것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트럭운전사에게 물어보면, 일은 쉽게 끝날 거라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던 그녀는 다시 주저앉았다. 트럭 뒤에 저만큼 지쳐서 두 세 사람이 열심히 쫓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울 바닥을 엉금엉금 기는 트럭을 생각 같아서는 쫓아가면 곧 따라 잡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사나이들은 트럭 속도에 맞춰 뒤를 따르면서 열심히 상하로 몸을 움직였다. 이윽고 주옥이는 사나이들이 개울바닥에 난 트럭의 타이어 자국을 지우고 있음을 알았다. 그 남자들의 뒤를 쫓을까 하는 생각을 그녀는 꺾어 버렸다. 트럭 자국을 지우는 것이 사실이라면, 트럭이 이곳까지 들어 왔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일 것이 분명했다. 그런 그들을 뒤쫓아가서 길을 묻는다는 것은 영리한 짓이 못됨이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트럭과 남자들이 산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게 되자, 주옥이는 풀섶에서 일어나 비탈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개울을 건너, 건너편에 이른 그녀는 그곳의 능선이 여태껏 자신이 헤맸던 쪽보다 훨씬 경사가 완만한 것을 알았다. 그녀는 풀섶을 유심히 살피면서 능선을 더듬어 오르기 시작했다. 기분 탓일까? 우거진 숲속에는 방금 트럭을 쫓아간 사람들의 발자취 같은 흔적이 남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몇 개의 능선을 넘었을까? 그녀는 눈앞에 밋밋하게 초원이 펼쳐진 곳에서 발을 멈추었다. 잡목이 우거졌어야 할 곳이 갑자기 초원으로 바뀌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초원이라고 하지만, 그건 극히 완만한 비탈이었을 뿐이다. 비탈을 따라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그것은 함부로 우거져 있다기 보다는 사람 손이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주옥이는 우거진 잡초가 모두 한 가지 종류인 것에 놀랐다. --무슨 풀을 이렇게 가꾸는 것일까? 목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비탈을 내려 산모퉁이를 돌았다. <사유지;출입금지 풍년농원> 철망에 걸려 너덜대는 널판지를 발견하고, 주옥이는 깡충 뛰었다. --풍년봉제사와 풍년농원, 이건 정진대가 분명해! 겨우 찾았군. 그녀는 철망 사이를 비집고 "출입금지"쪽으로 들어섰다. 흉년에 태어나, 흉년 속에 자란 사람일까, 정진대는 되게도 풍년이란 말을 좋아한다고 그녀는 속으로 웃으며 길을 재촉했다. 이름은 풍년 농원이었지만, 경내는 그렇게 풍년스럽지 못했다. 한참을 걸어도 농원다운 분위기는 없었다. 멀리, 꽤나 거리가 있는 곳에 '사이로' 같은 빨간 원뿔 지붕을 한 둥근 구조물이 나란히 보였다. 그 왼쪽으로 역시 빨간 슬레이트의 건물과 그 곳을 한참 넘어선 곳에 무의미한 시멘트 건물들이 내려다 보였다. 사이로가 있는 걸 보면 목장도 한다는 얘길까 이런 썰렁한 산속에. 하면서도 주옥이는 어쩜 오늘 밤차로 서울로 돌아가는 건 틀려버린 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계는 벌써 오후 네시를 넘고 있었으니까. --서둘지 않으면....... 마음이 급해짐에 따라 메고 있는 쌕이 갑자기 무게를 더해왔다. 천근 만근, 쌕의 무게로 몸이 뒤로 당겨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쌕을 고쳐 메기 위해 어깨에 힘을 넣어 추스려 올렸지만, 쌕은 고쳐 메어지지 않았다--기보다는 오히려 뒤로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벌렁 자빠진 그녀는 험상궂게 히죽 웃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땅바닥에서 정면으로 쳐다보게 되었다. 밑에서 쳐다보는 사람의 콧구멍은 엄청 크고, 흉물스러웠다. 그 콧구멍 저 멀리, 어울리지 않게 펼쳐진 파란 하늘. 이 사내가 ㅆ을 잡아당겨 자기를 쓰러뜨렸다는 것을 주옥이는 가까스로 알아차렸다. "뭐예요? 사람 놀라게!" 앙칼진 주옥이의 부르짖음에도 사내는 그냥 히죽대면서 말했다. "놀란 건 이쪽이야! 겁도 없는 가시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싸돌아 다녀?" "어디긴 어디예요? 풍년농원이지!" "알고 들어 온 거군! 길을 잘못 든 게 아니구...... 왜 왔어?" "정진대씨 만나려구요!" "정진대는 왜?" "당신이 무슨 참견이에요?" "엉덩이에 뿔난 가시내가 하나 있다더니, 그게 바로 네 년이었구나! 혼구멍이 한번 나야, 뿔이 떨어져 나가나?" 사내는 막 몸을 추스리면서 일어서는 주옥이의 팔을 등뒤로 비틀어 올렸다. 너무 아파서 주옥이는 소리도 지를 수가 없었다. 사내는 한쪽 손, 손가락을 동그랗게 해서 입안에 넣고 휘파람을 불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와 함께 또 다른 사내 두 셋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주옥이는 눈을 감았다. 조심을 한다고 했지만, 이 숲 속에서 어떻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아예 무시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당하고 보니까 약이 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태권도 같은 거라도 좀 배워 두는 건데, 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붙잡힌 몸이었다. 남자들에게 끌려가면서 주옥인 자기를 쫓아왔던 감시의 눈이 이 남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꼈다. 끌려가는 등언저리에 그녀는 따가운, 보이지 않는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시선의 주인공은 자기 편일지도 모른다고 주옥은 생각한다. --난 원래 황당무계한 걸 좋아하니까....... 이 산속에 자기를 알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주옥인 그렇게 눙쳐 버리고 자위했다. 주옥이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어지럽게 얽혔던 꿈에서 겨우 깨어났지만, 지금 자기가 어디에 어떻게 놓여 있는지를 몰랐다. 머리는 터질 듯이 아팠다. 통증 속에서 가까스로 자기가 몹시 흔들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잠이 깬 것 같군. 겨우......." 낯선 목소리가 정수리까지 울려퍼져 두통이 더 심했다. 주옥이는 깜짝 놀라 소리나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낯선 남자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그리구 당신은?" "여기? 여긴 트럭 운전대, 난 운전수구......." 트럭은 캄캄한 도로를 몹시 흔들면서 달리고 있었다. "날 어디루 데려 갈 참이세요?" "어디긴...... 서울까지 보내 달라고 부탁을 받았지 새벽 4시쯤이면, 용산 어시장에 닿을 게야. 그때까지, 아가씨와 난 같은 트럭을 탄 공동운명체!" 그렇게 말하고 낯선 운전사는 마음 좋게 웃었다. "누가 부탁을 했나요? 날 서울까지 데려가라구...... 설마, 용산 어시장에서 날 공매하진 않겠죠? 생선이랑 함께......." "허허. 재미있군. 공매당할 생각이람, 내가 사두 무방하지만, 거기까진 부탁받지 않았어! 유감스럽게두." "누구예요? 부탁한 사람!" "그쪽에서 아가씨한테 연락한다구 했어. 도대체 난, 처음 본 사람이니까 아가씨두, 그 사람두......." "어디서 부탁 받았나요?" "한 시간 전 쯤, 이 국도 길목에서 차를 세웠어. 그 사람이...... 덕분에 자칫 했으면 사고 날 뻔했었지만, 아가씬, 그래도 길섶에서 잘도 자고 있더군......." --길섶에서 자고 있었다? 주옥이는 도대체 믿어지지 않았다. 팔을 비틀려, 낯선 남자들에게 끌려 간 곳은 창고 같은 곳이었다. 소릴 지르고, 앙탈을 부려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앙탈을 한 덕분에 입에는 자갈이 물렸고, 손발도 묶여 버렸다. 손을 등뒤로 도린 채 묶어 버렸기 때문에 몸을 추스릴 때마다 어깻죽지가 지르는 듯이 아팠다. "엉덩이 흔들고 끼여들지 말라는 경고, 농담이 아니었던 것 이제 알았어? 하지만 늦었어. 우린 여자를 상하게 하는 취민 없지만, 잡아 잡수하고 안달하는 걸 모른 척하지도 않아!" 한쪽에 쓰러진 채, 주옥이는 메마르고 갈라진 목소리를 들었다. 그건, 전화기를 통해 들었던 천박스럽고 메마른 바로 그 목소리였다. "어떻게 처리하죠? 이 가시내......." 한 사내가 갈라진 목소리 쪽에 물었다. 아마도 갈라진 목소리가 이 무리 중에 캡인 것 같았다. "어떻게 하긴....... 아버지가 와서 결정하겠지만, 아마도 너희들한테 주겠지. 마음껏 즐긴 다음, 내다 버리면 될테지!" "산채로 말입니까?" "이 녀석, 산 사람 내다 버리면, 제발로 제 갈길 찾아갈 것 아냐!" 그리곤, 그들도 사라졌다. 주옥은 묶여진 팔다리를 움직여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쉽게 풀 수 있도록, 마음 좋게 묶을 것이라면, 처음부터 난폭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결국 단념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렇게 묶여 있다간, 정말 그들이 말했던 것처럼, 그 우악스런 잡놈들의 밥이 되어 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매듭을 풀려다간 단념하고, 다시 용을 쓰고...... 그러는 동안에 주옥이는 지쳐 버렸다. 바깥은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내일 출근할 수 없다는 생각, 그리고 어쩌면 정말 여기서 자신은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겹쳐 진땀을 흘리다가 그녀는 잠이 들어 버렸다. 얼마쯤 잤을까? 그녀는 바스락대는 마른 풀 밟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밤이 깊어져 버린 것이다. 그녀는 꼼짝도 않고,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헤아리며 기다렸다. 조심스럽게 소리는 다가왔다. 자는 척 하고 있는 주옥이 얼굴에 갑자기 빛이 쏟아져 비쳤다. 다가온 소리가 플래시를 비추었다간, 얼른 꺼버렸다. "쉿!" 다가온 소리는 단지 그 소리만 하고 잽싸게 묶인 주옥이를 풀었다. 자갈이 풀리자 "당신은?"하고 주옥이는 입을 열었지만,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다가온 사람의 손이 얼굴을 온통 덮어 버린 것이다. 그 손바닥에는 손수건 같은 것이 쥐어 있었고, 거기서 나는 냄새가 퍽 향기롭다고 느끼면서 주옥이는 정신을 잃어 버렸다. --부탁했다는 사람은 그 사람이었구나! 누굴까? 날 구해주었다면, 마취까지 시킬 필요는 없었을텐데....... 겨우 주옥이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 사람은 자신을 그 곳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숨어들었고, 어쩌면 자기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탈출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마취를 시켰을지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 사람은 아마도 주옥이가 능선을 헤맬 때 등뒤에서 느꼈던 강렬한 시선의 주인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 나이는 얼마쯤 보여요? 그리구, 남자였죠?" 주옥이는 차츰 생기를 되찾으며 트럭 운전사에게 물었다. "글쎄....... 난 남자 나이는 잘 몰라. 여자 나인, 안아보면 당장 알 수 있지만......." 트럭 운전사는 킬킬거리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주옥이는 한숨을 쉬었다. 서울까지 가는 동안, 적어도 이 트럭 운전사의 음탕스런 농담을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될 자신이 불쌍하게 생각된 것이다. 겨우 택시를 잡아 탄 조현범은, "P호텔!" 하고 숨을 가다듬는다. 네시 오분. 약속 시간에서 이미 오 분이 늦어지고 있었다. "P호텔까지 몇 분이면, 갈 수 있을까요?" "글쎄, 한 이십 분은 봐야죠. 토요일 오후, 이렇게 길이 메어서야. 용 빼는 재주 있습니까?" "특별요금 드릴 테니까, 좀 더 빨리 갈 수 없을까요?" 현범은 늑장거리는 운전사의 느긋함에 조금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특별요금도 좋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태죠. 손님이 보시다시피...... 담배라도 피우면서 느긋하게 갑시다. 좁은 한국, 서둘러 봤자죠!" 운전사는 백밀러로 현범의 안달을 힐끗거리며, 카 스테레오의 버튼을 눌렀다. 목쉰 가수의 짜는 듯한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못 이긴 척 하고 타 버릴 걸 그랬다! 현범은 벌써 몇 번이고 되풀이했던 후회를 다시 되새겼다. 그는 죽은 김칠성 사장의 미망인 황인희 여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박인규 변호사는 현범의 의심을 "상대하기도 싫다"고 했지만, 어쨌든 미망인을 한 번 만나 보고 싶었다. 하지만, 결과는 박인규 변호사의 견해가 옳았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적어도 황여사는 음모나 함정을 팔 만큼 음울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헛 짚었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현범은 삼십분 전에 황여사와 헤어졌다. "안양엘 갈 일이 있어서......."하면서 함께 나온 황여사가 자기 차로 현범을 시내까지 태워 주겠다고 제의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네시 약속까지는 시간도 충분했고 뭣보다 안양엘 간다는 사람을 우정 신촌에서 시내까지 돌게 할 만큼 배짱도 없었다. 그는 오늘 네시에 자기가 묵고 있는 P호텔 커피숍에서 장동렬 강연숙 커플과 만나기로 약속을 해놓고 있었다. 시간을 좀 늦춰주기를 동렬이가 희망했지만, "느긋하게 즐기자"고 현범이가 우겨서 정한 시간이었다. --면목없게 되어 버렸는 걸! 현범이는 겨우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하는 택시 차창으로 눈길을 던졌다. 서울생활을 시작하면서 제일 걱정했던 한국어는 생각보다 쉽게 익숙해진 것은 다행이었다. 이십년 만이라고 해도, 미국에서 주로 한국인 상대의 아르바이트로 학자금을 벌어 쓴 게 큰 도움이 되어 겨우 서울 생활의 요령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비싼 호텔보다 아파트를 빌려 옮기는 게 어떤가?"고 권해 온 동렬이의 제의를 그는 솔직하게 받아들였다. 마침, 동렬이의 삼촌이 아이들 학군(學群)때문에 아파트를 한 채 마련해 놓은 채 비워두고 있는 게 있다는 것이었다. "학군 때문에? 무슨 얘기야? 그건......." "잘 모를 게야. 미국인은......." "잘 모를 정도가 아니라 전연 모르겠는데......." "일테면, 좋은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선 좋은 학교가 모여 있는 곳에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래서 주소만 옮겨 놓을 집이 필요한 거야. 일테면 베이스 캠프!" "그렇다고 비워 두는 건 모를 일인데. 그곳으로 이살 가면 되잖아? "세상일이, 그렇게 쉽지 만은 않은 게야. 삼촌은 병원을 갖고 있거든! 병원 옮기기 보단 아파트 한 채 사 놓고 비워 두는 게 손쉽다는 거지!" 동렬이의 설명도 결국 현범이를 이해시키진 못했으나, 비어 있는 아파트를 이용하자는 데는 의견이 일치되었다. 오늘, 동렬이와 만나기로 한 목적은 빈 아파트 주인인 동렬이의 삼촌을 만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얘기의 진전에 따라서는 주말쯤엔 아예 옮겨가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는 것이다.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강연숙은 줄곧 현범을 위해 김칠성 사장에 관한 자료를 공급해 주었다. 때때로 현범의 협조 요청을 귀찮게 여기는 동렬이에게까지 채찍질을 서슴지 않는 것이 연숙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제공해 준 자료들은 모두가 동렬이의 표현 대로 라면 "주간지 스타일로 염색된" 것들뿐이었다. 연숙이가 직접 쓴 김칠성 사장의 자살 사건 스크랩과 그 뒤 북두산업의 동태들이었다. 특히 현범의 눈길을 끈 것은 연숙이가 제기한 김칠성 사장의 자살에 대한 의문점이었다. 유가족인 황인희여사에 의해 그의 자살이 확인된 것이지만, 연숙은 경찰의 대응 태도를 중심으로 물고 늘어진 것이다. 요는 경찰이 무성의했다는 것이다. 첫재 변사 사건인데도 부검(剖檢)이 없었다는 것. 둘째 사건현장이 경북과 강원도의 접경이란 점 --이 때문에 관할권 문제로 해서 어쩌면 경찰이 소홀히 했을는지도 모른다는 것. 셋째 워낙 외진 곳임에도 불구하고 사건 제보가 뜻밖에도 빨랐다는 것 등이 그녀가 제기한 의문점이었다. 결국 강연숙은 북두산업 김칠성 사장의 죽음--자살 사건이 석연치 않다는 것, 따라서 김칠성 사장은 타살일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는 주장을 은연중에 펴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추어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논리였지만, 그런 대로의 날카로움이 있었다. "--별것 아니예요. 뭐랄까...... 그래요. 주간지란 흥미나 센세이셔널리즘을 파는 장사 아녜요? 이렇게 각도를 바꾸어 본다면, 이 사건이 훨씬 재미있다는 점을 보여 줬을 뿐이에요. 어쨌든 미망인이 자살을 확인한 이상 더 의심할 나위가 없다고 단념하는 게 예의겠죠!" 현범의 칭찬에 약간은 겸손해 한 연숙의 대답이었다. 그런 저런 협조에 대한 사례로 오늘 저녁을 대접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늦어지고 있다니....... --현범은 슬금슬금 대는 택시 안에서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뭐예요! 십분이나 지났는데두...... 방에 전활 해보세요!" "조금 전에 했잖아!" "신호, 몇 번 보냈어요?" "그건 왜?" "혹시 낮잠이라두 자구 있을지 모르잖아요? 그럴 땐, 전화벨 소리 두세 번으론 어림도 없을 때가 있으니까요!" "그건 염려 없어! 그 친구, 외출 중이란 걸 확인했어! 프론트에 룸키가 버젓이 있거든!" "그럼 우리 가요! 사람 불러놓구 혼자 싸돌아다니다니...... 그 사람, 정말 미스터 장의 친구예요?" P호텔 커피숍. 일층과 이층 사이의 중간층 베란다를 개조해서 도로 쪽은 전부 유리를 붙여 전망이 괜찮은 도심의 명물 커피숍이었다. 때문에 항상 붐볐다. 더구나 토요일 오후. 동렬과 연숙이 ,가까스로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것이 현범과 약속한 네시 정각. 그러나, 현범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십분이 지나면서부터 연숙이는 마침내 숙녀의 프라이드가 한도를 넘어 앙탈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앙탈은 단순한 숙녀의 프라이드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은 이번 주말, 두 사람은 여행을 가기로 이야기가 진행중이었다. 그런데, 현범과의 약속으로 깨어져 버린 것이다. "월요일로 미루면 안돼요?" 하고, 처음부터 내키지 않았던, 연숙이었으니까, 현범이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게 하나의 빌미가 되어 앙탈이 터져 버린 것이다. --이 사람, 어딜 가서 뭘 하길래? 동렬이도 차츰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가능하면, 현범이와 만나서 대충 얘길 끝내고, 연숙이를 데리고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갖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황금 같은 시간을 이렇게 썩히다니....... "싱거운 사람이군! 만나자고 해놓곤 이렇게 바람을 맞히다니......." "이러지 말고, 우리 나가요!" "오분만 더 기다려 보자구......." "오분씩이나요? 벌써 십오 분을 기다렸는데두요?" "오분이라야, 담배 한대 피우는 시간 아냐? 너무 쩨쩨하게 놀지 말자구!" "미스터 장은 담배라도 피우면 되지만, 난 뭘해요? 그 오분 동안......." "나 담배 피우는 것, 관광하면 되잖아?" "피이!" "아님, 저쪽 테이블에 등 돌리고 앉아 있는 신사, 관찰이나 하지 그래? 반백이 아주 로맨틱한데......." "정말, 그렇게 약 올리기예욧!" 연숙이는 앙칼지게 쏘아붙이면서도, 동렬이의 눈길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정말 휼륭한 로맨스 그레이가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어때? 한 오분의 관광감으론 휼륭하지? 나두 늙는다면 저렇게 늙었으면 좋겠다!" "정말! 저 정도면 국보감!" 이상한 데서 감탄하던 연숙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딜 가려구? 오븐만 더 기다려주자!" "그래요! 십분 더 기다리는데 찬성!" "그렇담 앉아! 어딜 갈려구 그러니?" "저 훌륭한 로맨스 그레이에게 경의를 표하고 올게요! 무료 관광은 실례니까요!" "어이! 미쳤어?" 장동렬은 어이가 없다는 듯, 또각 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면서 멀어지는 연숙이에게로 불안한 눈길을 던졌다. 현범이가 나타난 것은 연숙이가 자리를 옮긴 것과 거의 동시였다. "어떻게 된 게야? 이 사람!" 장동렬이 짜증스레, 자리에 앉는 현범을 윽박지르자, "미안! 미안! 택시 잡는데 삼십 분씩이나 걸릴 줄은 정말 몰랐어! 어쨌든 미안!" "어딜 갔었길래?" "여기, 저기. 오늘은 내 나름대로 좀 바빴지!" "여기, 저기라니? 약속에 늦은 사람치곤 대답이 불성실하군!" "미안. 실은 황인희여살 만나고 오는 길이야!" "황인희여산 누군데?" "죽은 김칠성 사장 미망인." "미망인이나 찾아다니구...... 젊은 사람이!" "이러지 말어! 난 필사적이야. 벌써 두 주일이 지났는데두, 뭣하나 손에 잡힌 게 있어야지! 그래서......." "알았어. 김칠성인가 하는 사람 자살진상 규명말이지?" "알아주니 고맙군!" "그래, 미망인에게서 뭘 좀 얻어냈어?" "그것보다, 미스 강, 자네 웅녀는?" 현범이는 다가온 웨이트리스에게 커피를 주문한 다음 물었다. "기다리다 지쳐서...... 저쪽이야!" "과연...... 그런데 저 사람 누구?" 두 사람은 연숙이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녀는 열심히 떠돌면서 재미있게 웃고 있었다. 멀어서 두 사람의 얘기 소리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자리의 분위기가 절대로 초면은 아니라고 동렬은 생각했다. "이봐, 누구냐구, 미스 강이 만나고 있는 사람이. 아파트 주인인 자네 삼촌인가?" "아니, 나도 모르는 사람. 실은......." 동렬이는 결국 연숙이가 저쪽 테이블로 옮기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또 한 번 미안! 하지만 재미있군!" "뭐가?" "미스 강이 로맨스 그레이 관광 사례로 저렇게 즐거워하는 것, 어쩌면 미스 강과 친한 사인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것 같기두 해!" "조심해. 미스 강에게 로맨스 그레이 취향이 있다면, 큰 일이군. 자네가 갑자기 늙어 버릴 방법도 없구!" "예끼, 이 사람!" 두 사람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연숙이 돌아온 건 조금 뒤였다. 멋진 로맨스 그레이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기 때문에 그녀가 돌아온 게 빨라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구였지? 그 사람. 꽤 친한 것 같은데......." 동렬이의 물음이었다. "조금 아는 사람." "조금 아는 사람이라니? 뭣 하는 사람인데?" "형사!" "형사? 그렇게 찬란한 백발이 형사라니......." 현범이 놀라면서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었다. "놀라우세요? 하지만 안심하셔두 괜찮아요. 미스터 조가 놀랄까봐 벌써 형산 그만 뒀으니까......." "뭐야! 퇴직 형사였군!" 현직이라면 뭣하지만, 퇴직을 했다니 안심이란 투의 동렬이었다. "왜 어디 켕기는 곳이라두 있나요? 형사라니까, 두 사람 모두 놀라구, 퇴직했다니 안심했다는 표정을 짓게?" "이러지 말아요, 미스 강. 이래뵈도 난 캘리포니아 바 멤버예요!" "어머, 몰라봤군요. 바 멤버시란 것. 그래서 약속 시간도 느긋하게 지켜 주신 걸 미처 계산 못해, 일찍 나온 것까지 한몫 사과 해야겠네요!" "두루 두루, 두고 두고 미안합니다." 현범도 두 손을 가슴에 모아 과장된 사과를 했다. "근데, 그 전직 형사가, 미스터 조를 어디서 본 것 같다구 하던데...... 기억 없으세요?" "그 사람이 나를?" "네!" "전연! 아시다시피 난 서울 온지 한달 밖에 되지 않았구......." "그렇담, 한 가지 밖에 없지. 자네 얼굴이 지명 수배중인 범인을 닮았다는 ......." 동렬이가 웃지도 않고 말했다. "그 말, 농담치곤 하나두 우습지 않군! 오늘 우습지 않은 농담, 이것으로 두번째가 되는군." "첫 번째는 누구한테?" "황 인희 여사!" "어머! 미스터 조! 황여살 만났었어요?" "네!" "만나보니까 어때요? 뭔가 알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연숙은 갑자기 눈빛까지 달라지면서 현범을 다잡았다. "아쭈! 또 그 탐정병이 발동을 시작하는군!" "가만 좀 계셔요! 미스터 장! 다시 얘기 중단시켰다간 아예 절교예욧!" 연숙이는 앙칼지게 쏘아붙이곤 현범이를 재촉했다. "뭔가 있었나요? 황여살 찾아간 건?" "별로. 단지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요?" "황인희여사, 뜻밖에도 미망인이란 분위긴 전연 없더군요. 마치 남편이 출장을 떠나 모처럼 홀가분한 시간을 즐긴다는 투 같아서 놀랐습니다." "그렇죠?" "낙천적이란 얘긴 들었지만, 낙천도 그 정도면, 달관의 경지라고나 할까?" "낙천이 달관의 경지라, 아주 감격적인 표현이군. 자네의 한국어 표현도 그만하면 달관의 경지!" "가만 계시라고 했죠?"하고 끼여든 동렬에게 눈을 흘긴 연숙은 현범에게 물었다. "오늘 황여살 찾아갔던 목적이 뭐예요?" "목적이랄 것까지, 거창한 건 별루 없었습니다......." "얘기하시기 더 쉽겠네요. 거창하지 않다면......." "한 가지, 의문점 때문이었죠. 하지만, 대답은 못 찾았습니다. 유감스럽게두......." "의문점?" "네!" 현범이는 손으로 턱을 한 번 쓱 쓸었다. 한때 수염을 기르고 있을 때의 버릇이, 깨끗이 밀고 난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다. "죽은 김사장의 유류품(遺留品)--미스 강이 말했던 리스트에 어쩐지 신경이 쓰이더군요. 그는 직접 자동차를 몰고 서울을 떠났다가 현장에서 자동차를 버리고 투신한 것으로 되어 있죠." "그건, 이미 신문에 보도된 대로지." 동렬이 덧붙였다. "그래, 그렇담 죽은 김사장 포키트엔 자동차 면허증이 있었어야 얘기의 이가 맞을 것 아냐? 그런데, 경찰 기록엔 그게 없었어. 주머니 속엔 명함 몇 장과 손수건밖에 없었다는 거야. 애연가였다던 그가 피던 담배도 라이터나 성냥도 없었다는 것도 마음에 걸리구......." "라이터는 자동차에 붙어 있는 걸 썼다고 볼 수도 있지. 공교롭게도 현장에 이르렀을 때, 담배가 떨어졌달 수도 있고......." "그건 그래. 하지만 면허증이 없다는 건......." "무면허일 경우는 생각할 수 없나?" "절대로! 그가 동해안으로 떠난 건 부정수표 단속법에 따른 구속을 피하기 위한, 말하자면 도망이야. 도망 다니는 사람이 있는 면허증을 버리고, 위험하게 무면허 운전을 했다곤 볼 수 없지!" "그래요! 그건 정말 이상하네요! 진작 왜 착안을 못 했을까? 그 점에......." 연숙이는 약이 오른 표정이었다. "그래서 황여살 찾아 갔었죠! 혹시 경찰의 기록에는 누락이 되었더라도 유가족에게 인도했을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어쨌든 미스 강이 지적한 대로 이번 일에 대한 경찰의 대응은 그렇게 만족할 만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요?" "없었다구, 모르겠다구 하는 게 황여사의 대답이었죠?" 현범이 생각나는 대로 둘러대고는 식은 커피를 주욱 마시며, 연숙을 건네다보았다. 차마, 속에 담아 둔 것을 그대로 동렬이와 연숙에게 말 할 수 없었다. --황인희 여사가 남편 몰래 수표를 훔쳐 회사를 도산시키고, 그를 자살로 몰고 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만나러 갔었다. 그렇게 실토를 한다면, 아마도 이 두 사람은 자기를 미쳤다고 하기 전에 어이가 없어 기절부터 할는지 모른다고 현범은 생각한 것이다. 처음 그런 의문점을 제기했을 때, 점잖던 박인규 변호사조차 아예 상대를 해 주지 않았던 것을 그는 상기한 것이다. 만약 미친 소리라고 판단하든지, "어머, 정말!"하고 연숙이가 예의 주간지식 흥미를 발동한다면, 오늘 저녁식사는 엉망진창이 되어 버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범은 창밖으로 눈길을 던졌다. 거리엔 아직 석양이 깔리기 시작했을 뿐이지만, 환락가 중심지인 이 언저리엔 이미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 언저린, 밤만 되면 활기가 가득 차더군, 낮보다......."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길 저쪽에 서 있는 세 사람의 건장한 남자를 주시했다. 로터리 코너의 공중전화 박스 옆에 선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이쪽을 주시하는 것 같았다. 특별히 이쪽을 주시하는 게 아니라, 이쪽 P호텔 쪽으로 그들은 눈길을 모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동차 면허증에 집착하는 이유는 뭔가?" "특별히 집착하는 건 아니지만......." 현범은 다시 두 사람쪽으로 눈을 돌렸다. "단순한 의문 같진 않군!" "그래요. 단순한 의문점 때문에 숙녀를 이렇게 기다리게 하진 않았을 테고...... 설마, 미스터 조!" 연숙이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설마, 현장에서 발견된 시체가 김칠성 사장이 아니라는 건 아니죠?" "이봐! 이봐! 연숙이,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야?" 흥분한 연숙이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며 동렬이 말했다. "그렇담, 미스터 조는 시체를 확인한 황여사를 믿지 않는다는 얘기예요?" 연숙은 뜻밖에 집요하게 따지고 들었다. "황여사도 믿구, 김사장의 자살도 믿죠!" "그럼, 뭐예요! 시체가 바뀌어 졌을지도 모른다구 해놓구선, 자살을 믿는다니...... 도대체 뭐예요." "허허, 이것 봐라! 이 사람은 아무 말두 안했어! 시체가 바뀌어졌다는 둥, 황여사를 못 믿는다는 둥 모두 미스 강이 앞질러 간 거야!" 동렬이가 쐐기를 박아 주는 바람에 현범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어머, 제가 앞질러 갔다구요? 천만에 그러니까 미스터 조! 미스터 조 생각으로는......." "이봐, 그쯤 해두구, 그만 일어서지! 난 매일 이맘때가 되면 항상 배가 고파진단 말야!" "어머, 정말이세요!" 하면서 연숙은 핸드백에서 천원짜리 한 장을 꺼내 동렬에게 건넸다. "뭐야 이건?" "어디 가서 라면이라도 드세요. 남의 얘기 훼방 놓지 말구요!" 6. 주막집 증언 아무리 교묘하게 계산되고 꾸며진 사건이더라도, 또 아무리 우연하게 일어난 사고라도 실마리는 있게 마련이었다. 설령, 목격자가 한 사람도 없더라도 시체가 있다면 시체에게 모든 것을 물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부검 감식을 통해 시체가 간직하고 있는 모든 비밀을 수사팀은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다. 스즈키가 마지막으로 묵은 것으로 기록된 K시의 R호텔을 들렀지만, 그럴 듯한 단서가 없었다. "확실히 그 일본사람은 그날 아침, 등산 차림으로 호텔을 떠났습니다. 그 뒤론, 전혀 연락이 없었죠." 지배인은 숙박일지를 뒤적여 백영철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는 그날 몹시 비가 쏟아졌음에도 등산길에 나선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다. "전연 연락이 없었다면...... 호텔측 으로서는 어떤 조치를 취했나요? 그 뒤로......." "이틀을 기다린 다음, 그 사람의 방을 비웠죠. 네! 그가 갖고 온 짐은 아마 지금 창고 속의......" "이틀 동안 기다렸다? 경찰엔 연락을 안했나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판단했죠. 이틀을 기다린 건, 그 사람으로부터 받은 숙박비가 사흘치였으니까......" "투숙객이 증발했는데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는 얘기군! 당신의 말로 봐선......" "종종 있는 일이니까요. 워낙 이쪽은 관광지가 돼 놔서 발길 닿는 데서 하루 이틀 묵는 경우가 많죠. 더욱 일본 관광객은 목적이 딴 데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목적이 딴 데?" 백영철의 물음에 호텔 지배인은 새끼 손가락을 펴 보이면서 의미있는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그 사람,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나요?" 하고 물었다. "아니, 그 사람 짐 좀 보여 주겠소?" "그러죠." 지배인은 벨 보이를 불러 짐을 갖고 오도록 지시했다. 짐은 슈트 케이스 한 개였다. S. SUZUKI의 영어 명패가 붙어 있는 슈트 케이스는 잠겨 있었다. 백영철은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 좀......" 하고, 현지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R호텔에 있는 스즈키라는 일본인의 슈트케이스를 치안국 현계환씨 앞으로 긴급히 발송하도록 부탁한 다음 호텔을 나왔다. 그는 K시의 버스 정류장, 기차 정거장 같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스즈키의 행적을 수소문했다. 등산복 차림으로 나갔다면, K시 근교산이 아니라면, 교통편은 버스나 기차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허사였다. 스즈키의 여권에서 복사한 인물 사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숙박비를 사흘치 선불했다면, 그는 이곳에 사흘 머물 계획이 분명했다. 사흘 체재 계획을 갖고서도 빗속의 등산을 강행했다는 건, 그만큼 스케줄이 빡빡했다는 얘기. 이 K시에서 그는 사흘 동안 뭘 할 참이었을까? 그리고 왜 실종된 걸까? 백영철은 지친 다리를 쉴 겸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생각에 잠겼지만, 해답이 나올 까닭이 없었다. 점심을 마친 그는 우체국에 들려 현계환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스즈키의 슈트케이스는 지급으로 치안본부로 보내도록 부탁했습니다. 그 사람 짐을 뒤져보기 전엔 지금으로선 막연합니다. 네? 전 내일 귀경하죠. 네, 다른 일이 조금 남아서......." 결국 스즈키의 슈트케이스에서도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한다면, 그것으로 손을 들 수밖에 없을 지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쨌든, 그가 자취를 감춘 뒤 너무도 많은 시간이 흘러버린 게 문제였다. 적어도 그의 패스포트가 주한대사관에 우송된 시점에서 협조를 구해왔다면 몰라도 지금은 너무 늦어 버린 것이다. 그 동안 주한 대사관은 무엇을 했단 말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백영철로서 짐작이 가는 일은 물론 아니었다. --K시와 포항까지 2백 킬로미터, 스즈키가 R호텔에 투숙한 유월 이십 사일과 그의 패스포트가 서울 일본 대사관으로 우송된 유월 이십 구 일의 닷새....... 백영철은 우체국 창구에 앉은 여직원 앞으로 다가갔다. "혹시, 포항 쪽으로, 이곳에서 남쪽으로 등산 다닐 만한 산이 있나요?" 여직원은 우편을 정리하던 손을 쉬면서, 백영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뚱딴지같은 질문이겠지만...... 혹시 오를 만한 산이 있다면 가르쳐줘요, 아가씨!" "이 궂은 날씨에 등산을 하시게요? 넥타이 차림으루?" 하긴 그랬다. 꾸물꾸물하던 날씨가 어느덧 비를 쏟고 있었다. 넥타이 차림에 등산을 하든 말든, 전봇대로 이빨을 쑤시든 말든--하고 백영철은 싱긋 웃었다. "산만 있다면야, 지금 당장이라두 파카로 갈아입고 쫓아가야지...... 좋은 산 없을까?" "왜요. 산이야 많죠. 우선 남쪽으로 한 이 십리를 가면 외딴 주막이 있구요, 그 왼쪽은 바다, 오른쪽은 온통 산이에요. 가 보시구, 골라잡아 올라 보세요!" 여직원은 반쯤은 농담으로, 반쯤은 백영철을 빈정대는 말투였다. --남쪽으로 이 십리라, 포항 쪽으로 팔 킬로 가까워지는군! 백영철은 일단 그곳으로 가 보기로 했다. 이렇게 여름비가 쏟아지는 날이라면, 외딴 주막에서 막걸리 한두 잔 마시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그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우체국 앞에서 빈 택시를 잡아 주막 쪽으로 향했다. "왕복요금에 담배값쯤 얹어 주셔야 합니다!" 택시 기사의 말에 백영철도 말없이 오천원 짜리를 내밀었다. "비는 통금 시간 동안에나 쏟아 줬으면! 그게 어렵다면, 수원지나 논밭에나 쏟아줬으면!" 택시 기사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액셀러레이터를 쭉쭉 밟기 시작했다. 주막 주변도 한산했다. 이런 곳에 주막이라니, 할 정도였다. 아무리 살펴봐도 이런 곳에 주막을 열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낡아서 삐꺽거리는 유리 미닫이를 열고 백영철이 들어섰을 때, 그래도 주청은 의외로 손님들이 심심찮게 모여 앉아 있었다. "보기 보단 장사가 잘 되는 것 같군!" 그는 주문을 받으러 온 주인 같은 남자에게 감탄을 보냈다. "오늘은 장날이니까요!" "장날? 아직도 그런 풍습이 남아 있나? 과연 시골이군!" "말뿐이죠. 시내 슈퍼마켓은 매일 영업을 하는데..... 뒷쪽 마을 사람들만 닷새 거리로 나들이를 할 분이죠. 매일이 장날이라면, 이 장사도 심심친 않을텐데......" 주막 주인은 보기보다는 말이 많은 편이었다. 그게 오히려 잘 되었다고, 백영철은 스즈키의 사진을 내밀었다. "이 사람, 혹시 기억나세요? 유월 하순께, 이곳에 들렸을는지도 모르는데......" 주인은 한참만에 머리를 흔들었다. "여긴, 외지 사람은 가뭄에 콩나기보다 더 드물죠. 더구나 이렇게 넥타이까지 맨 사람이란, 일년에 한 사람 있을까 말까죠!" "그 사람 넥타이 대신 등산 차림을 했다고 생각하고 다시 한번 살펴봐요! 이 근처에 반드시 들렀을 텐데......" "등산 차림의 유월 그믐께의 외지인이라...... 그럼 혹시?" 주인은 다시 사진을 찬찬히 살피면서 중얼거렸다. "혹시라면...... 짚이는 것이 있습니까?" "얼굴은 기억 없지만, 도깨비 같은 일은 있었죠!" "도깨비 같은 일?" "허허, 손님! 아무리 비오는 날이지만, 도깨비 얘길 공짜로 들으시겠다는 건......" 주인은 겨우, 장사를 해야겠다는 데로 생각이 돌아온 것 같았다. "아, 그렇군! 뭐든지 좀 적당히 갖고 오슈. 함께 목이나 축이면서 얘길 들어봅시다." 백영철의 말에 주막 주인은 소주랑, 생선 무침이랑 부지런히 날라왔다. "제가 이곳에 주막을 연 것은 한 십년 전죠!" 소주 두어 잔을 마신 주막 주인--김씨라고 했다.--이 입을 열자, 백영철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십년 전 일부터 흘러 내려온다면, 지난 유월 하순께 얘기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김씨는 백영철의 그런 속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얘기를 주워 섬겼다. 이 주막엘 들르는 단골들은 모두 알고 있는--그래서 누구도 들으려 하지 않는 얘기를, 그는 모처럼 임자 만난 김에 한번 읊어 보자고 작심이라도 한 것 같았다. "이곳 주변 경치야 일품이죠! 더욱이 앞 국도가 확장 포장되고 부터는 교통도 그만입죠. 헌데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손님이 없다는 거요." 그는 주변 경치나 도로 사정에 비해 교통량이 적다는 것, 그래서 장사가 안 된다는 푸념이었다. 그런데도 주막을 닫지 않고 버티는 것은 장사가 어느 정도 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자기로서는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 그래도 이럭저럭 버티는 것은 삼 십여 호가 모여 있는 뒷마을 덕분이라고 했다. 입지 조건으로 봐서 이런 곳에 주막을 차릴 정도의 머리와 재간으로서, 다른 일을 갖는다는 것은 우선 기대할 수 없다. 그렇지만 김씨는 파리를 날리면서(물론 겨울에는 그것조차 없어지지만)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다고 했다. 이 일대가 조만간 리조트 지대로 개발될 것이라는 얘기를 뒷받침하기라도 하듯이 온천이 발견되었다고 소문이 나도는가 하면, 자가용족들의 해수욕장으로 인기가 있다는 것, 그래서 비오는 날을 제하면 여름 한철은 그런 대로 바쁘기도 하다는 것이다. 잘하면 막걸리 주막 대신, 햄버거의 체인스토어나 주유소를 하겠다는 도시의 복부인이 나타나지 말라는 법도 없다는 게 김씨의 기대이자, 계산이라고 했다. 요는 기득권을 쌓아 올리면서, 도시의 손 큰 사업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선생님 같은 분이 널리 널리 선전을 해주셔야 합죠! 한 잔 올리겠습니다!" 주막 주인은 어느덧 술이 올라 있었다. "여보 김씨, 그것보다 도깨비 얘기나 들읍시다!" 백영철은 빗나가 버린 얘기 실마리를 되돌리기에 필사적이었다. "그렇군! 도깨비 얘길 듣고 싶다고 했죠?" 주인 김씨는 생각난 듯이 해죽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날도 장날--이렇게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는 장날이었습죠." ......장날이었는데도, 하루종일 돈 될 만한 손님--낯선 나그네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손님이 장날엔 뜸뜸이 있게 마련이었다. 장날이라고 해서 정말 장이 서는 것은 아니었다. 이십여리 떨어진 K시가 면(面)이었던 때 만해도 닷새 장이 섰지만, 지금은 인구 오만의 어엿한 시. 슈퍼마켓이랑, 뒷골목 시장이 옛날처럼 닷새에 한 번씩만 문을 열 까닭은 전연 없었다.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은 옛날처럼 닷새에 한번씩 꼭 장날에만 장 나들이를 하는 것이다. 아무리 급한 물건이 있어도, 장날 이외에는 꿈쩍도 않았다. --슬슬 문이나 닫자. 김씨가 주청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홀 한구석 테이블에 손님이 앉아 있음을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언제 들어 왔는지도 몰랐다. 낯선 사내 옆에 쌕이 놓인 거랑, 차림새로 봐서 등산객 같기도 했다. 낯선 손님은 주전자에서 보리차를 따라 맛있게 마시고 있었다. --멍청하게, 들어온 손님 놓칠 뻔했잖아! 김씨는 혀를 가볍게 차면서 다가갔다. "뭘 드실갑쇼?" "국밥, 그리고 막걸리 반되." 주문을 받아 돌아서는 김씨를 사내는 다잡듯이 말을 던져 왔다. "혹시 남쪽으로 가는 차편 없을까요? 이 시간에는......" "남쪽이라면?" "포항쪽......" "글쎄요, 손님 운수겠죠. 길거리에 나서 기다려 보면, 혹시 도라꾸(트럭)라도 마주칠까. 하긴 이 빗속에선 그것도 어렵겠구만요." "있을게요. 트럭이라면......" 김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막 문이 드르륵 열림과 동시에 또다른 목소리가 끼여들었다. "아, 박씨, 웬일이우? 이렇게 늦게......" 김씨의 인사. 그러나 박씨는 이를 무시하고 낯선 사내에게 말을 이었다. "한참 있다, 트럭 한 대가 올 거요." "웬 도라꾸가? 박씨가 어떻게 알아?" 주막주인 김씨는 물 묻은 손을 바지 자락에 닦으며 물었다. "이래도, 이 박팔도의 귀 하나는 알아 줘야지. 오다가 보니까 트럭이 한 대, 벌렁 자빠져 있지 않겠어? 고장이 났다는 게야. 한 시간이면 고친다구, 운전수가 트럭 밑에서 고생하고 있더군. 오늘 중에 포항에 닿아야 한다는 게야!" "그게 언제쯤이었습니까?" 두 사람 대화를 듣던 사내가 비로소 물었다. "글쎄, 가만있자, 그게 K시에서 삼마장 떨어진 곳이니까...... 내가 걸어온 시간을 생각하면......, 그렇지, 담배 한대 천천히 피고 나면 그럭저럭 한 시간이 되겠죠." 시킨 국밥과 막걸리 반되를 급하게 먹고 마셔치운 낯선 사내가 나가 버리자, 김씨는 불안하게 박씨에게 물었다. "저 녀석, 혹시 간첩 아닐까? 말씨가 좀 이상한데?" "간첩? 아서, 생사람 잡을 소리. 우선 그 사람 머리가 장발이야! 그리구, 간첩이 이 외진 곳에서 태연히 국밥 사먹으려구? 얼굴 색도 깨끗하잖아?" 박씨는 소주 한 병을 시켜 혼자 술타령을 벌였다. 박팔도는, 마을의 주정꾼이었다. 마을의 잡역을 도맡아 해주고는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생기는 대로 생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입이 좀 헤퍼 마을 사람들로부터 경원당한다기보다 신용을 받지 못하는 그런 처지였다. 장날이면 꼭 할 일이 없어도 K시에 원정을 가서 기웃거리다가 주막에 들려 술타령을 벌였다. 박씨가 소주를 반 병쯤 비웠을 때, 트럭 지나가는 소리에 주막의 창문이 흔들렸다. "그것봐! 트럭이 틀림 없잖아!" 박씨는 어깨를 한 번 쭉 펴고는 일어섰다. "술값은 달아둬요. 쌀로 갚든지, 닭으로 갚든지 오래 끌진 않을 테니까!" 그는 비닐 우산을 펴들고 비에 젖은 국도의 어둠 속으로 빨려들 듯이 사라졌다. 김씨는 얘기를 중단하고, 자작으로 소주를 한잔 쭉 들이켰다. "그래서요?" 백영철의 독촉에 김씨는 오이를 한쪽 씹어 삼킨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뿐입죠. 박씨 술 외상값은 아직도 못 받고 있습죠!" "그게 아니라, 그 등산 차림의 사람은 어떻게 되었소? 트럭을 얻어 탔느냔 말이오!" "글쎄요...... 그 뒷얘기가 아주 이상하게 되어 버렸습죠. 고약하게...... 사람이 죽었다기도 하고 도깨비가 장난을 쳤다기도 하고......" "좀 자세히 얘기해 보슈!" 백영철이 초조해 할수록 김씨는 능글맞았다. "자세히구 자시구, 그뒤부턴 모두 들은 얘기구...... 옳지 저 친구 저기 와 있군. 저 박씨가 바로 당사자니까!" 주막 주인 김씨는 저쪽 구석에 혼자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사내를 손짓 섞어 불렀다. "이봐 박씨! 당신 얘길 듣구 싶어하는 손님이 있어. 당신 도깨비 얘기말야!" 박씨란 사내가 자리를 옮겨 오는 동안 백영철은 술 한 병과 안주 몇 가지를 더 시켰다. "그날, 그 등산복 차림의 손님이 주막에서 나간 것까지는 내가 얘길 했어. 그 뒤부터 박씨, 당신이 해! 당신이 봤다는, 사람 죽은 얘기 건 말야!" 주막주인은 박씨의 등을 툭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등산복 차림의 남자가 혹시 이 사람 아니던가요?" 백영철은 스즈키의 사진을 박씨에게 건네주었다. 한참 살피던 박씨는 자신 없이, "그런 것 같기두 하구 아닌 것 같기두 하구......" "어쨌든, 도깨비 얘기나 들읍시다. 그 도깨비란 뭡니까?" 백영철은 박씨에게 웃어보였다. "어디서부터 얘길 해야 좋을지......." "주인 김씨가, 당신이 외상 술 먹고 일어선 데까지 들려줬어요. 그 다음부터......" "그날도 이렇게 비가 왔습죠." 박씨는 기억을 더듬듯 눈을 감았다가 뜬 다음 얘기를 이어갔다. ......마을까지 오릿길. 멀잖은 거리지만, 비가 쏟아지는 어둠 속에선 오릿길이 아니라, 단 백미터도 걷기가 귀찮은 정도가 지나쳐 으시시해졌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킬킬거리며 귀신이나 도깨비가 들이닥칠 까닭이야 없겠지만, 오른쪽 산 능선이랑, 왼쪽 암벽 너머 으르릉대는 파도가 모두 시커멓게 웅크린 괴물같아, 취기에 젖어 있어도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신고 사안이 우르르렁, 화물차 가는 소리...... 뱃심을 일으켜 한 가닥 뽑아보지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박씨는 이런 으스스한 밤중에 이 길을 걷고 있는 게, 자기 혼자밖에 없다는 것이 아주 못마땅해 지기까지 했다. --좀 일찍 서둘걸 그랬나? 하지만 소용없었다. 후회한다고 해서 흘러가 버린 시간이 되돌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참, 그 사내는 트럭을 얻어 탔을까? 그는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우산을 고쳐잡으며, 주막에서 잠시 얼굴을 마주했던 등산복 차림의 남자가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트럭을 얻어 탔으면 좋겠지만--그렇지 않다면 꽤나 고생을 하겠다는 게 마음이 쓰였다. 어쩔 수 없을 만큼 속옷까지 흠뻑 젖어 버렸을 때야, 국도에서 T자로 꺾어지는 곳에 다다랐다. T자로 꺾어, 농로(農路)를 따라 곧장 가면 마을,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눈앞이 어느 정도 밝아진 것 같이 느껴진 박씨는 어깨를 피면서 주위를 살폈다. 저만큼, 국도 한복판에 이상한 덩치가 보였다. --뭘까? 생선 짝이라면 좋겠는데. 한적한 국도를 과속으로 달리는 트럭들이 가끔, 커브 길에 물건을 떨어뜨리는 수가 있었다. 그것은 생선 궤짝일 때도 있었고, 얼토당토 않는 쇠뭉치--기계 부품 상자일 때도 있었다. 박씨는 물체 쪽에 바싹 다가갔다가 주춤 물러섰다. 사람이었다. 그건. 쓰러진 사람은, 조금 전 주막에서 봤던 등산복 차림의 사내였다. --이 빗속에 잘도 자는군. 박씨는 그를 흔들어 깨우다가 멈칫했다. 촉감이 섬뜩한 게, 자는 것 같지가 않았다. 이 빗속에 길가에 쓰러진 것부터가 심상치 않은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는 남자의 가슴을 헤집고, 귀를 갖다 대며 한편으로는 맥을 짚어본다.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대신, 술에 취한 자신의 고동소리만 엄청나게 크게 들렸을 뿐이다. 심장이 뛰지 않고 맥도 없다, 이건...... 하다가 박씨는 용수철 튕기면서 물러섰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다가가서 살펴봤지만, 역시 사내는 죽어 있었다. 이마가 움푹 함몰되었고, 상반신도, 왼쪽 어깻죽지가 골절이라도 된 것같이 보였다. 출혈은 거의 없었다. 이미 비에 씻겨내려간 것일까. 박씨는 사내의 죽음을 확인하자 부리나케 마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살인이다! 살인! 사람이 죽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공포감을 떨치면서 달렸다. 박씨의 경우 '살인'이란 말은 사람이 죽었다는 뜻이지, 죽인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지 않음은 물론이었다. 박씨가 달려간 뒤 주막 쪽에서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비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달려온 것은 베이지색 포니. 포니는 사내의 시체를 지나쳤다가, 백해서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이 흥분한 박씨에 이끌려 손전등을 들고 몰려나온 것은 그로부터 1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처음엔 박씨의 말을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때때로 그는 엉뚱하고 실없는 소리로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는 히죽히죽 웃었기 때문이었다. 허지만, 이번의 박씨 형상이 너무도 심각했기 때문에, 또 한번 속은 셈치자고 마지못해 엉덩이를 일으킨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1시간씩이나 시간이 걸릴 까닭이 없었다. "허깨비를 본 게여, 취중에 비 맞으며 밤길을 걷다가......"하면서 끝까지 꿈쩍 않는 사람도 몇몇 있었다. 현장에 다다른 사람들, 이리 저리 손전등을 앞세워 찾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시체가 있었다는 곳에는 박팔도가 내팽개친 비닐우산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가 너무 늦게 온 바람에......" 험상궂어진 마을 사람들의 눈총이 자신에게 쏠리자, 박씨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럴 턱이 없다. 내 손으로 분명히 맥까지 짚어 봤는데! 또 끔찍하게 함몰된 이마의 상처가 그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절대로 허깨비를 본 건 아니야! "그래, 그 동안을 못 참아 시체가 제발로 묘지라도 찾아 나섰다는 겐가, 뭔가?" 마을 사람들은 박씨를 밀치면서 돌아섰다. 그들의 투덜대는 소리를 등뒤로 박씨는 그 일대를 다시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시체는 역시 없었다. 정말 허깨비를 봤나? 박씨가 힘없이 발길을 돌렸다. --박씨는 얘기를 끝내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썩 문질렀다. 마을 사람 누구도 상대해 주지 않았던, 그 날 밤의 얘기를 처음으로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동안 온몸의 힘이 쭉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겨우 자기를 믿어주는 사람-- 그것도 넥타이를 멘 점잖은 외지 사람을 만났다는 게 더 없이 신이 나서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잊지 않고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당신이 현장을 확인한 다음, 마을 사람들을 부르러 갔다 온 사이에 시체가 없어졌다는 얘기로군!" "그렇습죠. 하지만, 그 등산 차림의 사람은 분명히 그 자리에 숨져 있었죠. 아마 트럭, 그래요. 트럭에라도 치었던 게 분명해요!" "어떻게 트럭에 치었다고 딱부러지게 말할 수 있어? 당신이 본 것처럼......" "그건,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그 사람이 트럭을 얻어 탈려고 했던 것, 또 그날 그 시간에 이 앞으로 지나간 차는 그 트럭밖에 없구...... 차에라도 치이지 않았담, 멀쩡했던 사람이 길바닥에 이마가 터져 죽었겠어요?" "과연! 그럼 혹시 그 트럭 번호 기억하고 있어?" 백영철은 별 기대없이 반사적으로 물었다. "번호라...... 순서는 틀릴지 몰라도 숫자는 기억하고 있죠." "어떤 숫잔데?" "389에 짓고 네끗.... 그러니까 3489였죠. 분명히......" "3489 ?" "순서는 틀릴 거예요. 난 자동차 번호판만 보면, 짓고땡을 하는 버릇이 있으니까, 그렇게 기억된 숫자들입죠." 백영철은 수첩에 "경북 3489"를 적으면서 트럭의 형태를 물었다. "요즘, TV에 선전하고 있는 국산트럭. 그렇죠! 개울이든, 산길이든 힘차게 달리는 그 트럭이죠." "혹시, 그 사람 말투가 이상했다든가 한 건 없었나요?" "그러고 보면...... 김씨 --주막 주인입죠, 김씨가 간첩이 아니냐구 한 건 기억이 나는데요!" "간첩?" "네. 조금 말씨가 뭐랄까...... 그래요. 말을 한다기보다 읽는다는 느낌이 들었었죠! 네!" 어느새 다가 온 주막 주인 김씨가 말을 이어갔다. "......그것보담, 이 친구가 도깨비를 본 이튿날 또 자살 소동이 일어났습죠! 여기서 훨씬 남쪽이긴 했지만--." "자살소동?" 백영철은 어느새 얘기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습죠, 자살소동이 있었습죠. 무슨 서울의 사업가가 부도를 내고 도망을 다니다가 벼랑에 몸을 던졌다든가......" "그게 그 이튿날이었나요? 분명히?" "틀림없죠! 암 틀림없구 말구요. 경찰관두 몰려 갔구, 장례손님들도 몰려 갔으니까요!" 백영철은 앞에 놓인 소주잔을 단숨에 쭉 들이켰다. 박씨나 주막 주인 김씨의 말이 사실이라면--그들이 거짓말을 할 까닭도 없지만--길거리에서 사라진 시신과 자살사건은 같은 선상(線上)에서 설명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백영철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비는 더욱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여보 주인! 그 자살 소동이 있었다는 곳은 여기서 얼마나 떨어진 곳인가요?" "남쪽으로 쭉 내려가면...... 글쎄 한 십리나 이십 리쯤일까?" 김씨는 자신 없는 투로 박씨 쪽을 건네다 봤다. "글쎄, 그쪽으론 통 발걸음이 없으니까...... 멀어도 오십 리 안쪽이겠죠! 뭐." --포항과는 다시 사 킬로나 이십 킬로쯤 가까워지는구나! 백영철은 그 자살 현장이 보고 싶었다. 필요하면 현지 경찰을 찾아 당시의 사건 기록까지 뒤져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비가 쏟아지고 있고 게다가 밤도 꽤나 깊어져 있었다. "여보 주인장!" 백영철은 마음을 굳힌 다음, 저만큼 부엌으로 돌아선 김씨를 불러세웠다. "주막이라면, 잠 손님두 물론 받겠지?" "받다 마다요! 술만 팔아 준다면......" "그럽시다. 소주랑 안주랑 새로 한 상 차려 내오슈. 그리고 같이 마십시다. 기왕이면 모두 닫아 걸구......" "손님이 가게 전세 내시려우? 김씨는 신바람이 나서 받아넘겼다. 현장을 거쳐 관할경찰서에 들러 사건기록을 확인한 백영철은 맨 먼저 강연숙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S신보 주간부 기자라고 했던 강연숙이가, 언젠가 자살사건의 의문점을 제시하면서 베테랑 수사관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느냐고 찾아왔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연숙이가 주장했던 의문이 자살 사건이 바로 북두산업 김칠성 사장 사건--백영철이가 막 경찰 기록으로 확인한 것과 같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백영철은 기록을 되돌려 준 다음 경비 전화를 빌렸다. 현계환씨는 자리에 있었다. "어디야? 지금......" "아직 K십니다. 그것보다 일본대사관 하야시 참사관에게 연락좀 해주십사구요!" "무슨 일루?" "스즈키라는 사람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필요합니다!" "패스포트만으로 안 된다는 말이로군! 그럼 지문 같은 것은 어떨까?" "그것도 좋지만...... 경우에 따라선 지문을 채취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치열(齒列)같은 것이라두...... 만약 그가 치과엘 다녔다면 말입니다." "다녔더래두 일본 동경에 있는 치과겠지! 서울이 아니구......" "물론입니다!" "알았어! 지급으로 준빌 시키지! 지문채취가 안될 경우라면...... 최악의 사태인가?"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뭔가?" "경우에 따라서는 묘를 한 곳 파헤쳐야 할지 모릅니다. 그것까지 손을 써 주셔야 합니다." "묘라니?" "죽은 사람 묻은 곳--산소 말입니다!" "음!" 현계환씨는 한참 침묵을 지켰다. 너무 느닷없는 소리를 했나 하고 백영철이 망설이고 있을 때 현계환씨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몇 시까지 올라 올 수 있겠는가?" "지금 곧 출발 예정이니까......" "알았어! 5시까진 올라와 줬음 좋겠어! 묘를 파헤치는 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알았습니다!" 백영철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톨게이트를 벗어나자 백영철은 현계환씨에게 전화를 했지만 자리에 없었다. 외부 회의에 출석했다고 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수첩을 뒤적여 김칠성 사장 미망인--황인희 여사에게로 다이얼을 돌렸다. 전화번호는 K시 경찰 기록을 보면서 메모해 두었던 것이다. 황여사는 집에 있었다. "김칠성 사장의 친구입니다. 늦었지만 조문을 드리러 찾아뵐까 합니다만......" "어머, 그러세요? 하지만 한 달 전에 돌아가셨는데...... 집으로 오신다고 해도 따로 빈소가 있는 것두 아니구......" 황여사의 말을 거절한다기보다는 민망해하는 투였다. "지금 바로 찾아 뵙겠습니다. 신촌의 Q아파트 11동 708호 맞지요?" "네, 하지만......" 백영철은 망설이는 황여사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백영철은 708호의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조금 전에 전화했던 백영철입니다!" 백영철의 대답과 함께 아파트문이 열리면서 낯선 남자가 나왔다. 그 뒤를 이어 나온 중년의 여인-- 백영철은 황인희 여사라고 직감했다. 두 사람의 얼굴은 조금 상기해 있었다. "그럼,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간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그때 좋은 대답 주시기를......" 남자는 정중하게 인사를 한 다음, 백영철에게 힐끗 눈길을 던지면서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 백영철은 황여사가 안내하는 대로 거실 소파에 자리했다. "느닷없이 불쑥...... 미안합니다. 축객을 한 것 같아서......" "아니예요. 오히려 때맞춰 잘 와 주셨어요! 그렇지 않음, 저 사람 언제 일어섰을는지......" 황여사는 가정부에게 차를 시킨 다음 자리를 고쳐 앉았다. 중년이라곤 하지만, 홈드레스의 우아함이 잘 어울렸다. "참, 김사장의 친구 분이시라고 하셨죠?" "네. 칠성사장의 일, 무어라고 말씀드려야 좋을는지...... 워낙 뜻밖이어서......" 백영철은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어머, 새삼스레...... 벌써 잊어 버려도 좋을 만큼 오래된 일인데......" "이거, 송구스럽습니다. 그 동안 좀 해외에 나가 있느라구 이제야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인께서 너그럽게 봐 주십시오." "어머, 그렇게 말씀하심 이쪽이 오히려 몸둘 바를...... 해외라면, 교포세요?" "아닙니다. 그냥 출장이었죠!" "죽은 김사장이 보기 보단 해외 친구가 많았나 봐요. 지난 번엔 젊은 미국인이--그래도 얼굴은 한국 사람이었지만--찾아왔다 갔었죠." "워낙 원만했던 분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김사장 산소는 어딥니까? 찬 술이라도 한 잔 올리고 싶습니다만......" 백영철은 조심스레 황여사를 건네다 보며 말했다. 황여사가 뭐라고 입을 열려고 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마침 차를 들고나오던 가정부가 전화를 받으려는 것을 황여사가 재빨리 제지하는 것을 백영철은 놓치지 않았다. 그렇지만, 황여사가 전화를 받는 것도 아니었다. 전화벨은 세 번 울리고 끊겼다간 다시 울렸다. 이번엔 두 번...... "어머, 전활 받아야지!"하고 황여사가 일어섰을 땐, 이미 두 번째 울리던 벨소리가 끊긴 뒤였다. 전화는 소파 세트가 있는 왼쪽 벽의 장식장 위에 얹혀 있었다. 백영철은 수화기를 드는 황여사를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어머, 끊겼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황여사는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가 가기를 기다리던 그녀는 후크를 눌렀다가 다시 걸었다. 이 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통화중이군! 요즘 전화는......" 황여사는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이상한데...... 전화벨이 세 번 울린 다음 다시 두번...... 이쪽에서 건 것도 마찬가지로 벨이 세 번 울렸다가 두번....... 그런데 황여사는 통화중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백영철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참, 조금 전에 뭐라고 하셨죠?" 황여사의 말. "네. 김사장의 산소는 어디로 모셨냐구 물었죠." "네. 강원도, 그 양반이 몸을 던졌던 건너편 산비탈에 그냥......" "그러시다면, 아직 장례를 치루지 않으셨다는 뜻인가요?" "아니예요. 이쪽으로 운구해 와 봤자 선영이 있는 것도 아니구...... 몸을 던질 만큼 좋아했던 동해안에 그냥 모셨죠." "동해안을 좋아했나요? 김사장이?" "고향 바다죠, 그인 함경도 출신이니까! 동해바다 밖에는 고향이랄 곳이 따로 없잖아요? 남한에선!" 묘한 논리였다.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김사장을--남편을 자살한 현장 언저리에 그냥 묻어 버렸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귀찮아 아무렇게 버린 것이 아니라면..... "어떻습니까? 서울 근교 공원묘지로 이장을 해오시는 게...... 필요하시다면 친구들이 터를 잡겠습니다만--." "어머 박변호사님두 그렇게 말씀하시던데......" "박인규 변호사 말씀입니까?" "네, 잘 아세요?" "같은 김사장 친구들이니까요......" "하지만 일주기 때나 생각 할 일이에요. 지금은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 하긴 그렇다. 자살한 남편의 시신을 한두 달 사이에 다시 대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내키지 않을 일이었다. "죄송하지만...... 좀 급하게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요!" 황여사는 반쯤 일어서면서 백영철을 건네다 봤다. 그만 일어서 달라는 자세였다. "아이쿠! 너무 오래 실례를 했군요! 그런데, 아까 그 손님은 누구였나요?" 백영철도 따라 일어서면서 물었다. 얼굴을 상기 시키면서가지 만난 두사람 사이가 궁금해서였다. "네. 북두산업의 신임 사장...... 윤 뭐라구 하는 사람이에요!" "북두산업의 새 사장? 그럼 대 주주에게 인사를 온 거군요!" "인사치곤 아주 무례했죠!" 황여사는 갑자기 얼굴을 굳히면 쏴붙였다. "증자를 하겠다는 거예요. 북두산업에...... 증자에 동의를 해 달라는 거예요!" "북두산업에 증자?" "네. 그 녀석, 북두산업을 통째로 먹겠다는 생각이에요. 지금은 내가 대 주주지만, 증잘 하면, 이쪽은 투자할 돈이 없으니까, 증자한 만큼 불리해 지지 않아요? 어림없죠, 증잔!" 백영철은 황여사 얼굴에 서릿발같은 노기가 서리는 것을 읽었다. 남편의 자살 얘기를 할 때와는 딴판이었다. 아파트를 나온 백영철은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나와 도로 한쪽에 세운 다음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아까 황여사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오후 내내 집에 있을 거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냈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갑자기 외출을 하겠다고 서두는 것이 이상한 일로 느껴진 것이다. 자기를 쫓아 버리기 위한 핑계가 아니라면, 정말 갑자기 외출할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한 것이다. 정말 외출할 일이 생긴 것이라면 그 원인은 적어도 백영철 자기가 황여사와 만나고 있는 동안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전에 일이 생겨 그녀가 서둘러야 했다면 처음 인사했을 때 이쪽에서 눈치챘을 것임에 분명했다. 그렇지만 백영철은 전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다. 비록 퇴역은 했지만, 오랜 형사 경험에서 그런 눈치와 냄새에는 남 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백영철은 걸려 왔던 전화와 황여사가 걸었던 전화--벨 소리로만 끝낸 전화가 신경에 걸렸다. 한참만에 황여사가 아파트에서 나왔다. 슬랙스 차림에, 선글라스를 했지만, 황여사가 분명했다. 황여사가 초콜렛 색 포니를 발차시켜 아파트 앞 광장을 가로질러 도로로 나올 무렵, 또 한대의 자동차가 그 뒤를 따르듯이 발진했다. 백영철은 황여사의 포니를 쫓기 시작했다. 로타리를 돌아, 시장을 빠져 나왔을 때, 백영철은 조금 전 아파트 안에서 황여사를 쫓듯이 발진한 자동차가 계속 자기 차 뒤에 바싹 붙어 있음을 확인하곤 그 넘버를 메모했다. 황여사의 차는 가회동 쪽으로 접어들어 어느 병원으로 들어섰다. "張病院" 병원 입구에는 큼직한 가로 간판이 있었다. 입구에서 병원 현관까지는 꽤 넓은 주차장이 정원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황여사는 한쪽에 주차를 한 다음,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쫓아오던 자동차는 젊은 남자가 몰고 있었다. 그도 내려 병원으로 들어갔다간 곧 되돌아 나왔다. 그 젊은이의 얼굴이 백영철은 퍽 낯이 익었다고 생각하면서 망설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황여사를 기다릴 건가, 아니면 저 낯익은 젊은이를 뒤쫓아가 볼 것인가 생각하던 백영철은 차를 발진시켰다. 황여사를 기다리지도, 젊은이를 뒤쫓지도 않았다. 그는 차를 치안본부 쪽으로 돌렸다. 현계환씨가 말한 5시가 가까워 졌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황여사가 서둘러 찾아간 곳이 병원이었고, 또 그녀를 뒤쫓은 자동차는 번호를 메모해 뒀기 때문에 우선 현계환씨와의 약속부터 지키기로 마음을 고친 것이다. 더욱, 황여사를 미행하고 있다고 생각한 젊은이는 단순히 병원에 들릴 일이 있어서 우연히 같은 길을 달려 왔을지도 모르는 일이기도 했다. 현계환씨는 백영철을 몹시 기다리고 있었다는 눈치였다. 백영철이 도착한 것은 다섯시 오분 전--. 그런데도,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군!" 짜증스레 내뱉고는 자리를 권했다. "강원도에선 뜻밖에 여러 가지가 있었던 것 같군!" "네. 우선은 구름잡는 얘기가 되겠습니다만...... 그 구름이 비를 쏟을지, 그냥 지나쳐 버릴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흠! 얘기 투가 그냥 지나쳐 버릴 구름 같진 않군!" "그 것보다 제가 부탁 드렸던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탁했던 일? 그렇군! 우선 백형이 관심을 가졌던 트럭인데......" "소유주를 알아 냈습니까? 경북 도경에서?" "음! 그런데, 3489로 조합된 경북 넘버의 같은 형 트럭은 일년 전에 폐차된 차라는군!" "일년 전에 폐차? 바보같이! 그렇담, 사고를 냈다는 트럭은 뭡니까?" "가짜 번호판을 달고 있었다는 얘기지!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은 강원도 국도에서 일어났던 교통사고--시체가 증발했다는 사건은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는 것이야!" "그건 저도 짐작했던 일입니다. 때문에 스즈키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물증을 수배 해 주십사고 연락 드렸습니다만......" 백영철은 현계환씨의 대답을 재촉하는 의미에서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현직을 떠났어도, 한 번 맺어진 상 하 관계는 그렇게 호락호락 씻어 버릴 수 없었다. 때문에 말씨에도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현계환씨는, 그러한 백영철의 마음을 읽지 못 한 것일까, 말머리는 빗나가고 있었다. "스즈키라는 일본사람의 가방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궁금하겠지?" "무엇이 들어 있었습니까, 가방 속에는?" "공식적으로는 아직 열어 보진 않았지만......" 현계환씨는 말끝을 흐리면서 책상 서랍에서 대봉투를 끄집어내어 백영철에게 건넸다. "뭡니까? 이건......" "그 친구 가방 속에 들어 있었던 걸 복사 한 거야! 어딘가의 지도 같기도 해!" 백영철은 봉투 속에서 몇 장의 복사된 그림을 끄집어 내 살피기 시작했다. 등고선(等高線)같은 불규칙한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는 걸 보면, 산(山)지도 같았다. 주변에 그어진 선은 도로를 표시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주변의 지명은 모두 알파벳과 숫자로만 표시되었다. "이게 지도라면, 꽤나 중요한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 같군요!" "그렇지? 외국인이 한국의 산 지도를 그리며 쏘다녔다는 건 중대한 문제야!" "이곳, 이 지도에 그려진 곳이 어딘가 조사를 해 보셔야죠!" "이미, 지시가 내려갔어! 스즈키라는 사람이 실종된 곳이 강원도 K시라면 이 지도에 그려진 산도 그 근처일 가능성이 높아!" "그렇다면?" "앞지르지 말게! 그것보다 별일 없으면 나와 함께 저녁이나 했으면 하는데......" 백영철은 순간 망설여졌다. 우선, 일본 대사관의 하야시 참사관에게도 중간 연락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사정이 여의치 않는 것 같군! 할 수 없지. 무리를 강요할 수밖에...... 실은 일본 대사관의 하야시 참사관과 약속을 해 버렸어. 오늘 저녁에 셋이서 만나자구......" "그렇습니까? 그러시다면 기꺼이 모시겠습니다." "나보다 하야시가 더 반갑다는 투로군! 섭섭한데...... 허허허." "그런 게 아닙니다. 일순, 하야시에 대한 연락을 어쩌나 하고 망설였을 뿐입니다!" "좋아! 변명 안해도 백형 마음은 내가 잘 아니까...... 아마도 저녁에 만날 때 저 쪽에선 스즈키의 신원을 확인할 무슨 물증을 갖고 나올지도 몰라! 백형이 말했던 치열(齒列)의 X레이 필름이라든가......" "그렇게 빨리 수배가 됩니까?" "동경과 서울은 비행기로 두 시간이야! 하루에 적어도 여섯편의 항공 라인이 날고 있어!" "그렇더라도 놀랄 만큼 저쪽도 빠르게 움직인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하긴...... 헌데 그런 건 왜 필요해?" "억측입니다만, 누군가가 스즈키의 시신을 이용해서 자살을 가장하지 않았나 해서요!" "누군가는 누군가?" "부도내고 도망 다니던 중소기업 사장입니다. 누군가 하는 사람은......" "좀 자세히 얘길해 봐요!" 일어서려던 현계환씨는 다시 의자에 몸을 묻었다. 백영철은 김칠성 사장의 자살 사건과 주막집 앞의 교통사고 --피해자가 스즈키로 추정되는--를 연관시킨 자신의 견해를 간명하게 설명했다. "...... 그러니까, 백형 생각으로는 그 무덤 속의 시신이 김사장이 아니라 스즈키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로군!" "네! 때문에 스즈키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물과 묘소 검증이 필요합니다!" "백형의 추리만으로는 묘소를 검증할 수는 없어!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가능해! 묘소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유족의 승인이나 법원의 영장이 필요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검증이라고 떠벌리기보다는 이장을 한다면,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을 테죠!" "그렇다고 유가족이 선뜻 이장에 응해줄까? 집장사가 이사 다니는 것과는 다른 얘긴데......" "경우에 따라선 슬쩍 파헤쳐 볼 수는 없을까요?" "이 사람! 큰일 날 소릴 하는군!" 현계환씨는 단호하게 잘라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야시 참사관과의 저녁 약속 장소는 P호텔의 중국식당이었다. 약속이라고 하지만, 하야시 참사관이 현계환씨와 백영철을 초대한 형식이었다. 때문에 두 사람이 P호텔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하야시 참사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는 그렇게 즐거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결국 얘기를 끄집어 낸 것은 식사가 끝날 무렵, 하야시 쪽이었다. "스즈키는 이미 사망했다는 뜻입니까?" "아직은 뭐라고 단정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백형의 조사 결과로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스즈키의 치열(齒列) X레이가 필요하다고 하셨죠? 그건 다시 말해서 스즈키가 다른 사람으로 위장되어서 피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다는 얘기입니까?" "여러 가지 상황을 상상해 볼 수도 있다는 얘기도 될 수 있습니다!" 현계환씨와 하야시의 대화는 서로가 꼬리를 잡히지 않겠다는 듯이 매끄럽게 이어져 갔다. "그것보다 스즈키란 친구의 방한 목적과 정체는 뭡니까? 그의 행적에는 스파이의 혐의가 아주 짙습니다!" 현계환씨의 강경한 물음이었다. "스파이 혐의?" "네. 그는 한국의 이곳 저곳 산악지방의 지도를 그려 가며 답사한 증거가 있습니다!" 하야시는 대답할 말을 찾는지, 어금니를 주억거리기 시작하다가 입을 열었다. "스즈키의 방한 목적은 정말 모릅니다. 그는 경찰관을 거쳐 흥신소를 경영하는 사립 탐정. 한 가지 말씀 드릴 수 있는 건, 그가 사립 탐정이기 때문에, 경찰과는 현직 때 이상으로 가까운 사입니다." "정보원이란 뜻인가요?" "언젠가,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일본 야쿠자의 일부가 한국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했던 것, 기억하고 계시죠?" "마약 관곕니까?" "네! 이번 스즈키의 방한도 아마 그것과 관련이 있질 않나 생각되는군요. 그의 행방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건 야쿠자와 경찰, 양쪽입니다!" "한국과 마약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한국은 대마초에 관련된 자는 사형에 처할 수도 있는 강력한 제재 조치로 이를 예방하고 있는데......" "그렇죠.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행복한 나랍니다. 일본은 청소년만 해도 거의 5만명의 마약 상습자가 있습니다. 이들에게 마약을 공급하는 것이 조직 폭력......" 일본에는 폭력단이 전국에 2천 5백 단체, 10만명에 가까운 멤버를 거느리고 있다. 이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최대의 조직폭력단이 지난해 가을을 계기로 두 파로 분열되어 버렸다고 하야시는 설명했다. "분열되어 나간 쪽은 새로운 자금줄을 만들어야 했죠. 기존 루트는 전부 잔류파에 뺏겨 버렸으니까......" 폭력배 자금원은 섹스 산업, 도박, 고리대금, 사건 청부업, 그리고 마약이었다. 이 가운데 뭐라고 해도 주력은 마약이었다. 마약은 중세기 노예 밀매보다도 수익률이 훨씬 더 높았다. 윈에 본부를 두고 있는 유엔의 마약규제위워회를 비롯한 각국의 마약 단속기관 전문가들에 의하면 영국에는 매주 2백10만 달러치, 미국에는 자그마치 20억 달러치의 마약이 유입되어 거래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약 밀매의 적발률은 높게 잡아서 10퍼센트--전문가에 따라서는 5퍼센트로 낮게 잡기도 한다. 이는 최고의 수익률을 자랑했던 노예밀매의 적발률 33%와 비교하면 엄청난 것이 된다. 더욱 노예의 경우는 수송도중 병사(病死)에 의한 손신률을 별도로 계산해야 하지만, 마약의 경우 그럴 염려는 전혀 없다. 요는 마약은 노예밀매를 훨씬 능가하는 고수익과 안전도가 보장된 장사인 셈이다. 최대의 마약 시장인 미국의 경우 헤로인 중독자가 50만 명, 마리화나는 2천 4백만명, 코카인은 1천 7백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는 것. 일본의 경우는 미국 영국만큼은 아니지만, 마약 보급은 이미 걱정스러운 단계를 넘어서고 있는 실정이었다. 일본에 유입되는 마약의 주요 루트는 동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제국이 세계 주요 마약 밀재배지임은 이미 유명해진 얘기이다. 그곳에서 재배된 대마초와 아편은 미국의 신디케이트와 마피아에 의해 각국으로 보급된다. 일본 야쿠자들은 그들과 손잡아 마약을 거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존 루트에는, 분열되어 독립한 신생 폭력단체가 손을 내밀 틈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석에는 그들이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는 얘기가 끊기질 않고 있어요. 한국의 산은 산림 녹화 때문에 입산금지 지역이 많고, 또 한국사회 자체가 마약과 거의 관계가 없다는데 착안한 건지도 모르죠." "그 얘긴 앞뒤가 맞지 않군! 어쩐지......" 현계환씨의 말에 하야시도 동의했다. "상식적으론. 그러나 그게 취약점이 될 수도 있죠. 입산금지 지역은 그만큼 비밀이 보장된다는 것, 한국 사회가 마약과 인연이 없다는 것은 그 만큼 마약에 무관심하다는 얘기로도 볼 수도 있지요." 하야시는 거기서 얘기를 끊었다. 그 이상 설명은 필요 없었다. --스즈키는 야쿠자의 심부름꾼이 아니라, 일본 경찰과 연결된 인물이다! 하야시의 긴 설명이 끝나자 현계환씨와 백영철은 동시에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만약 스즈키가 단순한 사립탐정으로 누군가의 의뢰만으로 방한을 했다면, 하야시가 저 정도로 자세하게 마약관계를 설명할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즈키의 행방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일본의 유력자는 누굽니까?" 백영철이 물었다. "오오무라 요시요(大村吉夫). 일본정계 흑막의 한 사람입니다. 물론 야쿠자의 대부역도 하고 있죠!" "오오무라 요시요?" 백영철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귀에 익은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인가? 그 사람?" 현계환씨가 옆에서 물었다. "네!" "......결국 스즈키의 행적을 수상하게 여긴 '어느쪽'이 교통사고를 위장해서 없애 버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군요!" 하야시의 결론이었다. "조사가 끝나기 전엔 뭐라고 서둘러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겨우 그의 실종을 확인한 셈이니까 기다려 봅시다!" 현계환씨는 백영철이 K시에서 조사 보고했던 스즈키의 행적을 간추려 설명한 다음, 그가 남겨 놓았던 슈트케이스는 내일이라도 대사관으로 보내겠다고 말했다. "고맙습니다. 한가지 부탁 드릴 말씀은 혹시 한국 경찰이 이 사건을 정식으로 수사를 한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은밀하게 해 주셨으면...... 매스컴에서 떠들어 자칫 외교문제로 번져버리면 서로가 난처해질 수도 있을 테니까요!" "서로가 아니라 그쪽이죠. 난처해지는 것은......" "마찬가지 아닙니까? 한쪽이 난처해지면, 그 주름살이 상대방에게도 번져 버립니다! ......그리고 이건 스즈키의 치열 X-레이 필름과 그의 모발입니다. 유용하게 쓰여지길 바랍니다." 백영철은 얘기로만 듣던 일본의 야쿠자가 실제로는 더욱 맹랑한 것에 놀랐다. --어림없는 일이지만, 그들이 한국의 어느 구석에 숨어서 마약을 밀재배해서 만들었다 치자, 어떻게 갖고 가지? 일본까지...... 그는 현계환씨와 헤어진 뒤,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했지만, 묘안이 생각나지 않았다. 국경선이 육지로 이어진 동남아와는 달리 일본과는 바다로 이어졌고, 한국 영해 쪽의 경계체제를 생각하면, 밀반출 같은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방첩과 국방 때문에 펴고 있는 이십 사 시간 물셀 틈 없는 경비체제를 백영철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또 국내서 몇 번 있었던 마약 밀제조도 결국은 모두 들통이 났고, 뜨내기들도 오래 전에 일망타진이 된 것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정식으로 L/C를 열어 수입해 갈 까닭도 없겠구. 백영철은 하야시의 애기를 되씹어 볼수록 허황되게 생각되었다. 7. 처녀탐정 죽다 스릴을 즐기는 것도 습관이 되고 나면 지루해지는 것일까? 주옥이는 길게 길게 하품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틈, 커튼 사이로 붉게 타는 듯이 빗겨드는 저녁 햇살--서너 시간을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것이다. --어머, 벌써 저녁 때가 다 되었다! 그녀는 서둘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 저녁 식사까지는 외숙모가 모두 준비를 해놓고 떠났다. 때문에 시간이 되면, 국이나 데워서 먹든가 그것도 귀찮으면 라면으로 때워버려도 누구 하나 시비 걸 사람은 없었다. 외숙모는 시집간 딸-주옥이의 외사촌의 첫 출산에 맞춰 부산으로 떠난 것이다. 한 일주일 걸리겠지, 하고 미안해하며 주옥이에게 뒷일을 부탁하러 갔다. 요는 앞으로 일주일, 주옥이는 빈 집 지키기가 주요 임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홉시까지는, 늦어도 아홉시까진 돌아 오셔야 해요. 외삼촌!" "왜, 아홉시까지냐? 네 외숙모가 있을 때도 내 외출 시간은 밤 열시까진데......." "하여튼, 아홉시까지 안 오심, 문 잠가 놓구 나두 나가 버릴테니까, 알아서 하세요!" "문 잠그고 나가 버려? 어딜?" "10시에 약속." "너무 늦구나! 처녀의 약속으론...... 누구 하구냐?" "그건 저도 몰라요! 하지만 꼭 나가야 하는 약속이니까, 아홉시까진 들어오셔야 해요!" 딱부러지게 대답은 안했지만, 마음씨 좋은 외삼촌은 서둘러서 아홉시까지 귀가할 것임에 분명했다. 밤 열시의 약속. 지난 한 주일 동안, 주옥이는 이 약속에 모든 것을 걸고, 기다려왔다. 밤 열시, P호텔 바에서 그날, 자기를 구해서 생선 트럭에 실어 보내 주었던 장본인을 만나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약속이라곤 하지만, 사실은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쪽지에 적어 놓았던 것을 주옥이가 발견했을 뿐이었다. 엄청난 일은 쪽지가 아니라 쪽지와 함께 주옥이의 등산 백에 들어 있었던 물건이었다. 풍년 농원에서 겪었던 일이나, 생선 트럭에 실려 새벽에 용산 어시장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주옥이는 단지 큰일 날 뻔 했다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새벽 용산시장 근처 호텔에서 한숨 자고 나서 회사로 전화를 걸었을 때는 그게 아니었다. 조금 출근이 늦어지겠다는 연락을 하기 위해 문희경에게 건 전화였다. "어머, 언니, 어디 계세요?" 전화에 나온 문희경은 호들갑을 떨었다. "별일 없지? 나 좀 늦어지겠어!" "어머, 그래요? 시골집에 무슨 일이 생겼나요?" "시골집에?" "네. 아침부터 시골집이라면서, 언니 찾는 전화가 뻔질나게 걸려 왔거든요! 하숙집에도 없구해서 난 언니가 바로 내려갔나 했었죠!" "......." 주옥이는, 이건 이상하다고 재빨리 머리를 회전시켰지만 시골집에서, 그렇게 급하게 자기를 찾을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혹시 어머니라도 죽었으면 몰라도...... 아직 사십 대니까 그럼 염려는 없었다. "언니, 무슨 일이에요?" "응, 그래 내 정신 좀 봐! 아빠가 위독하시다나 봐! 그래서 시골 다녀올까 하니까, 그렇게 연락 좀 해줘! 결근계도 내주구...... 부탁해!" 그리곤 시골집으로 전활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다음 하숙으로 전화를 건, 주옥이는 깜짝 놀랐다. 새벽같이 시골에서 오빠가 올라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하숙집 아주머니의 얘기였다. --장녀에게 무슨 오빠람! 주옥이는 전화를 끊고 생각에 잠겼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설마! 그녀는 풍년농원에서 자기를 우악스럽게 다루었던 그 건장한 사내들을 생각해낸 것이다. --그들 이외에, 나를 새벽같이 찾아다닐 사람들은 없다고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되게도 빠르게, 그들이 움직였다고 감탄했다. --이번에 붙잡히면, 정말 넝마조각이 되어 버릴지 모른다! 그녀는 혼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새벽에 곧장 하숙으로 돌아가지 않고 호텔에 든 것과 그리고 늘어지게 늦잠을 잔 게 참으로 다행이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게 운이 트이기 시작한 징조일지 몰라! 내손으로 김칠성 사장 도산 진상을 파헤치게 될지도 몰라! 그녀는 툭 털고 일어서서 다이얼을 돌렸다. "외삼촌이우? 주옥이에요. 어머, 제 전화, 싫으세요? 그것보다 저 좀 숨겨 주시겠어요? 그래요, 저 정도의 미인이 되고 보면, 남자들이 목숨을 걸고 덤벼들기 때문에 자칫하면 위험해 질 때가 많아요! 네. 여기 용산호텔. 삼백이 호실이에요. 와 주시겠어요? 어머, 호텔비도 갖고 와 주시면 더욱 고맙구요!" 전화를 끊은 주옥이는 이미 평상시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전직이지만, 형사집에 있으면, 더 이상 안전할 수가 없고, 또 백영철씨가 주옥이의 외삼촌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렇게 해서, 외삼촌집의 식객이 되었다. 외딸을 결혼시켜 내 보내고, 단 내외만 살고 있던 외삼촌 부부는 오히려 진작 와 주지 않았던 것을 서운해하면서 주옥이를 반겨 주었다. "그럴 일이 좀 있어서요!" 하는 주옥이의 대답에 외삼촌이나, 외숙모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게 무엇보다도 고마웠다. 실은, 몇 번이고 외삼촌에게 진상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그럴 때의 도움은 결국 경찰의 힘을 뜻하기 때문에 주옥이는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쪽지에 적혀 있는 대로 오늘밤 10시 P호텔 바에서 만나자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는 비밀로 해두고 싶었다. 그를 만난 뒤에 외삼촌과 상의하는 게 훨씬 구체적일 수도 있고, 또 만나자는 사람의 의향도 확인해 봐야겠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하든, 오늘 만나자고 한 사람은 풍년농원의 그 살벌했던 창고에서 자기를 구해준, 말하자면 생명의 은인이 아닌가. 그런 사람의 의향을 무시해 버릴 생각은 전연 없었다. 주옥이는 그런 생각은 닷새 전에 쪽지와 함께 엄청난 물건을 자기 책에서 찾아냈을 때 굳혀진 것이다. 닷새 전, 당장 갈아입을 옷이 궁해진 그녀는 쌕 속에 구겨넣은 화장품 케이스 속의 예금통장을 찾기 위해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짐이라야 등산 쌕 하나지만, 그 속에는 잡다한 것이 몽땅 들어 있었다. 화장품, 예금통장, 장신구, 메모 수첩, 읽고 있던 소설, 그리고 내의 나부랭이. 혼자 사는 것이 몸에 밴 그녀는 항상 그런 정도는 갖고 다녔다. 우선 돈을 얼마쯤 찾아서 옷을 사야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쌕의 지퍼를 열자마자 눈이 휘둥그래질 만큼 노라 버렸다. "어머, 예쁘기도 해라!" 거기엔 자그마한 아기곰의 봉재 인형이 들어 있었다. 전화통 만한 앙증맞게 만들어진 앉아 있는 아기곰이었다. 아기곰과 함께 자그마한 깡통이 2개, 그리고 급하게 갈겨쓴 메모가 있었다. "토요일 밤 10시 P호텔 바, 파라다이스로 이걸 갖고 나오도록. 그때까지 아무에게도 얘기 말길. 몇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으니까, 부디 조심하길." 메모 내용은 앙증맞는 곰의 인형과는 어울리지 않게 살벌했다. 깡통은 텔레비전 CM에 자주 등장하는 납작하게 생긴 기침 약통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통을 열어 보았다. 한쪽에는 잘게 부셔진 마른 풀잎이 가득 들어 있었고, 또 한쪽에는 흰 가루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흰 가루가 든 쪽을 흔들어 보았다. "이 소리도 아니구, 저 소리도 아니구......." 그녀는 T.V CM 흉내를 내면서 쿡쿡 웃다가 갑자기 긴장으로 몸이 굳어져 버리는 걸 느꼈다. --혹시....... 그녀는 마른 풀잎과 흰 가루를 조금씩 들어내어 따로 싼 다음, 화장품 케이스에 넣었다. --요며칠, 수면 부족인가 봐! 주옥이는 계속 터져나오는 하품을 깨물다가 전화기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낮잠을 포함해서 하루 열두 시간씩 자는 터에 수면부족이란 당치도 않은 소리. 할 일이 없어 늘어난 게으름이 하품을 몰아다 줬을 뿐이지만, 그녀는 절대로 자신이 게을러졌다고 생각지 않았다. 협박 속에 쫓기고 있는 몸이기 때문에 숙면을 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 할 뿐이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외출이라곤 딱 한 번, 은행 예금을 찾아 옷가지를 사러 나갔다 왔을 뿐이었다. 그때, 길거리의 선글라스를 낀 모든 남자, 체구가 큰 모든 남자, 인상이 험상궂은 모든 남자가, 자기를 쫓는 사람들일지 모른다고 긴장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기대했던 소란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이 잊어버린 겐가? 하지만, 쌕에 들어 있었던, 엄청난 물건이랑, 산에서 겪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그럴 리가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전화는 벨만 울렸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벌써 퇴근 시간이 되었남? 하고 시게를 보던 그녀는 오늘이 토요일임을 깨닫는다. --회사엔, 뭐 별일 없겠지! 어저께도 미스 문과 통활 했으니까....... 그녀는 수화기를 제자리에 놓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여직원 한 사람, 결근을 계속 한다고 해서 별일이 생길 정도의 회사는 아니었지만, 항상 그 쪽에 신경이 쓰였다. 회사 일을 묻는 핑계로 혹시 자기를 찾는 낯선 손님이 없었나를 탐색하기 위해 그녀는 거의 매일 전화를 했었다. 외삼촌--백영철씨가 귀가한 것은 여덟시 반경이었다. "난, 저녁 먹었지만, 넌?" "어머, 일찍 오셨네! 저녁이라며 저도 먹었어요!" 주옥이는 이미 외출 준비를 끝낸 채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이로구나! 밤 열시 약속이란......." 백영철씨는, 다 큰 조카딸의 밤외출에 자신의 얼굴이 붉어지려는 걸 감추기 위해 쩔쩔매는 것같이 보였다. "어머! 싫어요! 외삼촌, 알고 보니까 좀 저속하시네요!" "저속하다니요?" "밤외출이란, 한 가지밖에 생각 못하시는 거죠!" "그럼 뭐냐?" "아주 중요한, 어쩜 외삼촌 힘을 빌려야 할 일이 있을지도 몰라요!" "나에게?" "네! 그래도 외삼촌은 형사였잖아!" "또 그래도 형사냐?" "그럼요. 그래도는 훈장 아니예요?" "훈장? 좋았어! 그런데, 오늘 낮에 정진대가 날 찾아 왔대구나!" "정진대? 풍년의 정진대 말씀이에요?" "그래!" "왜요? 그 사람이 왜 외삼촌을 찾아 다녀요?" "그 녀석, 달고 다니는 별 여섯개 가운데 세 개는 내가 달아 준 것, 지난번에 얘기했지?" "별 세 개를 달아 줬어요? 그건 무슨 말씀이에요?" "전과횟수야, 별이란. 그 녀석 금고털이로 전과 육범, 그 중 세번은 그래도 형사한테 잡힌 게야!" "왜 찾아왔대요? 설마 어젯밤에 또 금고를 털었으니까, 별을 달아 주시오 하고 찾아온 건 아닐테구......." "그냥 들렸다는 게야. 신수가 말끔해 졌더군. 한 밑천 잡게 되었으니까, 지난 날 은혜를 갚을 날두 멀지 않았다면서 찾아 왔더구나!" "은혜 갚는다는 말, 어쩐지 협박처럼 들리네요!" "때로는...... 하지만 마음 고쳐먹은 전과자는 이쪽에서도 따뜻하게 대해 줘야지!" "그 사람이 마음을 고쳐 먹었다구요?" "발끈하지 마! 내가 풍년 농원은 잘 되느냐구 넌지시 물어 봤지." "그랬더니요?" "집어 치웠다더군! 옛날에 워낙이 그린벨트에 묶인 화전민 마을을 속아서 샀다는 게야!" "거짓말이에요! 그 사람!" 주옥이는 앙칼지게 소리를 지르고는 자신이 거처하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일주일 전에 그곳에서 자칫하면 넝마조각처럼 짓밟힐 뻔했었는데, 옛날에 농장을 집어 치웠다니! 그녀는 거울 앞에 앉아서,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약이 오르거나, 긴장했을 때의 그녀의 버릇이었다. --설마, 그 녀석이 날 찾느라고 외삼촌 사무실에 들른 건 아니겠지! 아니 그것보다 오늘 밤 열시에 만나자고 쪽지를 갈겨쓴 이가, 설마 정진대는 아니겠지! 생각이 엇갈려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윽고 그녀는 연필과 종이를 찾아 방바닥에 엎드려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도로변의 주막과 거기서 다시 남쪽으로 국도를 따라 삼사 킬로쯤 내려간 곳의 경북--강원도 접경까지는 쉽게 기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접경지역 오른쪽의 산속에서의 기억은 전연 믿을 것이 못되었다. --할 수 없지 뭐! 난 그때 지형 조사하러 간 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국도의 오른쪽 적당한 곳에 동그라미를 쳐서 풍년농원이라고 써넣었다. 국도에서의 거리와 정확한 방향은 물론 몰랐다. 그런 다음 적당히 개울을 그려 놓고는 트럭 통행가능이라고 써 놓은 다음, 밖으로 나왔다. "외삼촌, 여기예요. 풍년 농원은...... 그 사람 거짓말이란 건, 여길 가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사나운 사내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에요! 그런데도 옛날에 집어치워요?" "네가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갔다 왔거든요! 지난 주말에. 덕분에 이렇게 외삼촌댁에 신셀 지게 되었지만......." "네가? 풍년 농원엘? 얘, 자세히 좀 얘기해라! 그냥 보통 등산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갔다 와서 말씀드릴게요. 어머, 벌써 아홉 시가 지났어요!" "오늘 약속이란 것도, 그럼 정진대와 관계가 있는 일이야?" "모르겠어요. 가보기 전까지는......." "그렇담, 내가 동행하지!" "아서요 외삼촌! 다큰 조카딸이 보호자 달고 외출해서 망신당하게 하지 말아 주세요!" 주옥이는 장난스레 혀를 낼름 내밀어 보이곤, 쾌활하게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호텔 앞에서 택시를 내린 주옥은 시계를 봤다. 아홉시 오십분. 약속 시간까지는 충분했다. 설사 고층호텔, 맨 위층에 바가 있다 하더라도 엘리베이터로 십분씩 걸릴 까닭은 전연 없었다. 고장이라도 나기 전에는--하고 생각하던 주옥이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호텔로 들어섰다. 그녀는 프론트 쪽의 안내표지판을 찾았다. 바 파라다이스는 지하 2층이었다. 그녀는 로비 한쪽 구석 소파에 앉아 주위를 둘러봤다. 밤이 깊어지기 시작한 탓일까, 로비는 한산했고, 드나드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수상하게 뵈는 사람도, 또 그럴듯하게 뵈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다시 시계를 본 다음 일어서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다. 여러 대의 엘리베이터 가운데, 지하 전용은 맨 구석쪽에 있었다. 그녀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혹시 누군가가 뒤따르지 않나, 하고 몹시 신경을 썼다. 그래서 택시로 이십 분이 안 되는 거리를, 몇 번씩 바꿔 타면서 가까스로 온 것이었다. 다행히, 주옥의 걱정은 빗나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겨우 안도의 숨을 몰아쉬고는 지하 2층에서 내렸다. 바 파라다이스라는 화살 표지를 따라 복도를 걷는 그녀는 우뚝 서고 말았다. 내부수리중과 CLOSED라는 팻말이 바 파라다이스 문 앞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어쩐담? 그녀는 짜증스레 시계를 들여다본다. 열시 이분 전. 상대방이 먼저 왔다가 가 버렸을 리는 없었다.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생가한 그녀는 주위를 살폈다. 두꺼운 카페트가 깔린 복도의 침침한 조명. 여자 혼자 기다리기엔 절대로 적당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쇼핑백을 밖에 놓고, 벽에 기대어 섰다. 앙증맞은 아기곰 인형이 보기보다는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기다린담? 그녀는 차츰 짜증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숙녀가 내부 수리 중의 술집 앞에 멍청히 서 있다는 건, 아무리 봐도 아름다운 것이 못 된다는 것, 상대방이 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 등이 뒤섞여 짜증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훌쩍 나가 버리기에는 너무 허전해 지는 것이었다. 지금, 그를 기다리지 않고 훌쩍 나가 버리면, 두 번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져 버린다는 생각이 그녀를 감쌌다. 그를, 얼굴도 모르는 그를,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해서 특별히 이쪽이 아쉬워 할 것은 없지만, 그러나 풍년 농원의 진상이나 정진대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선, 그를 기다리는 것 이외엔 지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젠장, 닫혔군! 현범은, 바 파라다이스 앞에서 어깨를 으쓱 올려 보이고는 휙 돌아섰다. 어쩌면 오늘밤은 이곳 마담을 안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잔뜩 기대했던 것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마담과는 몇 번 마시러 온 사이에 친해졌다. 극히 육감적이고, 어떻게 보면 백치미(白痴美)가 곁들여 있는 여인이었다. --젠장, 그 여자 복도 되게 없군. 현범이는 자신의 실망보다 마담 걱정을 했다. 그는 자기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만으로도 여자들에겐 복이 된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특히 그의 헌팅이 거절당했을 때는 더욱 그랬다. 돌아선 현범은 저만큼 복도 모퉁이에 서 있는 여인이 눈에 띄었다. 스물 대여섯쯤의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 옆에는 쇼핑백이 놓여 있었고, 한쪽 손에 들고 있는 핸드백이 무겁게 처져 있는 것같이 보일 만큼 그녀의 분위기는 지쳐있었다. 하지만 이쪽으로 쏟고 있는 눈빛은 강렬했다. 아마도 자기가 여기에 왔을 때부터 주욱, 저런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라고, 현범은 생각했다. 그는 한쪽 손을 들어 올려 아는 체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안녕하셨어요?" 여인은 주저없이 인사를 건네며 현범에게로 다가왔다. "공교롭게도 쉬는군요. 파라다이스는......." "그래요. 파라다이스도 내부수리를 해야 할 만큼 세상이 복잡해진 거겠죠!" "재미있는 아가씨로군! 여기서 내부수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시겠어요? 아니면......." "좋은 곳이라두 있나요?" "저쪽 편에 디스코 텍이 있죠! 보세요. 야단스런 밴드 소리......." "어머, 정말!" "어때요? 함께 가실까요?" 현범이는 가볍게 여인의 어깨에 팔을 들렸다. --이 사람일까? 그렇담 나이가 너무 젊은데...... 그때 트럭 운전사는 중년이라 했는데....... 주옥이는 잠시 망설이면서 시계를 봤다. 열시 십분. 어쩌면, 이 사람이, 그 사람의 대리인일지도 모른다고 주옥이는 생각했다. 설령, 이 젊은 남자가 전연 엉뚱한 사람이라 치더라도 함께 디스코 텍에 가보는 것도 괜찮을지 몰랐다. 약속한 사람이 늦어져 이곳에 오더라도, 바 파라다이스가 내부수리중이라면, 한 번쯤 디스코 텍에 들려 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이 침침한 복도에서 멍청하게 기다리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좋겠다고 결론을 내린 주옥은 남자가 권하는 대로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 바에 자주 들리세요?" "아뇨. 자주 들렸다면, 이렇게 헛걸음은 않았겠죠! 참, 난 조라고 합니다만......." "박이에요!" "이렇게 만나는 것도 나쁘진 않군요. 파라다이스의 수리 덕분에......."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홀을 지나, 디스코 텍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들이 막 엘리베이터 홀을 지나쳤을 때, 엘리베이터가 멎으며, 중년의 여인이 서둘러 내렸다. 중년 여인은 두 사람의 등쪽으로 눈을 돌렸다간, 바 파라다이스 쪽으로 빠른 걸음을 옮겼다. --어머! 쉬는군. 중년 여인은 바 앞에서 망설이다간 돌아서서 디스코 텍 쪽으로 향했다. --이 나이에 디스코라니...... 누가 봤음 웃겠다! 중년여인은 조금 멋쩍어 하면서 홀 안으로 들어갔다. 찢어지는 듯한 밴드 소리. 그리고 순간 순간 번쩍였다간 꺼지는 조명. 그 사이에 뒤섞인 젊은이들의 기성(奇聲)--. 각오는 했지만,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치자 중년 여인은 현기증이 났다. 가까스로 몸을 가누고 있는 그녀에게 웨이터가 다가왔다. "입장권은 저쪽에서 팔고 있습니다만......." 웨이터는 혹시 잘못 들어온 게 아니냐, 장바구니 카바레와는 번지수가 다르다는 듯이 묘한 제스처로 입을 열었다. "입장권이 필요하나요? 이곳은......." 중년 여인은 핸드백에서 잽싸게 만원짜리 지폐를 몇 장 끄집어내어 웨이터에게 쥐어 주면서 빠르게 얘기를 이었다. "이걸로 입장권 사다 주구...... 부탁이 있어요." "뭡니까? 손님!" "조금 전에 막 두 남녀가 입장했었죠? 그렇군요. 여자는 소핑백을 들고 있었고......." "아, 네. 알고 있습니다." "내 자리를, 그 사람들 가까운데 잡아 줄 수 없어요?" "아니, 그건 곤란해요. 그들에게 알리고 싶진 않아요......." 웨이터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손님,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곳에서 소란스런 일이라도 일으킨다면......." 여인은 다시 만원짜리 지폐를 웨이터에게 집어주었다. "오해하지 말아요! 여자아인 제 딸이에요. 사귀는 남자가 어떤 앤가, 한 번 따라 다녀 보자는 것뿐이에요." "그러시담......." 두 번째 집어준 돈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중년여인의 설명에 납득이 갔는지, 여하튼 웨이터는 중년여인을 홀 안쪽으로 안내했다. "이 자리는 어떠실지......." 웨이터는 주옥이와 현범이가 막 맥주잔을 맛들고 있는 테이블 옆자리에 중년 여인을 안내했다. 다행스럽게도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엔 관엽식물 화분들이 놓여 있어 안성마춤이었다. "티켓엔 맥주 한 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더 필요한 게 있음 십 이번을 불러 주세요. 제 넘버입니다." "고마워요!" 여인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웨이터를 보내고는 어깨를 낮추어 옆 테이블 쪽으로 신경을 쏟았다. --이 청년은 전연 엉뚱한 사람이다. 맥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던 주옥이는 결론을 내렸다. 여행중인 한국계 미국인. 이 호텔의 장기투숙객. 이것이 주옥이가 들은 청년의 신원이었다. "룸 넘버는 1357. 오늘밤이 마지막입니다만......." "혼자신 것 같군요. 미스터 조는......." "네. 어떻게 아셨죠? 독신이란 표가 나나요? 내 얼굴에......." "아뇨. 어쩐지 방 번호가 홀수 투성이어서, 한번 물어봤을 뿐이죠!" "과연. 하지만, 홀수방에 짝수가 잠을 자도 괜찮을 거예요!" "보기보단, 능글맞네요!" "때로는...... 한바탕 땀을 흘려 볼까요?" 주옥이는, 현범이가 권하는 대로 자리에 일어섰다. 그렇게 넓지 않는 플로어엔 이미 그런 대로 차 있었다. 두 사람은 리듬에 맞추어 몸을 흔들며 플로어의 앞쪽으로 나갔다. "디스코, 잘 추는군요!" "미스터 조가 더 잘 추시네요!" 주옥이는 참으로 오랫만에 나이에 맞게 젊어진 기분을 느끼면서 몸을 흔들었다. --그 사람, 과연 왔을까? 아님, 무슨 일이 있어 못 오게 된 걸까? 몸을 흔들면서도 주옥이는 입구 쪽으로 연상 눈길을 주었다. 그러면서, 갑자기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감시당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테이블에 앉아서 맥주를 마실 때부터 느꼈던 것인데, 이렇게 몸을 흔들고 있으니까,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미스터 조는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싸워 본 적 있으세요?" "유감스럽게도...... 하지만 각오는 언제든지 되어 있죠!" "오늘밤, 저를 위해 실천해 보시겠어요?" "기꺼이! 누굽니까? 미스 박을 못 살게 구는 건......." "지금 나타났어요! 조심하세요!" 주옥의 말에 현범은 방향을 돌려 입구 쪽을 봤다. 건장한 사내 셋이 입구에서 웨이터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 친구들인가요?" "네." "누구예요? 저 친구들!" "모르겠어요! 우리 아버지예요! 삼촌과 오빠두 함께예요!" 말을 맺기 전에 주옥이는 목에 걸고 있던 서브 백에서 로커의 팻쪽을 끄집어내어 현범에게 쥐어 주었다. "아까 맡겨둔 내 백 표예요, 멋지게 넘어지세요!" 짧게 말을 끊은 주옥이는 현범이를 힘껏 밀어 제치고는 무대쪽으로 뛰어 올랐다. 동시에 입구쪽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던 세 사내들이 쓰러지는 현범에 걸려 넘어졌다간, 벌떡 몸을 날려 주옥이를 뒤쫓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주옥이가 한 걸음 빨랐다. 사내들이 무대쪽으로 뛰어갔을 땐, 이미 주옥이는 없었다. 그것보다 장내는 삽시간에 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주옥이에게 떠밀린 현범이는 플로어에 길게 뻗어 버렸다. "멋지게 넘어져 주세요!" 하는 주옥이의 말뜻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몸의 균형을 잃은 뒤였고, 멋지게 넘어지기 위해 몸에 힘을 준 것이 불행했다. 그는 무대 가장자리에 후두부를 세게 부딪치면서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뻗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곧 정신을 되찾았다. 그가 정신을 되찾는 것과 동시에 자기의 오른손을 누가 스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가까스로 일어섰다. 그리고, 오른쪽 손에 쥐고 있던 로케 팩쪽이 없어진 걸 깨달았다. 저만큼 입구 쪽에선, 어떤 여자가 카운터로부터 쇼핑백과 핸드백을 받아들고 있었다. "잠깐!" 현범이는 여인쪽으로 몸을 날렸지만, 한 걸음 늦었다. 여인이 엘리베이터 속으로 빨려들 듯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는 계단쪽으로 뛰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에게 허리를 잡혔다. "손님, 도망가면 어쩝니까? 이쪽 손해 배상도 생각해야죠!" 웨이터들이었다. "내가 뭘 어떻게 했길래?" "동반했던 여자손님 때문에 다 망가진 것, 모른 척 하실거요?" 웨이터의 눈빛은 사나웠다. 주옥이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백영철씨는 몇 번이고 혼자 혀를 차면서 커피를 끓여, 아침 식사 준비를 했다. --다 큰 처녀가 태연하게도 외박을 하는군! 어떤 얼굴을 하고 들어오나, 그것 볼만하겠군. 어젯밤엔 자정까지 기다렸지만, 전화도 없었다. 새벽까지 돌아오겠지, 했으나 보기 좋게 빗나갔다. --조카였기에 망정이지, 내 딸이 저랬다간, 벌써 내 손에 맞아 죽었을 게야! 암, 그렇고 말고! 백영철은 커피와 토스토를 식탁에 옮긴 다음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넣었다. 도대체, 경찰을 그만 둔 뒤로 혼자 식사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때문에 TV 화면에 비치는 얼굴이라도 봐야, 덜 쓸쓸할 것같아, 그는 열심히 TV를 보며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어지러운 CM이 끝나자 뉴스 시간이 이어졌다. "밤새 일어난 주요 뉴스를 간추려 전해 드리겠습니다 ......." 아나운서의 단조로운 목소리. 백영철씨는 좀 더 재미있는 프로그램은 없나, 하고 채널을 돌리기 위해 일어서다가 주저앉고 말았다. 화면 가득히 주옥이의 얼굴이 비쳤기 때문이다. --얘가 아침 문안 한 번 묘하게 하는구나! 고 생각하던 백영철은 들고 있던 커피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외박한 게 면구스러워 TV를 통해 아침인사를 하는 게 아니었다. 백영철은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저 멀리 가물가물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지만, 화면 속의 아나운서는 계속되었다. "관할경찰서는 뺑소니 사고로 보고, 긴급 수배했습니다. 피해자는 올해 스물다섯의 박주옥으로 밝혀졌습니다. 다음 뉴스는......." "그럴 리가 없다!" 백영철은 다시 한 번 다짐하듯이 내뱉고, 서둘러 다이얼을 돌렸다. "X X경찰서가 몇 번이야? 그래? 알았어!" 그는 안내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고, 다시 다이얼을 돌렸다. "X X경찰서죠? 나, 뺑소니 피해자 박주옥의 보호잔데...... 네? 시신은 Y대학병원 영안실? 알았어!" 그는 수화기를 팽개치듯, 던지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바로 그 시간. 뉴스를 듣고 놀라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사람이 또 한 사람 있었다. P호텔 1356호실의 조현범이었다. "뺑소니 사고?" 그는 침대 테이블 위에 있는 서울 시내 지도를 펼쳤다. 사고현장은 P호텔과는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다. "어젯밤 일은 생각보다 엄청난 것인지도 모르겠군!" 그는 대충 대충 준비를 한 다음,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은 그렇게 붐비지 않았다. 그는 커피와 베이컨 몇 조각을 앞에 두고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는 어제 밤의 일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미스 박이란 여인이 취한 행동은 조금 이상했지만, 따지고 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바람이 났다면, 남편이 뒤쫓아 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쁘게 말해서 그녀가 환락가를 돌아 다니며, 어수룩한 봉을 찾아 등을 치는 여인이었다면, 한 번쯤 실수로 어제 저녁처럼 누군가에게 꼬리를 잡힐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덕분에 어제 저녁, 자신이 디스코 텍에 지불한 돈은 2백불 남짓했지만, 두고두고 아까워할 만한 건 못되었다. 그런데, 뺑소니 사고로 죽어 버리다니....... 적어도 지도상의 거리로는 이 호텔과는 칠팔 킬로 떨어진 곳이었다. 사고현장은. 그렇다면, 그녀는 무대 뒤로 해서 이 호텔을 용하게 빠져 나갔다는 얘기가 된다. --내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일은 아니지! 현범은 커피를 추가로 주문하고는 뒤통수를 지그시 눌렀다. 통증은 많이 가셨지만, 후두부가 묵직한 건 여전했다. --걸 헌팅하려다 목 부러질 뻔했군! 그는 애써 기분을 바꿔 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박이란 여인이 교통사고로 죽은 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녀가 갖고 있던 짐을 중간에 가로채 가버린 여인은 또 뭔가 하고 그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미스 박이 갖고 있던 짐이란 건 별게 아니란 것쯤 현범이는 알고 있었다. 쇼핑백에 든 곰인형과 핸드백. 더욱이 미스 박은 그것들을 클럭에 맡기면서 핸드백에서 긴 멜빵이 달린 서브백은 따로 목에 걸지 않았던가. 요는 맡겨도 좋은 것만 맡기고, 귀중한 것은 몸에 간직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곰인형, 좋아하세요?" "이쁘죠? 혼자 심심할 땐, 곰인형이라도 있으면 든든하거든요!" "곰인형보단, 나 같은 남자는 어때요?" 짐을 맡긴 뒤,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기억해 내면서 현범이는 머리를 흔들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미스 박의 짐을 챙겨 사라지던 여인의 뒷모습이 그렇게 낯설지 않았다는 느낌이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렸다. --그 여인이 어떻게 해서 내가 미스 박의 로커 팻쪽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단 말인가?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8. 뺑소니 사고 "보시다시피 이렇게 외진 곳이니까, 목격자가 있었기를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죠." 백영철은 젊은 경관의 설명에 머리를 끄덕여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도심과 그렇게 떨어지진 않았지만, 주옥이가 뺑소니 차에 치인 현장은 강변도로와 이어진 곳이었다. 낮에도 그렇게 자동차의 왕래가 없는 한적한 곳인데, 한밤중에 목격자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건 수긍이 갔다. 그는 아스팔트 위에 백묵으로 표시된 현장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허리를 구부려 이곳 저곳 눈길을 쏟던 그는 시체 자리로 표시된 곳에 주저 않아서 찬찬히 살폈다. 때로는 손가락으로 아스팔트 위의 흙먼지를 찍어 올려 가면서--. 시간은 이미 오전 열 시를 지났을까? 백영철은 뉴스에 놀라 집을 뛰쳐나온 다음, 먼저 주옥이의 시체가 안치되어 있는 병원을 들렀었다. 이미 시체 격납고에 들어 간 주옥이의 시체는 그렇게 흉측하지는 않았다.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백영철은 주옥이가 즉사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부검(剖檢)은 아직 하지 않았군." "교통사고니까요. 그리고 경찰 쪽에서도 이렇다 할 요청도 없구......." 백영철을 안내한 당직 의사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묻는 말에 대답했다. "사망 추정 시간은?" "알 수 없군요. 병원에 실려 왔을 땐 이미 죽어 있었으니까요!" "시체, 함부로 손대지 말도록!" 백영철은 안내 의사의 불친절에 어느 정도 치민 화를 억누르면서 말했다. "말씀하시지 않아도...... 우리 병원에 장의사 취미 갖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의사도 만만찮게 대꾸했다. 백영철은 한 번 그를 노려보고 관할 경찰서로 달려갔다. "발견은 새벽 세시, 마침 그쪽을 지나가던 시청 오물수거차가 신고해 왔죠. 피해자 핸드백 속의 주민등록증으로 신원을 확인, 주소지에 연락했지만......." 하면서, 담당 경관이 핸드백을 백영철 앞에 내밀었다. 핸드백은 낯이 설었다. 어저께 주옥이가 외출할 때 들고 나간 것은 검정색이었고, 저렇게 멜빵이 달린 것이 아니었다. "유류품은 이것뿐입니까?" "네. 피해자 목에 걸려 있었습니다, 이 백도." "현장을 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해서 젊은 경관을 앞세워 사고 현장에 다다른 것이다. --이윽고 일어선 백영철은 호기심 서린 눈길을 이쪽으로 쏟고 있는 경관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오늘 이 도로를 말끔히 청소한 건 아니겠지!" "글쎄요. 하지만 그렇게 봉사 정신이 강한 시민이 있었을 것 같진 않군요!" 백영철은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피고는 저만큼 서 있는 패트롤 카로 발길을 옮겼다. 관할서에서 내어 준 것이었다. 그는 차에 올라 탄 다음 뒤따르는 젊은 경관에게, "혹시, 강재훈형사 기억하고 있어?" 하고 물었다. 강재훈형사는, 상당 기간 백영철과 페어가 되어 뛰었던 사이였다. 나이는 백영철보다 열살 가까이 아래였지만, 어느새 두 사람은 나이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그런 사이가 되어 있었다. 백영철이 퇴직한 뒤론 한 두 번 만났을 뿐이지만, 그때의 우정이 식은 건 아니었다. 다만, 현직인 강재훈이 그렇게 한가하지 않은데 원인이 있었을 뿐이다. "널 찾게 될 땐, 부탁이 있을 때만......." 언젠가 백영철은 겨우 두 사람이 오붓하게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 포키트 벨소리에 뛰쳐 나가던 강의 등에 대고 소리를 친 기억이 살아났다. "강재훈 형사, 잘 아세요?" 젊은 경관이 되물었다. 그는 느닷없이 나타난 백영철이 반말을 내뱉는데, 조금은 배알이 틀어진 표정이었다. "물은 건 이쪽이야! 아마도 이년 전에 당신네 서로 옮겨 왔을 게야. 아직 당신네 서에 있어?" "옮겼습니다. 시경으루...... 지난 봄 이동 때." 패트롤 카를 몰던 운전사가 대답했다. "시경으루 옮겨? 너무 잦군, 이사가......." 서로 돌아온 백영철은 담당 경관에게 부탁해서 주옥의 사건 기록을 넘겨받아 읽었다. 기록은 의심할 여지없는 뺑소니 사고로 처리되었고 가해 차량 긴급 수배중이란 노트가 달려 있었다. "뺑소니 이외의 가능성은 전연 생각해 볼 수 없을까?" 기록을 넘겨주면서 백영철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살인이란 뜻인가요! 방금 한 말은?" 담당 경관은 나이가 꽤 들었지만, 표정에 금방 속마음을 드러내는 그런 타입이었다. "살인이라든가, 아니면 뺑소니를 가장한 시체 유기라든가......."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현장 상황으로 봐서......." "당신, 사람이 차에 부딪쳐 즉사할 정도라면, 그 때 자동차 속도는 얼마쯤일 것 같애? 아니, 그것보다 심야의 강변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평균 속도는 얼마일 것 같애?" "그야, 경우에 따라 다르겠죠!" "그 경우를 한 번쯤 찬찬히 생각해 봐 주시겠수?" 백영철은 조금 비아냥거리듯이 말하고는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훅 내뿜었다. "전화 좀 실례해도 될까요?" 하고는 책상 위의 수화기를 들었다. "그건, 경비 전화! 공중전화는 바깥 복도에!" 마주 앉은 경관이 당황스럽게 제지했지만, 백영철은 무시했다. "아, 시경이죠? 강재훈형사, 지금 거기 있어요? 오늘 비번? 그럼 집 전화번호 좀 가르쳐 주시겠어요?" 백영철은 책상 위의 볼펜을 집어들어 전화번호를 메모했다. "공중전화는 복도라고 했죠?" 이쪽을 향해 인상을 쓰고 있는 경관에게 짐짓 윙크를 해 보이며 백영철은 복도로 향했다. --뭐야! 난 주옥이의 보호잔가, 아니면 형사로 복직한 건가! 그는 전화 다이얼을 돌리며 혼자 생각했다. 아무리 퇴직했다 해도 결국 몸에 밴 습관은 털어 버릴 수 없음에 그는 놀라고 있었다. "재훈이? 마침 있었군. 나야, 백영철!" "아, 백선배! 우리들 사이의 텔레파시는 아직 죽지 않았군요!" "그건 무슨 소리야?" "실은 지금 백선배를 찾느라고 한참 고생하던 중이었죠. 집엔 아무도 안 계세요?" "음, 그런데 무슨 일루?" "그것보다, 백선배님은 지금 어디 계세요?" "나? x x경찰서. 자네에게 부탁이 있어서......." "잘못한 게 있음, 벌을 받아야죠! 옛날 후배 찾아 청탁하는 것, 좋은 일 아니에요. 뭡니까? 음주운전? 무전취식?" "말 조심해! 좀 만나 줘야겠어. 나 지금 곧장 집으로 갈 테니까, 내 아파트로 와줌 고맙겠어!" "그것보다 치안본부는 어때요? 마침 백선배님을 만나시자는 분도 계시니까요." "누군데?" "만나보심 알게 돼요. 한 시간 뒤, 시경에서......." "아니, 우리집으로 와줘! 그 다음엔 치안본부가 아니라 어디든지 좋아!" "꽤나 서두르시는군요!" "암, 내 조카딸이 죽었어. 경찰은 뺑소니라고 하지만, 어쩐지 납득이 안 가는군!" "백선배님 조카딸? 진작 말씀하시지... 바로 가죠!" 서둘러 경찰서를 뛰쳐나오던 백영철은 경찰서 입구에서 막 계단을 올라오던 사람과 부딪쳤다. "앗, 실례!" 그는, 부딪친 사람이 여인이란 건 알았지만 그냥 몸을 날렸다. "뭐예욧! 백선생님!" 아는 사람인가? 하고 백영철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되게도 서두르시네요! 누가 잡으러 오나요?" "어, 그러고 보니 미스 강이었군!" 그러고 보니까 뭐예요? 사람에게 부딪쳤음, 정중하게 사괄 하셔야죠!" "실례! 그런데 미스 강은 웬일이야? 일요일 아침에...... 혹시 교회와 경찰서를 착각한 건 아니겠지!" "백선생님은요?" "나야, 전직 형사니까......." "저도 그럴 일이 있어요! 뺑소니 사건에 조금 아는 사람이......." "미스 강! 미스 강이 박주옥일 알아?" "어머! 백선생님은?" "내 조카딸!" "어머, 어머, 별일이야!" 별일 일 것까진 없었다. 박주옥이가 백영철의 조카라는 것에 강연숙이가 놀랐을 뿐이다. "미스 박은 지금 어딨어요?" "천당이나 극락! 육신은 병원 영안실에 있지만......." "여유만만 하시군요! 조카딸이 죽었는데두......." "미안하군. 대성통곡을 못해서...... 실은 지금 굉장히 바빠서 슬퍼할 겨를이 없다구. 자, 나중에 또 만나요!" "어딜 가시는 길이에요?" "우리집!" "같이 가요! 초상집엔 도와야 할 일이 많겠죠?" 백영철은 옆에 나란히 걷기 시작하는 강연숙을 멀건히 바라본다. --할 수 없는 아가씨군! 제 멋대로야! 체크. 아웃을 마친 현범은 짐을 프론트에 맡기고 커피숍으로 올라갔다. 짐이라야 슈트케이스 한 개, 숄더 백 한 개가 전부였다. 혼자 택시에 싣고 가도 그만이었지만, "그래도 이사니까." 라고 동렬이와 연숙이가 도와 주마고 했기 때문에 기다려야 했다. 커피를 주문한 다음, 그는 따뜻한 물수건으로 목 뒤를 지그시 눌렀다. "왜! 어디 아픈가?" 장동렬이었다. 혼자였다. 현범은 자세를 고치면서, "미스 강은?" "음. 곧 올 게야! 실은 아침에 사건이 있었거든! 뺑소니 사고...... 피해자를 연숙이가 좀 안대!" "뺑소니라면......." "뭐야, 자네도 알고 있었군! 연숙인 서에 들렸다가 이리루 온다고 했어!" 동렬이는 현범의 건너편 쪽에 자리하면서 다가온 웨이트레스에게 커피를 주문했다. "미스 강이 알아? 그 여잘?" "응, 뭐 죽은 김사장, 그래 김칠성 사장의 애인이라든가?" "그 여자가?" "왜 뜻밖인가? 아님, 자네도 알고 있다는 게야? 그 여잘......." "음, 알고 있지. 이상하군! 세상이 좁달까?" "자넨, 어떻게 알아?" "실은, 어젯밤 헌팅하다가 놓친 여자야! 아침 T. V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지!" 현범은 간단 간단하게 요점만 추려서 어젯밤의 얘기를 동렬에게 들려주었다. "그래서, 우거지상이었군!" "목 뒤가 아직 뻐근해서 말야......." "위로할 말이 없군! 헌팅하던 여자는 놓치구, 몸만 상해 독수공방....... 게다가 놓친 여자는, 잠에서 깨어나 보니까 죽어 있었다! 이건 비극이군, 비극!" "너무 놀리지마! 하지만, 그 여자가 김칠성 사장의 애인이었다는 건 뜻밖인데......." "연숙이가 들었음, 아주 팔짝 뛸 만큼 좋아하겠다!" 동렬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가 그렇게 경박한 여자라는 거예요?" 하는 연숙이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흉봤다 간 큰일 날 뻔했잖아! 고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더니...... 속담치고 틀리는 것 없군!" 동렬이가 자리를 비켜 연숙이를 안쪽에 앉히며 말했다. "속담쯤은 정확히 쓰세요!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예요!" "그래, 호랑인 남자의 경우고, 여잔 고양이쯤으로 해둬야 이미지가 맞아!" "여자가 고양이람, 고양이 손톱 맛 좀 봐야겠다는 거예요?" 연숙인 동철이와 농담 같은 것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이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미안, 어디서 화가 잔뜩 났군, 우리 웅녀 아가씨가, 누구야? 화나게 한 사람......." "알 것 없어요!" 연숙이는 동렬일 계속 쏘아 붙였지만, 화는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전직 형사 백영철에게 따돌림당한 걸 생각하면 속이 바글바글 끓어오르는 것이다. 함께 집엘 가면서 박주옥의 교통사고 내용을 듣고 싶었다. 그것보다 백영철과 박주옥이 삼촌 사이란 것도 흥미가 있었다. 그런데도 잠시 기다리라곤, 백영철은 혼자 택시를 잡아타고 도망을 쳐버린 것이다. 자신도 택시를 잡아 뒤따르려고 발을 동동 굴렸지만, 영화나 소설과는 달라서 그렇게 때맞추어 빈 택시가 달려와 주지 않았다. 가까스로 택시를 잡았을 때는 이미 백영철은 어디만큼 갔는지 흔적도 없었다. "P호텔!" 택시 운전사로부터 독촉을 받고 나서야 겨우 행선지를 내뱉듯이 연숙이는 말했다. "너무 앙탈 부리지마. 이래뵈두, 연숙이 화쯤 풀어 줄 메뉴를 마련해 두고 있다구. 이 장동렬이가......." "제비집 스프 정도론 어림없어요!" "고급으루 노네. 이 친구가 준비한 메뉴는 그런 저속한 게 아니야!" "뭐예요? 자기가 준비했다고 하고는 미스터 조에게 떠넘기다니......." "그러지마, 구슬도 꿰어야 보배야! 이 친구가 갖고 있는 얘기도 연숙일 위해 내가 발굴해 냈으니까, 가치가 있게 된 거야!" "무슨 얘기예요?" 연숙이는 건너편에서 빙글대고 있는 현범에게로 눈을 돌렸다. "실은 이 친구두 아는 사이야. 김칠성의 애인이란 여자!" "정말이에요? 미스터 조. 박주옥일 아세요?" "그 여자 이름입니까? 박주옥이란......." "이름도 모르면서, 알고 있다는 거예요?" "실은, 이 친구가 어젯밤, 헌팅하다가 놓쳤다는 게야. 그 여자를......." 동렬의 보충설명을 연숙이는 처음엔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이윽고, 말뜻을 알아 차렸지만, 아예 무시해 버리는 것 같았다. 단지 양쪽 볼이 조금 발그레 물이 들었을 뿐이었다. 현범은 그런 연숙이가 뜻밖에 순진한 데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어제 저녁에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나한테 얘기 할 때보다는 훨씬 자세하군!" 동렬이의 클레임에, "당연하죠! 사건에 대한 관심이 다르니까!" 하고 연숙이가 쏘아 붙였다. "요는, 이런 거겠군요, 미스터 조! 주옥이가 열시쯤 파라다이스 앞에서 누구를 기다렸나, 주옥이를 뒤쫓아 온 남자들은 누구였나, 그리구 주옥이의 핸드백과 인형을 서둘러 찾아간 여인은 누구였나." "그렇죠. 또 한 가지는 이 호텔에서 도망친 그 여자가 어떻게 해서 그 한적한 곳에서 교통사고를 다하게 되었나를 덧붙이면, 의문점은 완벽하죠." "대답은 어떻게 하누? 의문점만 완벽해지면야......." "그건, 지금부터 찾으면 돼요!" 연숙이의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스터 조는 뭘했었어요? 주옥이가 도망치는 걸,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는 거예요?" "멍하니 보고 있었다뇨? 난 그 여자가 부탁한 대로......." "멋지게 넘어지기만 했다, 이거죠?" "네." "주옥이가 미스터 조에게 넘어져 달라고 부탁한 간 쫓아오는 그 남자들의 길을 막아 달라는 뜻 아니예요? 미스터 조가 그들의 발이라도 걸어 넘어뜨려 주면, 주옥인 그만큼 시간을 벌어서 도망칠 수 있다고 계산한 거 아니에요!" "......." "그런데 뭐예요? 부탁 받은 핸드백도 중간에 새치기 당하구......." "면목없게 됐군요! 정말!" "할 수 없죠. 남자들이란 다 그런 거니까!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죠! 센 척 뽐내지만, 정말 결정적인 때는 꽝이라니까!" 연숙은 정말 화가 난 것처럼 말했다. 그녀는 현범이의 행동을 무책임하다고 윽박지르고 있지만, 실은 백영철한테 당한 화풀이를 현범에게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봐, 연숙이! 세상 모든 남자를 도매금으로 깎아내리지마!" 동렬이가 불만스레 클레임을 걸었다. "그렇지 않담, 자기는 다르다는 거예요?" "그럼! 이 장동렬이는......." "좋아요! 그렇담, 빨리 점심 예약해 주세요!" "점심 예약? 라면도 예약제인가? 이 호텔은?" "십 이층 중국 식당, 언제나 붐비잖아요!" 연숙이가 쏘아붙이자, 동렬이는 내키지 않는 몸짓으로 일어섰다. --이 웅녀 아가씨, 정말 화가 단단히 난 거로군! 동렬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연숙이는 화가 나면, 그때그때 가장 가까이 있는, 가장 비싼 식당에서 엄청나게 먹어치우는 버릇이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재훈 형사가 말했던 백영철이 즉시 만나야 할 사람은 역시 현계환이었다.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사무실로는 연락이 닿지 않아, 옛 단짝이었던 강재훈이를 동원해서 수배를 한 것이었다. 집 전화번호를 몰랐던 현계환씨로는 그것이 가장 손쉽고, 신속한 방법이었다. 강원도에서 돌아와 보고를 마친 지 겨우 사흘-- 그동안 무슨 긴급한 일이 벌어졌을까? 백영철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강재훈과 함께 현계환씨의 사무실에 들어섰다. "모처럼 쉬는 날, 이렇게 불러내서 미안하군!" 현계환씨는 두 팔을 벌리면서 소파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반겨 주었다.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물론 비서는 없었지만, 어느새 커피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현계환씨가 직접 끓여 두었던 것이다. "이거, 영광입니다!" 강재훈 형사가 정말 황송한 듯이 두 손으로 커피잔을 받았다. 황송하기는 백영철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옷은 벗었지만, 직급의 차이는 하늘같은 현계환씨였다. 개인적으로는 후견인 격이기도 했다. 그런 현계환씨가 직접 차를 끓여 놓으면서까지 기다리고 있었음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금 당장 강원도엘 다시 한 번 다녀와 줘야겠다고 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백영철 입장은 그럴 수가 없는 처지였다. 뺑소니 사고로 처리된 주옥의 변사 사건이 어쩌면 배후가 있는 살인일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어쩐지 얼굴이 어둡군! 나 때문에 백형의 휴일 스케줄이 엉망이 되었나 보지!" 현계환씨는 반은 농담삼아 다시 한 번 휴일호출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실은, 백선배에게 흉사가 있어서요. 오늘 새벽에......." "흉사? 무슨......." "네. 백선배 조카딸이 어젯밤에 뺑소니차에 치어 그만...." 강재훈 형사가 대신 변명삼아 사정을 얘기했다. "죽었단 말야?" 현계환씨는 깜짝 놀란 눈길을 백영철에게로 돌렸다. "정말 미안하군. 그런 일이 있었담. 다음날 만나두 되는 건데...... 이봐! 강형사. 그런 건 자네가 알아서 했어야 했잖아!...... 그래 조카딸은 몇 살인가? 올해." "스물 다섯입니다." "쯧! 쯧! 아직 못 잡았지? 뺑소니는......." "네." "백형! 이거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뒤처리랑 바쁠 텐데, 우리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하지!" "아닙니다. 부르시지 않았어도, 찾아뵈려던 참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사고에 대해서 상의드릴 일도 있고 해서요!" 백영철은 자리를 고쳐 앉으며, 주옥이의 사건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흠! 듣고 보니까, 복잡하군." 현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이윽고, 그는 눈을 뜨면서 백영철에게 말을 건넸다. "요는 단순한 뺑소니가 아니다, 그런 거군!" "네!" "백형의 의문점, 즉 뺑소니가 아니라는 근거를 다시 한 번 설명해 주겠어?" "네. 첫째, 현장에는 급정거 한 타이어 자욱이 전연 없었습니다. 적어도 사람을 치어 즉사시킬 정도의 속력으로 달렸다면, 갑자기 장애물과 부딪쳤을 때, 반사적으로 급브레이크를 밟아 타이어 자욱이 남는 게 보통인데도 말입니다." "현장을 살펴봤나?" "네. 급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현장에 충돌이 있었다는 흔적도 없었습니다. 보통 자동차가 장애물에 부딪치면, 최소한 차체(車體)의 페인트 조각은 떨어져 있어야 얘기가 되는데, 그런 것이 전연 없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요는, 백형은 조카딸이 다른 곳에서 숨이 끊겨진 다음, 현장에 버려졌다고 생각하나?" "네!" "베테랑 수사관이었던 백형의 감각엔 아직 녹이 슬지 않았군!" 현은 조금전 백영철이 내놓은 종이 봉지를 열어 보면서 말했다. 종이 봉지 두 개에는 흰 가루와 마른 풀잎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백영철이 죽은 주옥이의 방에서 찾아낸 것이었다. X X경찰서에서 강연숙을 가까스로 따돌리고 백영철이 집으로 돌아간 것은, 어제 저녁 외출하기 전의 주옥이가 자기에게 보여 준 풍년 농원의 약도를 찾기 위해서였다. 어제 저녁에는 다만 밤늦게 외출하는 주옥이에게 신경이 쓰였을 뿐, 그 약도는 건성으로 보는 척만 하고, 응접실 테이블 위에 얹어 놓았던 것이었다. 그것이 주옥이의 교통사고에 미심쩍은 점을 발견하게 되자, 그 약도와 이 사고에 연관점이 있질 않나 해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집에 도착해서 강재훈형사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약도를 찾은 다음 주옥이의 짐을 뒤져 본 것이다. 거기서 찾아낸 것이 지금 현계환이 만지작거리고 있는 종이 봉지였다.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이라는 것쯤 짐작이 갔지만 정식으로 분석해 보기 전에는 입에 담을 용기가 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이런 거겠군. 백형은 조카딸은 정진대 농원엘 다녀온 다음, 회사에 출근은커녕 자기 하숙집에도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런 조카딸이 어제, 밤 열시에 누군가를 만나러 갔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런데 현장에는 조카딸이 들고 나갔던 인형이나 핸드백이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그 아이가 갖고 있던 짐 속에서 찾아낸 것이 바로 들고 계시는 것들이고......." 백영철은 현계환의 말을 이어받아 뒤를 맺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닌 것 같군. 좋아! 관할서에선 계속 뺑소니 사고로 조사하도록 내버려두지. 다른 팀에서 손을 써 보도록 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군! 이봐 강형사, 지금까지의 얘기, 잘 기억하고 있지?" "네!" 현계환씨는 경비전화를 들었다. 시경이 나오자, 그는 수사과장을 찾아 짧게 지시했다. "나, 치안본부의 현이야. XX경찰서 관내의 뺑소니 사고 건인데, 어쩜 배후가 복잡한 것 같아! 당신이 맡아서 손을 써 봐! 응, 마침 강재훈이를 만났던 참에 전부 건네줬어. 아마 곧 도착할 거야!" 현계환씨는 전화를 끊은 다음 강재훈에게 지시했다. "바로 나가 봐! 끝나면 P호텔 레스토랑으로 와! 열두 시 반으로 예약이 되어 있어. 같이 점심이나 들자구. 모처럼 백형도 왔으니까......." 지시를 받은 강재훈이 물러나가자 현계환씨는 백영철을 자기 옆자리에 옮아앉도록 했다. "이건, 예삿일이 아닐지 몰라! 백형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은데......." 하면서 현계환씨는 조금전 백영철에게서 받은 지도와 책상서랍 속에서 또 다른 지도를 끄집어내 탁자 위에 나란히 펼쳤다. 얼마전, 스즈키의 가방에서 찾아냈던 지도의 카피였다. 두 지도를 살피던 백영철은 저도 모르게 "앗"소리를 깨물었다. 그것은 똑같은 지역의 것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주옥이가 그렸던 것보다 스즈키의 것이 훨씬 정밀한 전문가의 솜씨였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렇지! 백형 조카딸이 찾아 나섰던 풍년 농원과 일본인 스즈키가 몰래 답사했던 곳은 같은 곳이야!" "......." "또 한 가지, 이 근처라기보다 분명 이 풍년 농원이 엊그제 불타 버렸다는 거야!" "불타 버려요? 왜요!" "허허, 이 사람, 그걸 내가 어떻게 아나?" 현계환씨는 그 동안의 결과를 간단히 설명했다. 스즈키가 지도에 그린 현장을 현재 경찰에게 철저히 조사시켰다는 것, 그 결과 그 언저리는 산불로 몽땅 타 버렸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이 오늘 새벽이었다는 것 등이다. "......그래서 그걸 알려 줄 겸해서 이렇게 나오라고 한 건데. 그 동안 백형에게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는 줄은 몰랐지!" "사고였으니까요....... 알려 줄 겸이라고 하시는 걸 보면, 또 다른 일도 있다는 얘기로도 들리는 데요." "음! 그리고 점심이라도 함께 할까하구!" 현계환씨는 거짓말을 했다. 실은 화재 현장을 한 번 답사시켜 보고 싶었던 게 백영철을 부른 원래의 목적이었다. 현지 경찰보다는 아무래도 옷은 벗었지만 백영철 같은 베테랑--그리고 경찰이 아닌 입장에서 자유로이 답사시켜 보고 싶었던 것이지만, 조카딸의 흉사 직후인 그에게는 아무래도 입이 떨어지지 않아 포기한 것이다. 다른 사람--치안본부의 그 관계 전문가 한 사람을 은밀하게 내일이라도 현지에 파견하도록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건 그렇고, 회삿일은 어떤가? 곧 관광시즌인데......." "내주 말부턴 좀 바빠질 것 같습니다. 일본의 패키지 투어를 이번엔 제가 맡아 안내하게 되었거든요!" "그것 잘 되었군! 슬픈 일을 잊는 덴 일이 제일이거든!" 하고 일어서는 현계환을 백영철은 부탁이 있다고 다시 붙잡아 앉혔다. "무슨 부탁인데?" "구름 잡는 것 같은 얘기라서 뭣합니다만...... 혹시나 해서요." "뭔데?" "구로가와 메이ㅅ이란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구로가와 메이ㅅ? 일본사람?" "아닙니다. 한국사람이라니까, 더욱 어려워집니다." "한국사람 이름이야? 그게?" "네. 일본 코오베 출생으로 당시 이름이 구로가와 메이ㅅ이랍니다. 해방되고 나서 귀국을 했다는데......." "누가 찾는가? 지금 그 사람을......." "당시 코오베 때의 친구였다는 오오무라 요시오라는 일본인, 이번 방한하는 투어의 단장입니다만, 그 사람이 이번 방한 때 꼭 만나게 해달라는 부탁이 와 있습니다." "오오무라 요시오? 이건 묘한 인연 같군!" "한일 우호단체 여러 곳에 이름을 걸고, 있는 일본 정 제계에선 어느 정도 말이 먹히는 사람이라고 듣고 있습니다만......또 그가 찾는 구로가와, 일제 때 창씨성 구로가와는 워낙 처음 들어서...... 기무라라면 이가나, 박가, 가네무라라면 김가, 이렇게 시세가 정해진 거라면 별 문제지만......." "구로가와가 창씨성? 그럼 현가야!" "네?" "현가가 구로가와로 창씨한 집이 몇몇 있다구 들었어! 나두 현가니까, 잘 알지! 감을 현이나, 검은 개울이나, 색깔은 비슷하니까......." "그럼, 구로가와 메이ㅅ은 현명준이 되는군요!" "그렇담! 현명준 틀림없을거야! 그리고 스즈키를 찾고 있던 사람도 오오무라였잖아?" 백영철이 현계환과 함께 호텔에 도착했을 때, 강재훈형사는 이미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하고 현계환의 물음에 강은 시경에서 취한 조치를 간략하게 보고했다. "일단, 제가 사건을 맡기로 했습니다. 아까 받았던 종이 봉지의 가루약과 마른 풀도, 정확을 기하기 위해, 분석을 의뢰했고, 피해자 박주옥도 부검을 의뢰했습니다. 결과는 내일 하오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아! 그 얘긴 나중에 하구...... 자, 뭘 먹지?" 현계환은 웨이터를 불러, 이쪽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요리를 시켰다. "백선배! 혹시 조카딸이 어저께 밤 10시, 어디서 누구와 만나기로 했는지 모르세요?" "전연...... 이럴 줄 알았다면, 물어 둘 걸 그랬다구 후회하고 있어!" "그 얘긴 그만 하자니깐!" 현계환의 말에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백영철은 그러나 강재훈의 말에 신경이 쓰여졌다. --내일 오후면, 엄청난 결과를 확인하게 되는군! 그는 아무래도 주옥이의 소지품에서 찾아낸 종이 봉지의 내용물에 신경이 가는 것이었다. 입에 담기가 겁이 났지만, 내일 오후부터는 싫더라도 입에 담지 않을 수가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점심이 끝나면, 경찰병원의 부검 담당의사를 만나 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곳의 의사들과는 거의 얼굴이 익은 사이였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서울은 좁군요! 백선생님, 결국 도망을 쳤는데, 또 만나게 되었네요!" 강연숙이었다. "어! 미스 강...... 아깐 미안했어. 난 미스 강이 택시에 탄 줄 알았더니......." "능청, 그만 부리세요! 남은 약올라 죽겠는데......." 강연숙은 입술을 뽀족하게 해서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백영철과 동석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아예 안중에도 없다는 투였다. "능청이라니? 아가씨, 나이 든 분한테 너무 심하잖소?" 현계환이었다. 그는 느닷없이 끼어든 젊은 여인이 조금 예의가 없다고 생각던 차에 능청 그만 부리라는 말씨가 귀에 거슬린 것이다. "어머, 그러세요? 하지만, 백선생님은 그 말 듣게 되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누구시죠?" "자, 미스 강 인사하지. 이쪽은 내가 모시던 분이구......." "흥미없어요! 하지만, 식사 마치고 나오실 때까지 입구에서 기다릴 테니까, 이번엔 도망가실 생각 아예 마세요!" 하고 연숙이는 돌아섰다. 입구 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두 청년에게로 다가 간 그녀가 그 중의 한 청년의 팔짱을 끼는 것을 백영철은 눈으로 쫓았다. 그러면서 또 다른 청년이 아무래도 눈에 익다고 생각했다. 그 청년을 이 호텔에서 만나는 게 오늘이 두 번째였다. 어제 하오에도 우연히 커피숍에서 강연숙이를 만났을 때 저 청년을 본 것이 기억났다. 어쩐지 낯이 익은 얼굴. 그러나 누군지는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사람 얼굴 기억하는 것은 형사의 기본 요건이었고, 그 방면에선 자신이 있었던 백영철은, 그러나 저 청년의 얼굴에선 그 자신이 힘을 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도 슬슬 나이 든 표가 나타나는가? "누구야, 저 아가씨?" 현계환이 불쾌하다는 듯이 백영철과 함께 강연숙의 뒤를 눈으로 쫓다가 물었다. "네. 죽은 조카딸 아이의 친구랄까, 좀 아는 사이의......." 백영철은 간단히 강연숙에 대해 설명했다. "듣고 보니까, 약도 오를 만큼은 됐군! 하지만 요즘 젊은 아이들은 제 멋대로야! 정말......." "아직, 그런 말씀하실 만큼 늙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강재훈의 말에 현계환씨는 활짝 얼굴을 펴서 웃었다. 그러면서, 이젠 검은색보다 흰색이 훨씬 많은 백영철의 머리 쪽에 시선을 쏟았다. 점심은 참으로 푸짐했다. 중국요리는 탕수육 잡채 정도밖에 모르는 백영철은 이름도 모르는 요리를 즐겼다. 식사 동안엔 주옥이의 죽음도, 스즈키라는 일본인도 또 자기의 늙은 마누라가 지금 쯤 주옥이의 죽음을 안쓰러워 하면서 외손주 해산 뒷바라지 준비에 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라는 것도 잊고 있었다. 또, 재혼한 누님이 다 큰 딸의 비보에 지금쯤 황망히 고속버스에 흔들리고 있을 것이란 생각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런 백영철을 다시 현실로 되돌아오게 만든 것은 물론 강연숙이었다. 그녀는 백영철 일행이 식사하는 동안 정말 레스토랑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어 아가씨, 이번엔 놓치지 말구, 꼭 붙잡구 다니도록...-." 현계환씨는 손을 들어 강연숙에게 말을 던지고는 강재훈과 함께 엘리베이터 속으로 들어갔다. "정말 미안! 그 대신 내가 커피를 살께!" 백영철은 국민학교 학생처럼 강연숙에게 절을 했다. "그러니까, 주옥이가 어젯밤 10시, 이 호텔 디스코 텍에 있었다는 게야?" 백영철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커피잔을 떨어뜨릴 만큼 놀랐다. "왜, 놀라세요? 필요하심 함께 춤을 춘 사람을 만나게 해 줄 수도 있어요!" "그게, 누구야?" "어머, 그냥 만나게 해 드릴 것 같아요?" 장난기 서린 얼굴을 하던 연숙은 얼른 표정을 고쳤다. 반백의 백영철의 눈이 빛을 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런 눈빛을 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농담을 했다간, 자칫 이쪽이 봉변을 당할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오전에 현범이에게서 들었던 얘기를 자세하게 백영철씨에게 들려주었다. "고맙군, 미스 강! 정말 큰 신세를 지게 됐군!" 연숙의 얘기가 끝났을 때, 백영철씨는 이미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같이 춤을 췄다는 청년, 만나볼 수 없을까?" "괜찮겠죠. 하지만 지금은......." "내일이라도, 아니 수요일쯤이 좋겠군. 수요일 저녁에 ......." "그렇게 오래 기다리실 수 있어요? 하루가 급하실텐데......." "마음은 그래! 하지만, 화요일까진 어려워, 몸을 뺄 수가 없으니까......." "하긴, 주옥씨 장례랑, 그러시겠죠. 좋아요. 수요일 저녁 여섯시, 여기서 뵙죠!" "고마워. 그리고 그 전이라도, 내 이름 대고 찾아가는 사람 있거든, 도와줘요." "백선생님 이름 대고, 날 찾아요? 누가?" "주옥이 사건 담당 형사. 이름은 강재훈...... 그렇군, 조금 전에 나랑 함께 식사를 했던......." "좀 거칠게 생겼던 사람이에요?" "응, 마음은 비단결이야. 어느새 얼굴에 직업병이 나타나서 거칠게 보이지만......." "저보구 수사에 협조해 달라시는 거예요?" "수사라는 거친 단어까진 쓸 필요는 없지만, 요는 그런 뜻이야." "한 가지 조건을 들어주면, 생각해 보겠어요!" "조건부로군. 어떤 조건인데?" "수사결과는 제일 먼저 저한테 알려 준다는 조건...... 뭐, 상부에 보고하기 전이란 뜻이 아니라, 신문 발표 전에......제가 스쿠프할 수 있게 보장해 주신다면......." "오케이! 그 친구한테 다짐받아 두지! 거기에 덧붙여서......" "보너스도 있으세요? 스쿠프만으로도 족한데, 무리하지 마세요!" 생글거리는 연숙일 건너다보는 백영철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무리는 되겠지만, 보너스를 덧붙이지. 미스 강이 도와주면, 그래, 미스 강 결혼식 때 강형사랑 내가 오백 원씩 부조를 하지! 어때? 아까 그 청년 멋있던데!" "뭐예욧?" 앙칼진 연숙의 목소리. "미안, 화나게 할 생각은 없었어. 다만 도와준다니까 고마워서 해본 소리야!" "그렇담. 오백원이 뭐예요! 오천원 부조도 요즘은 없다구요! 최하 만원이지!" 하고 연숙은 혀를 낼름 내밀었다. --한 방 맞았군! 백영철은 연숙이가 정말 화를 낸 게 아니라, 자기를 놀리고 있다는 걸 알고는 안심이 되었다. 만약 이 아가씨가 토라져 돌아서버리면, 어제 저녁 주옥이와 함께 디스코를 춘 사람을 찾는데, 한참 헛고생을 해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주옥인 죽었지만, 좋은 친구를 사귀고 있었군! 연숙이를 건너다보는 백영철씨의 눈은 비로소 잔잔하게 젖기 시작했다. 죽은 주옥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이제서야 실감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필이면, 내 조카딸이 뺑소니를 당할 게 뭐람! 백영철씨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연숙이 몰래 눈꼬리를 눌렀다. 9. 인형의 비밀 북두산업 사장실. 화려하진 않지만 아담하게 꾸며져 있었다. 새로 사장이 된 윤경식은 그전까지 칸막이로만 되어 있던 곳을 헐어버리고, 비서실을 곁들여 새로 꾸민 것이다. 덕분에 사원들과 허물없이 어울렸던 김칠성 사장 때의 분위기는 깡그리 바뀌어져 버렸다. 가구와 집기도 새로 들여온 것은 물론이었다. 얼마 동안---- 태양의 재건팀이 처음 북두를 인수했던 얼마 동안, 지금은 회장으로 물러앉은 이영길씨가 사장으로 있던 때와도 분위기는 전연 달랐다. 이영길 회장은 위층에 따로 방을 마련해서 옮겨 갔지만, 그렇게 열심히 회사에 나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최근에는 태양상사로 복귀하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을 윤경식은 알고 있을 뿐이다. -----현회장의 입장에선 자리를 못 지킨 이영길이나, 그 자리를 빼앗아 버린 이 윤경식이나 모두가 못마땅하겠지. 그런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다. "회사를 하나 맡아보지 않겠느냐?" 고 언젠가 현회장이 자기에게 넌지시 물었던 것을 윤경식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가 바로, 북두산업에 대해 현회장이 남다른 관심과 집념을 불태우기 시작했던 때였다. 윤경식은 그런 회장의 뜻을 받들어 나름대로 알아서 마침내 북두산업을 도산시키는데 성공했다. 당연히, 콩알만한 회사지만 북두의 사장자리는 자기에게 올 것으로 기대했었지만, 결과는 이영길 이사에게 돌아갔다. "회사 사장은 자기 능력으로 차지하는 자리야! 어린애에게 우윳병 물려 주듯해선 안되는 게야!" 그게 현회장이 윤경식에게 내뱉았던 말이었다. 처음엔 울컥 배알이 뒤틀렸지만, 이영길에겐 우윳병을 너에겐...... 하는 뜻으로 뒤집어 해석한 윤경식은 다음 단계로 손을 쓰기 시작했고, 계산된 대로 사장 자리에 올라 앉았다. 이영길은 회장으로 올렸지만, 콩알만한 상사의 대표권 없는 회장이란 부도난 어음 조각과 다를 바 없었다. "이 노옴! 네가 쿠데타를 해?" 하고 현회장은 격노했지만, 그런 것쯤은 처음부터 각오한 것이었고, 또 현회장이 아무리 격노해도 그것은 단순한 호령에 그칠 수밖에 없음도 계산 된 것이었다. 자랑할 것은 못되지만, 현회장과 자기 사이에는 유쾌하진 않아도, 끈끈하게 맺어진 관계가 때로는 강점으로, 때로는 약점으로 작용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끈끈한 관계가 한쪽에 약점이 되었을 때는 다른 한쪽에선 강점이 되는 그런 것이었다. 그랬던 현회장으로부터 어저께 전화가 걸려 왔었다. 쿠테타 이후, 그쪽에서 걸려 온 첫 전화였다. "미국에서 변호사가 찾아왔어! 뭔가 시시콜콜 묻겠다는 걸, 너한테 가라고 했어! 네가 알아서 처리해!" 현회장은 불쾌한 걸 어쩔 수 없이 참는다는 투로 말했다. 미국에서 변호사. 윤경식에겐 짚이는 게 있었다. 그건 자기가 태양의 기획 실장으로 한창 날리던 때----- 정확히 말해서 기획실장으로서 한 마지막 일과 관련되는 것이었다. 기획실장에서 호메이니의 벽화로 전락되는 계기가 되었던 이란 프로젝트와 관련되는 일이 생각난 것이었다. 이란 프로젝트는 표면상으로는 카페트 공장 건설이었지만 실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좀더 엄청난 프로젝트였고, 그것을 성공시키기 위해 미국 국적의 유력한 픽서와도 뒷거래가 있었다. 호메이니 혁명이 조금만 늦었어도 계약이 성공했을 것이지만 예정된 계약 전날, 이란 혁명이 터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계약 전에 혁명이 터진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계약 뒤에 혁명이 터져 그 프로젝트 내용이 속속들이 혁명정부에 의해 폭로가 되었다면, 그건 예삿일로 끝나지 않았을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단 한가지, 그때 뒷거래가 끝까지 깨끗하게 정리되지 않고 있는 게 항상 찜찜하게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마도 미국에서 변호사가 현회장을 찾아 왔다면, 그 때문이 분명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변호사가 지금 찾아오겠다고 전화를 걸어 온 것이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윤사장은 인터폰을 눌렀다. 응답이 없었다. 두세 번 짜증스럽게 인터폰을 누르던 그는 일어서서 비서실로 나갔다. 마침 그때, 비서인 문희경이 물컵에 꽃 한송이를 꽂아들고 들어 오고 있었다. "뭘하고 있어? 방을 비움 어쩌라는 게야?" "어머, 사장님 죄송해요. 미스터 박이 있었는데......" "어쨌든 지금 현관 입구에 내려가서 기다리다가 미국사람이 오고든 데리고 들어와! 그 사람, 한국말을 한마디도 못할 테니까...... 빌딩 수위와 시비라도 붙으면 실례니까!" "네, 사장님." "참, 그 사람, 동양계라니까, 얼굴 가지곤 모를 거야! 주의해서 살피도록!" "네, 사장님." 윤사장은 연신 대답을 하면서도, 컵에 꽂힌 꽃을 저쪽 책상 위에 조심스레 갖다 놓는 문희경을 눈길로 쫓는다. "내 말, 다 알아들었어?" "네, 사장님!" "그 꽃은 뭐야?" "네, 이 꽃은......" "알았어!" 희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사장은 사장실로 돌아섰다. 희경이가 꽃을 저 쪽의 빈 책상 위에 갖다 놓기 시작한 것은 어제, 월요일부터였다. 그리고, 그 빈 책상이 박주옥의 자리란 것을 윤사장은 알고 있었다. 뺑소니 차에 험하게 끝난 박주옥에게 저렇게 조의를 표하고 있는 문희경의 마음씨가 가슴 저쪽에서 뿌듯하게 밀려옴을 윤사장은 느낀다. ----- 그러고 보면 오늘이 사흘째, 장례라도 치루는 건가? 아직 시집도 안간 주옥이었기 때문에 버젓하게 장례를 치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가 주옥이를 북두로 데리고 온 것은 사내에 심복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사원들의 일상 대화나 근무태도 등을 체크해 둘 필요가 있었고 그것을 주옥이에게 시키기 위해서였다. 주옥이 정도의 붙임성과 명랑함이라면 아무하고나 잘 어울릴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었다. 처음 경리부에서 출납을 맡아보던 그녀는 윤경식이가 사장이 되면서 비서실로 옮겨진 것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아버지가 죽었다는 전화 한 통을 끝으로 저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제 팔자가 뭐! 윤은 가볍게 머리를 흔들고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에 눈을 돌렸다. 증자를 위한 주주총회는 내주 수요일로 예정하고 있다는 결재 서류를 빼어 든 그는 인터폰을 눌렀다. "네, 사장님!" "총무부장 좀 올라 오라구 해! 아니 이쪽으로 전화를 걸라구 해!" "네!" 총무부장이 곧 인터폰에 나왔다. "주총을 내주 수요일로 예정한다면, 다른 주주들도 증자에 찬성했다는 얘긴가?"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황인희 여사는 확실한 대답을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총 날짜를 잡았다는 게야?" "그동안...... 사장님이 황여사를 한 번 더 만나서 설득을 하시면 어떨까 해서요." "그래도 안 들으면, 소집 통지를 내놓은 주총을 연기하자는 겐가?" ".........." "일의 선후, 앞뒤를 찾아서 하라구!" 그는 인터폰을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일단 사장이 되었지만, 윤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주식보다 죽은 김칠성 사장 부부의 소유가 더 많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자기가 갖고 있는 주식은 북두의 하청공장 주인들의 소유 주식을 사들인 것이 전부였다. 과반수엔 물론 미달이었다. 사장이 되기 위해 김사장 미망인, 황인희여사의 위임장이 큰 도움이 되었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위임장을 부탁할 수는 없었다. 또 그녀가 죽은 김사장의 주식과 그 친구들의 소유주식을 똘똘 뭉쳐서 대항해오면, 이쪽은 언제든지 두 손을 들 수밖에 없는 약자인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증자. 미망인인 황여사가 증자에 응할 만한 재력이 없을 테니까, 그만큼 이쪽의 소유 주식이 늘어날 것이라는 게 윤경식의 계산이었다. 그런데, 황여사는 증자에 동의를 않고 있는 것이다. 대주주와 소주주의 실력의 차.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어떻게 하든지, 황여사를 설득해서 증자에 찬성토록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장님, 미스터 헨리 조가 도착했습니다." 문희경이었다. 그 뒤엔, 전혀 미국인 같지 않은 젊은이가 서 있었다. 소공동이나 명동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체격과 얼굴. 요는 그는 한국 사람의 얼굴과 몸을 하고 있었다. --------- 꽤나 어린 변호사로군! 윤경식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젊다는 것은 그만큼 노련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젊은 변호사를 보낸 것을 보면, 저쪽이 이쪽을 만만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 아니면, 단지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리자는 것뿐일지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무렴, 서로 떳떳하지 못한 거래를 변호사를 통해 점잖게 얘기하자는 것은 다른 데 뜻이 있는 것이라고 그는 다짐하는 것이다. "어제 오후 태양상사 현회장으로부터 소개받았다. 난 L A 잭슨 법률 사무소의 변호사 헨리 조." 젊은이는 명함을 내밀면서 말했다. 유창한 영어. 모습과는 달리 영어 솜씨는 정말 미국인이었다. "------ 꽤나 젊군. 변호사치곤. 무슨 일인가?" 윤경식은 젊은이를 찬찬히 훑으며, 명함을 건넸다. 헨리 조는 명함을 티 테이블 위에 받아 놓으며 방안을 살폈다. 그는 윤사장의 말을 듣지 못했다는 투였다. 이윽고 헨리는 사장실 장식장 위에 올려 있는 아기곰 인형에 눈길을 멈추었다. "저 인형, 퍽 인상적이군. 당신 회사 제품인가?" "음. 북두산업의 자랑이지, 저 인형은." "수출도 하고, 국내에서도 파는가? 저 인형?" "국내 판매는 않는다. 현재 해외 수출 오더만 해도 몰리는 형편. 도저히 국내시장까지 커버할 수 없다. 무슨 일인가? 당신이 날 찾아온 것은........." "북두산업이 내 의뢰인과 추진하던 프로젝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다. 내 의뢰인은 이 프로젝트 때문에 상당한 투자를 진행시키고 있는데, 북두산업은 최근에 전연 반응이 없다. 무슨 일인가?" "당신 의뢰인과의 공동 프로젝트?" "그렇다. 김칠성 사장이 도산하기 전에 추진하고 있던 일이다." 헨리·조---- 현범이는 윤경식 사장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는 어저께 하오, 태양상사 현명준 회장과 만났었다. 박인규 변호사로부터 부탁 받은 현범이는 그 나름대로 김칠성사장의 도산 내막에 대해 조사를 진행했다. 조사라야 주로 장동렬과 강연숙을 통한 간접적인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북두산업의 도산에는 태양상사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한 자료를 그들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주일부터 직접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북두산업이 도산하자마자 이를 인수, 재건에 착수한 태양상사의 재빠른 행동이 뭣을 말하느냐 하는 것부터 캐기로 한 것이다. 현명준 회장을 만났지만, 그는 북두와는 전혀 관계없다고 잡아떼고, 북두와 관련된 일이라면 직접 북두산업으로 가라고 했었다. "태양이 인수한 기업인데, 회장인 당신이 모른다는 건 이상하지 않는가?" "인수란 당치도 않는 소리. 우린 다만 채권을 회수하기 위한 조치를 했을 뿐, 실제로 북두 주주들은 그 뒤 새로 사장을 선임하고, 우리가 파견했던 사람은 경영에서 손을 떼게 만들었다!" "윤경식 그 사람도 역시 태양의 사원이었던 사람 아닌가? 그도 태양에서 파견된 인물이잖은가?" "그 녀석! 일만 저질렀던 녀석! 태양에서 내보내기 위해 그쪽으로 보냈을 뿐이다." "그런 상태에서 현회장은 태양의 채권 회수가 가능하다고 보는가? 또 북두에게 그런 힘이 있는가?" "그건 낙관적이다. 채권문제는 이미 양쪽 법인간에 장기적인 해결책이 성립되었고, 북두에겐 봉제 인형의 특허권이 있으니까........." "봉제인형의 특허권?" "정확히 말해서 의장 특허지만, 대단한 시장성을 갖고 있다." 그것이 현회장의 대답이었다. 말하자면, 태양상사----특히 현명준 회장으로서는 북두산업과는 전혀 무관하며, 요는 채권을 회수하기 위한 방책만을 강구했다는 얘기였다 . 그것은 태양상사의 고유의 기업활동 범위에 속하는 것이며 특별히 북두산업을 이수하여 자회사로 하겠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 채권만 회수되면 그날로부터 태양과 북두의 관계는 예전대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현범이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전연 다른 얘기였다. 때문에 그는 현회장의 얘기를 바탕으로 북두산업과 접촉하기 위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것 때문에 하루를 완전히 머리를 썩히며 보냈다. 그리고 얻어낸 결론이 조인트·벤처----합작회사 관계였다. 2 개국의 기업이 자본이나 기술을 서로 합쳐서 새로운 기업을 세우는 합작회사는 외자도입의 방법으로나 제3국 협력진출의 방법으로 흔하게 이용되는 일이었다. 현범은 북두산업과 가공의 미국 회사가 조인트·벤처를 추진해온 것으로 윤경식 사장에게 어택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효과는 있었다. 윤경식 사장이 공동 프로젝트라는 말에 조금은 허를 찔렸다는 걸 현범은 놓치지 않았다. "공동 프로젝트라니.........금시초문이다. 어떤 내용이며, 미국의 카운트·파트너는 누구인가?" "구두지만, 이미 합의가 되어 나의 의뢰인은 상당히 깊이 추진하고 있는데, 전연 모른다는 것은 유감이다." "어떤 내용이며, 상대는 누군가?" "동남아시아----홍콩이 최유력 후보지만---- 동남아시아에 대규모 봉제공장을 조인트·벤처로 설립하여 북두산업의 신개발품을 대량 생산, 미국에 수출하자는 내용이다." "북두의 신개발품?" "아마 봉제인형이겠지. 이 품목은 특혜관세 대상품목이어서 유리하지만, 국가별 쿼터로 묶여 있어 한국산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 이외의 지역에서도 생산하자는 것이다." "그건 좋은 아이디어다. 상대는?" "무어·캄퍼니. 들어본 적이 있는가? 무어·패밀리에 대해서......" "무어·캄퍼니? 무어·패밀리? 금시초문이다." 윤경식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대답했다. 담배의 불을 붙이는 윤사장의 손끝이 보일 듯 말듯 떨리고 있는 것을 현범은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윤사장이 등을 소파에 기대며, 자신을 건너다보는 제스처가 어딘지 모르게 의식적으로 꾸미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 친구, 무어·패밀리를 알고 있는지 모른다! 무어·캄퍼니는 잭슨 법률사무소가 커버하고 있는 단골 중의 하나였다. 단골 중에선 규모가 가장 작았기 때문에 그 회사 일은 곧잘 현범이에게 배당되었다. '페이퍼·캄퍼니' 같은 회사. 이것이 잭슨사무소 안에서의 무어 캄퍼니에 대한 평가였지만,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무어패밀리의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무어패밀리의 주력은 지하은행이었고, 적어도 무어 캄퍼니는 이 지하은행의 영업에 필요해서 만든 터널 회사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지하은행. 땅 속에 있는 은행이란 뜻이 아님은 물론이다. 지하은행이란 주로 무역거래에 있어서 비밀자금 조성이나 뒷거래 때 이용되는 금웅기관이다. 표면상으로는 다른 금융기관과는 다름없지만, 실제의 영업은 법률의 아슬아슬한 곳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법률 같은 것은 무시해 버린다. 유일한 자산은 자금과 신용. 예를 들어 미국의 A사가 일본의 B사와 거래를 했을 때, 실제 백만불 어치를 수입하면서, 신용장은 백 오십 만불에 연다. 차액 오십 만불은 A사의 비밀자금. 이를 정규은행을 통해 처리하면, 비밀자금이 될 수 없다. 은행에도 흔적이 남지 않고, 물론 회사 장부에도 기록되지 않게 해야만 비로소 비밀자금의 가치가 생긴다. 이렇게 만든 비밀자금은 주로 개발 도상국의 내셔날 프로젝트나 대형 플랜트 상담 때 뇌물로 이용한다. 지하은행은 대부분 프리· 포트인 홍콩이 본거지이지만, 세계각국에 사무실을 갖고, 현지 사무실은 고객이 원하는 통화의 자금조성을 도우며 이익을 올린다. 무어· 패밀리는 미국 서해안 일대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지하은행을 운영하고 있었다. "무어· 캄퍼니는 처음 듣는 얘기지만, 경우에 따라선 조인트·벤처는 계속 추진할 의향이 있다." "의향이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 이쪽을 얕잡아 보는 소리로 들린다. 프로젝트를 당장 재개하든가, 아니면 무어·캄퍼니에 대해 손해배상을 하든가......." "손해배상?" "음. 프로젝트가 재개되지 않으면, 여태까지 이쪽이 투자한 분에 대해 배상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정식 계약 전인데도 배상 운운하는 것은 당치도 않는 소리 아닌가!" "구두계약도 계약이다." "그럼, 구두 계약 했다는 증거라두?" "증거는 없다. 무어 패밀리는 신용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들. 신용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본때를 보인다." "협박인가?" "천만에. 내 의뢰인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 "어쨌든, 내일이라도 이쪽의 결정을 알리겠다. 호텔은 어딘가?" "미안하다. 오늘 하오에 홍콩에 가야 할 일이 있다. 일주일 뒤에 다시 연락하겠다. 그때 좋은 대답을!" 현범은 얘기를 마쳤다. 그리고, 업무는 끝났다는 투로 표정을 허물면서 윤사장에게 부탁했다. "저, 아기곰 인형, 하나 팔 수 없는가? 내 와이프에게 선물론 안성맞춤으로 생각된다." "오케이!" 윤경식 사장도 웃으며 응락했다. 딱딱한 얘기에서 겨우 벗어났다는 표정이었다. 현범은 윤사장이 인터폰을 통해 지시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물론, 윤사장은 이쪽이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줄 알고 있기 때문에 전연 신경을 쓰지 않고 말했다. "이봐, 아기곰 인형, 이 친구에게 선물하게 하나 갖고 오구......그리고 황인희 여사에게 전화 걸어서 지금 좀 만나자구 전해!" 윤경식의 말이 끝나는 것을 기다려 현범은 일어섰다. "그럼, 일주일 뒤에......." "오케이! 당신 부인에게 안부를......." 그들이 악수를 교환했을 때, 미스 문이 포장된 아기곰 인형을 들고 들어왔다. 동양계 미국 사람이 나간 다음, 뒤를 따르듯이 윤사장이 외출했다. ------한참 조용하게 지낼 수 있게 됐네. 문희경은 건너편 주옥이의 책상 위에 꽃을 향해 미소를 보냈다. 주옥이가 죽었다는 사실이 조금도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전화벨 소리 때문에 희경은 주옥이 생각을 오래 계속할 수 없었다. "네, 북두산업 비서실입니다." "희경이 있었군!" 강연숙이었다. " 어머, 웬일이세요?" " 응, 오늘 저녁이나 같이 할까 해서...... 어때, 시간낼 수 있겠어?" "조금 늦어지겠지만......." "그럼, 7시에 P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괜찮지?" "네." "박주옥씨, 참 안 됐어! 희경인 나보다 더 가슴이 아프겠지?" "꿈 같아요! 언니가 죽었다는 게......." "꿈은 빨리 깨야 해요! 그래야 아침을 맞을 수 있거든!" 연숙이의 밝고 빠른 목소리가 끊긴 뒤에도 희경이는 한참 동안 수화기를 든 채로 있었다. 10. 미행 뜻밖이었다. 황인희 여사가 장병원에 들리기 시작한 것은 현범으로선 예기치 못했던 일이었다. 북두산업 윤경식 사장과 만나고 있을 때, 윤사장이 황인희 여사와 만나게 약속하도록 지시하는 것을 듣고, 적잖은 흥미를 느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황인희 여사의 아파트 앞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윤경식이가 다녀간 다음, 그가 무슨 일로 찾아 왔는가를 물어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황여사가 서둘러 외출을 한 것이다. 그래서 뒤를 쫓았다. 그것이 장병원. 자기가 확인한 것만도 이번이 세번째였다. 황여사라고 병원을 찾지 말란 법이 없는 건 두 말 할 나위도 없었다. 다만, 뒤쫓아 들어간 현범이의 물음에 대답한 수부 아가씨의 말이 뜻밖이었다. "그 아줌만, 특실 환자의 가족이에요!" "특실 환자? 누군데?" "모르겠어요, 저희들은...... 원장 선생님이 직접 보시니까요. 간호원도 수간호원 언니밖엔 못 들어가요! 그 방엔.........." "언제부터였지? 그 특별실 환자는?" "그것두 모르겠어요! 한 두어 주일 됐나? 아니, 한달째인가? 그런데 누구시죠? 손님은?" 하고 되묻는 바람에 그는 병원을 뛰쳐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황여사가 문병을 다니는 특별실 환자. 그것보다 장동렬의 삼촌이 경영하는 병원에 그 환자가 입원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원장인 돌렬이의 삼촌이 특별히 보살피고 있다는 게 관심을 끌었다. " 우리 삼촌? 명의지, 둘도 없는...... 그러나 그건 병원 경영면에서 명의란 뜻이야! 인술은 상술이란 철학의 신봉자야! 내가 환자라면, 절대로 가서는 안될 첫번째 병원으로 우리삼촌 병원을 꼽을 거야!" 장동렬의 말이었다. 수완가임에 틀림없는 닥터 장이 특별히 보살피는 환자라면, 그만큼 가치가 높은 환자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그는 동렬이를 통해 그 환자의 정체를 알아보기로 마음먹고 자기 아파트로 돌아온 것이다. 무엇보다 급한 것은 무어 컴퍼니나 무어 패밀리와 윤경식과의 관계를 알아보는 일이었다. 적어도 윤경식은 무어 캄퍼니는 몰라도 무어 패밀리 중 어느 한쪽을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그는 판단을 한 것이다. L A 잭슨 사무소엔 아무도 없었다기보다, 무어 패밀리와 윤경식의 관계조회를 부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잭슨씨라면 오후 7시께 집으로 연락하라"는 대답에 연락 닿는 대로 즉시 이쪽으로 전화를 걸어 주도록 부탁하고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다. L A의 오후 7시는 서울의 정오. 그는 오늘 점심은 찬 우유와 딱딱한 빵조각으로 때울 수밖에 없다고 마음을 굳히고 커피포트의 스위치를 넣었다. 막 커피와 우유를 마시기 시작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잭슨으로부터였다. "무슨 일이야? 그렇게 서두는 건.........." "한 가지, 미스터 잭슨의 도움이 필요해서...... ." "거긴 서울이야. 그런데두 미스터 박이 아니구 나한테 도움을 청해?" 미스터 박은 박인규 변호사였다. 잭슨 법률사무소와 업무제휴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현범의 방한 연수가 실현된 것이다. "그것보다 무어 패밀리가 한국과 가졌던 거래 관계를 알고 싶은 데요. 특히 윤경식 현명준, 되풀이합니다. 윤경식 현명준 또는 태양상사의........." "그건 알아서 뭣하게?" "미스터 잭슨! 내가 서울에서 하는 일도 일일이 보고해야 합니까?" "알았어! 6시간 뒤에 미스터 박 오피스로 텔렉스를 넣을게!" 잭슨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현범은 식은 커피를 버리고 다시 뜨거운 커피를 따라 마시면서 생각했다. 잭슨씨는 어느 쪽이냐 하면 묘한 데서 옹고집을 부리는 데가 있기 때문에 이쪽에서 다시 전화를 해서 박변호사 사무실이 아닌 자기 아파트로 직접 전화해 달라고 부탁해 봤자, 허사임을 현범은 알고 있었다. "여섯시께라면.........." 현범은 길게 하품을 하다가 후딱,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오 여섯시라면, 강연숙과의 약속이 겹쳐지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엔 약속을 어기지 않을 수 없게 된 것 때문에 그는 조금 당황해지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느 쪽을 포기할까? 그는 망설이면서 주머니에서 동전을 끄집어냈다. 6시께, 박변호사 사무실로 들어 올 잭슨씨의 텔렉스 내용도, 궁금증 때문에 늦출 수 없었고, 강연숙에게 또 구구한 사정을 말하기도 싫었다. 어느 쪽과의 약속을 어기든 잠자코, 시침 뚝 떼고 어기기로 마음을 정한 다음, 그는 동전을 높이 던졌다가 받아서 식탁 위에 올려놓고 손을 덮었다. ------표면이 나오면 강연숙과의 약속을 지키고, 뒷면이 나오면 박변호사 사무실로 간다! 그는 손을 뗐다. 동전은 뒷면이었다. 그는 씩 웃으면서 테이블 위의 아기곰 인형에게 윙크를 했다. 아침에 북두산업에서 얻어 온 인형, 죽은 박주옥이가 갖고 있던 것과 똑같이 생긴 인형이었다. 그는 강연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숙이는 없었다. 그는 동렬이에게 전화를 걸어 여섯 시의 연숙이와의 약속을 두 시간만 늦춰 주도록 연락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아무래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여섯 시의 약속은 연숙이가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지만, 실은 자기가 북두산업 비서실의 문희경을 불러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문희경에게 그렇게 큰 기대를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녀가 죽은 김칠성 사장의 비서였다고 했기 때문에 뭔가 얘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버릴 수 없었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 처음부터 왜 했누?" "일이 그렇게 됐어!" "일은 네가 저지르고, 할퀴기는 내가 할퀴라는 얘긴가?" "자네의 웅녀니까, 할퀴든, 핥기든, 그건 자네 사명 아닌가! 또 한 가지 수고해 줘야 할 게 있어!" "또 수고란 뭔가? 자넨 보자 보자하니까, 손 안대고 코 풀겠다는 사람이군!" "미안. 자네 삼촌 병원에 흥미 있는 환자가 한 사람 있는데 좀 알아 봐 주겠어?" "어떤 환잔데?" "특실 환자, 자네 삼촌이 직접 보살피는.........." "그럼 돈 많은 봉이겠지!" "그런지도 몰라. 하지만, 황인희 여사가 문병을 다니는.........." "뭐? 황인희 여사?" "그래! 어때? 흥미가 있지?" "중년 미망인이 바람이 났나?" "어쨌든 부탁해!" 현범은 전화를 끊으면서, 아기 곰에게 눈길을 던졌다. 지금부터 한참 동안은 저놈이나 안고 뒹굴어야겠군, 하고 그는 아기곰에게 다시 윙크를 보냈다. 강재훈 형사가 젊은 형사를 데리고 P 호텔 디스코 텍에 들렸을 때는 점심시간 직전이었다. 오늘이 두 번째의 방문이었다. "강형사님두, 뒤늦게 디스코 바람이 대단하군요!" 뒤를 따르던 젊은 형사가 농을 걸었지만, 그는 농을 주고받을 그런 처지가 못되었다. 백영철로부터 "주옥이가 토요일에 P 호텔 디스코 텍에서 춤을 추다가 누군가에게 쫓긴 것 같다"는 전화 연락을 받은 것은 어제 하오. 백영철이 관광객과 함께 출장을 떠나면서 전화를 걸어 준 것이었다. 재빨리 그 디스코 텍을 찾았지만, 들을 수 있었던 얘기는 벌게 없었다. 백영철이 자기에게 전화로 얘기해 준 상황을 재확인했을 뿐이었다. "그 여인이 무대로 뛰쳐 올라갔다면, 뒤쫓아 온 남자들도 같이 뛰쳐 올라갔을 게 아냐?" "그렇죠. 무대 뒤로 해서 나다니는 통용문이 있습죠!" "그렇담, 밴드의 누군가는 그 남자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렇습죠. 그날 연주했던 밴드라면.........." 지배인이 손을 부비며 공손하게 설명했다. 이 디스코 텍에는 밴드가 3조 있어서 삼일 교대로 연주한다는 것, 그날 사건이 있었던 날의 밴드는 내일이라야 만날 수 있다는 것 등이었다. "그럼, 오늘은 그 밴드는 어디서 연주를 하누?" "어딘가서......." 결국 웨이터들의 얘기만 듣고 돌아온 것이다. 그런 강형사에게 이튿날, 지배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던 것이다. "지금, 밴드가 도착했습니다. 저녁 영업 시간보다는 지금이.........." 그래서 달려온 것이다. 조명이 번쩍이고, 요란할 것으로만 생각했던 디스코 텍도 낮시간은 오히려 적막하게까지 느껴졌다. 밴드 멤버들은 이곳저곳에 적당히 흩어져서 악기를 매만지거나 웨이터들과 어울려 T V 낮 프로그램을 즐기고 있었다. 개중에는 카운터 뒷편에서 라면을 끓여 점심을 준비하기도 했다. "저기, TV를 보고 있는 저 친구입니다. 드러머죠. 저 친구가 그날 뒤쫓던 남자들의 얼굴을 기억 할 수 있을 것 같다더군요!" 지배인은 강형사 일행을 맞으며 설명한 다음 드러마를 불렀다. "괜찮아요! 내가 가서 듣지!" 강형사는 TV쪽으로 다가 갔다. 펀치파마로 머리칼을 흑인처럼 곱슬곱슬하게 한 젊은이들이 서넛 모여 앉아 있었다. "어이, 미스터 김!" 지배인이 그 중의 한 사람을 불러 세웠다. 김이란 청년은 이쪽으로 눈길을 던지며 부시시 일어났다. 모처럼 즐기는 TV를 방해 당해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숨기려 하지도 낳았다. "괜찮아! TV를 보며 얘기를 나눠도 무방해!" 강형사는 신분을 밝힌 다음, 지난 번 사건에 애해서 묻기 시작했다. "당신이라면 그 중의 한 사람의 얼굴을 기억할 수가 있다더군?" "기억하고 있죠. 나뿐 아니라, 누구든 한번 보면 잊지 않을 겝니다. 뺨에 흉터가 있었으니까요!" "어떤?" "칼 자욱이었는지도 몰라요!" 청년은 TV를 열심히 보면서 대답했다. TV프로그램은 무술시범이었다. "당신, 무술에 꽤나 흥미가 있나 보군!" "한때는 사범 노릇을 할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앗!" 젊은이는 짧게 부르짖었다. 그 소리에 이끌려 강형사도 TV 에 눈길을 던졌다. 푸른 도복을 입은 사람의 시범이 시작되고 있었다. "왜? 왜 그렇게 놀라지?" "저 사람, 틀림없어요! 저 사람이 그날 무대 위로 뛰어 올라왔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에요! 보세요, 왼쪽 뺨의 흉터!" 화면에는 못을 수없이 박은 판자 위를 태연히 걷고 있는 푸른 도복의 얼굴을 클로즈업시키고 있었다. "틀림없나?" "틀림없어요!" "어이!" 강형사는 저쪽에서 웨이터와 어울려 있는 젊은 형사를 불렀다. "빨리 방송국에 전화해! 이봐, 이거 몇 채널이야?" "결국, 뭡니까? 헛물만 켠 것 아닙니까? 이 무더위 속에서 ......." "헛물이 아니라 얼음물이지!" "하긴......강형사님두 때로는 유모어 센스가 있긴 있군요!" 만리동 고개 마루턱의 빙수집. 강형사와 젊은 형사는 팥빙수로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실은 더위를 식히는 것이 아니라, 맥 빠진 다리를 주체할 수 없어 들렸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몰랐다. -------- 범인은 잡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호텔 디스코 텍을 뛰쳐나온 강형사는 드라마와 함께 방송국으로 직행했다. 방송국에서 다시 VTR로 확인하면서, 거기 등장한 무술인이 청운도장의 수석사범이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VTR은 한달 전의 특집 프로그램이었고, 오늘 낮에 재방영한 것이란 것도 확인했다. "그래야 얘기가 맞어 떨어지지! 범행한 며칠 뒤 얼굴을 쳐들고 TV에 나올 바보는 없거든!" 방송국을 나오면서 디스코 텍의 드라마는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 둔 다음 돌려보냈다. "참고인으로 계속 폐를 끼칠지 모르니까, 그때 협조 바랍니다!" 강형사는, 나이 어린 드라마에게 머리를 숙여 부탁할 만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휘파람이라도 불듯이 택시를 잡아 청운도장을 찾아 만리동 고개까지 온 것이다. 하지만, 그 여유는 삼십분도 안되어 허탈로 바뀌었다. "김사범은 분명히 우리 도장 소속이었죠! 보름 전까지는.........." "그만 뒀다는 게요?" "네. 해외 공연이다 뭐다 하면서 그만둬 버렸어요. 아마 지금쯤은 홍콩이나 동경에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 사람, 집은 어디요?" "글쎄...... 이 도장에서 먹고 자고 했으니까, 따로 그런 것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던 것 같군요!" "그럼, 주민등록도 이 도장 주소라는 거요?" "아마도......." 그 이상 물어볼 것이 없었다. '강형사를 맞아 주었던 중년의 남자는 도장의 부관장이라고 했다. 관장인 청운도사는 반년 전부터 입산수도에 들어가고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부턴,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다니?" "유력한 단서는 막다른 골목에서 줄이 끊겼고......." "이봐, 젊은이가 노인처럼 체념을 빨리 하면 장가도 못가구 죽어 버린다구!" "강형사님을 보면, 장가간다는 게 꼭 행복하지만은 않더군요!" "예끼! 이 사람!" 강형사는 붉어진 얼굴을 웃음으로 숨기려 했지만, 색깔을 주름살로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소문난 공처가였다. ------ 출퇴근이 일정치 않은 박봉의 사내가 살아갈 길은 공처가 노릇하는 것밖에 없다! 어쩌다 가벼운 술자리에서 그렇게 기염을 토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공처가라고 놀림을 받으면 얼굴을 붉혔다. 그만큼 순진했던 것이다. "이봐, 막다른 골목이 아니야! 적어도 청운도장이 어떤 곳인가, 실제로 그 수석사범이란 친구--- 그래 김규식이란 친구가 출국을 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어!" "어떻게 확인하나요?" "이런 멍청이! 얼음물에 머리까지 꽁꽁 얼어붙어 버렸나? 자넨?" "아뇨!" "자, 자넨 지금부터 청운도장의 운영상태, 구성요원, 주변의 소문, 원생들의 태도 같은 것을 캐보라구! 난 김규식의 출국여부를 알아 볼테니까! 저녁에 다시 만나!" "하지만.........." "하지만 뭐야!" "형사는 2인 1팀이 되어 움직이는 게 원칙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네하고 나하고 한 팀이잖아!" 강형사는 시침을 떼고 소리를 질렀다. 말은 젊은 형사의 말이 맞았다. 사복근무는 2인 1팀이 원칙이었다. 그래야 예상되는 위험에 대응할 수도 있고 또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혼자 적당히 일 하는 것도 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형사는 지금 자기가 젊은 형사에게 지시한 정도의 일이면, 혼자 훙분히 해낼 수 있고, 또 위험도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사건 담당인 자기보다도 퇴역한 백영철씨가 정보에서 앞지르고 있는 것에 초조하기도 했다. 비록 조카딸이 죽은 사건이어서, 그런 것은 당연할지 모르지만, 이쪽의 프라이드는 그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저녁에 백영철을 만날 때, 이쪽이 여유를 갖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럼 수고해!" 강형사는 손을 들어 보이고 얼음 가게를 나왔다. "강형사님! 잠깐만!" 젊은 형사의 부름에 그는 뒤를 돌아봤다. "뭐야?" "빙수값 내고 나가셔야죠!" "자네가 내면 안돼나?" "선배에 대한 예의도 있으니까요!" "예의 좋아하는군! 걱정말아! 벌써 냈으니까!" "오늘 꼭 내려 가시겠다는 거예요? 누님!" "그래. 내려가야지. 여기 앉아서 울고 있다고 해서 주옥이가 살아올 것도 아니구......." 백영철은 주섬주섬 보퉁이를 싸고 있는 주옥의 어머니--- 자기의 누님을 건너다 보다간 눈길을 돌려 버렸다. 나이 차가 두 살밖에 되지 않은 주님의 모습은 적어도 자기보다 십년은 늙게 보였다. 결혼을 두 번 한다는 것 ----농담으로는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당사자로서는 절대로 행복하지 않은 일이란 것을 주옥의 어머니는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백영철은 1박2일의 출장에서 막 집으로 돌아 온 것이다. 강재훈 형사와는 여전히 연락이 닿지 않았고, 별달리 서둘러야 할 일도 없었다. 강형사에겐 집으로 연락을 해달라는 메시지를 남겨 두었다. 며칠 전 황인희 여사를 미행했던 자동차 번호의 결과도 확인되었다. 그 자동차는 렌터카였다. 빌린 사람은 미국인 헨리· 조였고, 두 주일에 걸친 장기 계약이라고 했다. 헨리· 조라는 미국인의 주소는 강남의 아파트. 한 번쯤 그가 어떤 친구인가 알아보고 싶었지만, 이 대낮에 아파트에 죽치고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오늘밤 늦게나 내일 새벽에 가보기로 마음을 바꾼 것이다. 그것보다는 주옥이의 뒤처리가 궁금했었다. 명색이 외삼촌의 입장에서, 흉사 뒤처리를 보기에 따라서는 너무 소홀히 한 것 같기도 했다. 주옥이는 검시가 끝나서 이미 매장된 뒤라고 했다. "화장을!" 하는 주위의 권고가 있었지만 주옥의 어머니가 우겨서 공동 묘지 한 모퉁이에 매장을 했다는 것이다. "동생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무척도 바쁘군!" 보퉁이를 다 싼 주옥의 어머니가 백영철에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누님! 하지만, 주옥이를 치고 뺑소니를 친 녀석을 내 손으로 꼭 잡겠습니다!" "동생은 아직도 형사인가 뭐?" 백영철은 입을 다물었다. 구구한 사정을 설명해봤자 소용도 없었고, 적어도 누님이 저 정도라도 속에 먹은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자기뿐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꼭 오늘 내려 가시겠담, 저하고 주옥이한테 잠시 다녀서 가시죠!" 백영철은 일어서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래 주겠어? 집을 비워두 괜찮아?" "괜찮아요! 그런 거 편리하라고 하는 아파트 생활인데요 뭐!" "동생댁은 언제 올라오지?" "이번 주말쯤이면.........." 하다가 백영철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손주 해산 뒷바라지가 중요하다고 해도 조카딸 죽음을 팽개친 건 너무 하잖냐, 하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백영철은 누님을 태운 다음 주옥의 묘지로 차를 몰았다. 묘지를 거쳐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누님을 전송하더라도 시간은 충분했다. 차 안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백영철은 말을 줄였다. 자칫했다간 누님이 꺼억 꺼억 울음을 터뜨릴까봐서였다. 개가한 새 남편과 새로 난 자식과 옛 남편의 자식을 함께 보살펴야 하는 여인의 미묘한 콤플렉스를 그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주옥이의 묘는 공동묘지 한쪽 구석 외진 곳이었다.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 주옥이 묘 앞에는 꽃이 놓여 있었다. 아직도 그렇게 시들지 않은 걸 보면, 갖다 둔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이 보였다. "누굴까? 주옥이한테.........." 주옥의 어머니는 치맛자락으로 코를 싸면서 주저앉았다. "누님이 갖다 둔 것 아니에요?" "내가? 아니야! 누굴까? 혹시 누군가가 잘못 알고 갖다둔 걸까?" "하긴...... 하지만 주옥이에게도 잊지 못할 남자 친구가 있었는지 모르죠!" 그렇게 말하던 백영철은 입을 다물었다. 주옥이는 김칠성 사장의 애인, 죽은 주옥의 묘에 꽃을 갖다둘 남자 친구가 따로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여자 친구라면 몰라도...... "그렇지만, 이 평일에 이곳까지 꽃을 갖고 올 수 있는 사람은 직장이 없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고 그는 막연히 계산하고 있었다. 주옥의 어머니를 전송하고 돌아왔을 때 그를 맞은 것은 강재훈 형사의 전하였다. 내일 새벽 일찍 집으로 들리겠다는 말만 남기고 바쁘게 끊긴 전화였지만, 백영철로서는 더없이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실은 박주옥이를 쫓아갔다는 사람을 알긴 했는데.........." 이튿날 새벽같이 들이닥친 강재훈은 전날 낮에 있었던 일을 백영철에게 설명했다. "출국했다는 건 사실이던가, 그 도사라는 사람?" "도사가 아니구, 사범입니다. 이름은 김규식- 출국했더군요. 지난 월요일 첫 비행기루.........." "월요일 첫 비행기? 그럼, 주옥이가 죽은 다음 아닌가!" 강재훈은 먼저 김규식에 대한 여권이 한달 전에 발급된 사실을 확인한 다음 출국자 리스트에서 그의 출국 사실을 확인했었다. 행선지는 일본이었다. 그리고 청운도장의 관장은 입산 수도중인 청운도사이지만, 후원회 회장엔 태양상사 회장 현명준의 이름이 있었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돈 많은 사람이니까, 도사 후원 쯤 즐거운 도락이겠지!" "백선배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담?" "이렇게는 생각해 볼 수 업나요? 박주옥이는 자기가 근무했던 회장이 뒤를 보살피고 있는 도장의 사범에 쫓기다가 뺑소니 사고를 당했다! 박주옥이가 무엇을 했길래, 그런 변을 당해야 했냐구는 생각할 수 없나요?" "그렇군! 가만있자.........." 백영철은 비로소 정진대 생각이 났다. 주옥이가 정진대의 소재를 알아 달라고 부탁했던 것, 풍년농원이 정진대 것인지도 모른다고 했던 것, 그 풍년농원을 다녀온 주옥이가 회사를 쉬면서 외출을 삼갔던 것들이 한꺼번에 생각났다. 그리고 또 있었다. "주옥이가 어떻게 되긴 된 것 같았어! 죽으려구 환장이라두 했지. 글쎄 회사를 쉬려면 그냥 쉴 것이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구 거짓말을 하다니...... 회사에서 조문온 사람 때문에 혼이 났다구. 겨우 외삼촌한테 있을지 모른다구 일러주긴 했지만......." 주옥의 어머니, 누님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주옥이가 쉬고 있을 때, 시골집으로 누군가가 찾아갔었고, 주옥이 있을 만한 곳이 외삼촌 집일 것이라는 것을 주옥의 어머니가 일러 주었다는 것이다. "아니, 선배님. 그런 중요한걸 이제 일러 주면 어떡합니까? 그래도 형사 출신입니까?" 강재훈은 정말 하가 난 것 같았지만 백영철은 쿡 웃고 말았다. "왜 웃습니까? 내가 잘못 말 했나요?" "아니, 그래두 형사라니...... 자네 말이 죽은 주옥이 말하고 너무 같아서 갑자기 웃음이 나오는군!" "그랬군요. 아까운 사람이 비명에 갔군요. 선배님을 그래두 형사냐고 몰아붙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주 우수한 사람인데......." "너무 자찬하지 말아!" "우선 정진대를 찾아야겠군요! 그 금고털이 녀석이 직업을 바꿔 버렸나?" "그것보다 나하고 함께 가야 할 곳이 있어. 지금 곧!" "어딥니까?" "강남 아파트!" 백영철은 강재훈형사를 데리고, 헨리 조라는 미국인이 묵고 있는 아파트를 찾았다. 아무래도 혼자보다는 경찰관을 대동하고 가는 것이 떳떳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또 뭡니까?" "어쩐지, 관심이 가는 사람!" "어쩐지 관심이 간다구 새벽같이 쳐들어 갈 순 없잖습니까? 더군다나 외국인이라면......." "적당히 핑계를 찾으라구!" "어떤 핑계를 댑니까?" "그건 자네가 생각해! 그래두 자넨 현직 형사 아닌가!" ......아파트에 도착한 건 새벽 6시. 아파트 앞 주차장에는 낯익은 번호의 렌터카가 주차하고 있었다. 헨리·조는 가운 바람으로 두 사람을 맞아 주었다. 근처에서 간밤에 도난 사고가 있어서 이렇게 탐문하고 있다고 강재훈이 설명을 했다. 그의 영어는 옆에서 듣기에도 민망스러울 정도였다. "수고가 많군요. 좋으시다면 한국어로 말씀해도 저는 무방합니다만......." 헨리·조의 유창한 한국어에 강재훈은 입을 벌렸다. 강재훈이 헨리·조와 얘기하는 동안 백영철은 거실을 이곳저곳 살폈다. 이 미국인이 강연숙과 자주 만나던 어딘가 낯익어 보이던 그 청년임을 깨달은 그는 흥분을 그렇게 해서 눙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저쪽 테이블 위에 얹혀 있는 아기곰 인형에 눈이 갔다. 그것은 죽은 주옥이가 들고 나갔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는 헨리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물었다. "실례지만, 저 인형은 누구 것입니까?" "제 것입니다. 여긴 저 혼자 머물고 있으니까요!" "어디서 난 것입니까?" "왜 그러시죠? 당신도 인형에 관심이 있나요?" "조금은....... 실은 사고로 죽은 여인이 이것과 똑같은 인형을 갖고 있었는데, 현장에는 없었거든요!" "이게 그 인형이란 뜻입니까?" "아니, 그런 뜻은 아니구...... 혹시 어디서 샀는지를 알고 싶군요." "시중에선 팔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전 메이커에서 직접 얻었습니다만......." "어딥니까? 그 메이커란 곳은." "그것보다 사고로 죽은 여인이라면, 지난 일요일 새벽 뺑소니차 사고의?" "당신도 아는군! 박주옥이의......." 옆에서 듣고 있던 강재훈이 끼여들었다. "알고 있죠. 뉴스를 봤으니까." "어딥니까? 당신이 인형을 얻었다는 회사는?" 백영철이 조용하게 다시 물었다. "북두산업이라구 하는 곳입니다." "북두산업?" 백영철의 되묻는 소리는 비명에 가까웠다. "왜 놀랍니까? 이 인형, 보기보다 재미있더군요. 여기 이 레버를 돌리면 멜로디와 함께 향기까지 흘러나오죠!" 헨리 조는--현범은 백영철 손에서 인형을 받아 레버를 돌렸다. 정말 앙증맞게도 멜로디와 향기가 흘러나왔다. "이거, 재미있는데!" 강재훈형사가 감탄을 하면서 인형을 집어들었다. "북두산업이 핵심 상품으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건. 국내판매는 없구. 전량 수출이라고 하더군요." 인형에 조금은 정신을 뺏긴 두 사람을 건너다보면서 헨리가 말을 이었다. "도난사건 탐문수사를 하는 사람들치고는 한가하시군요. 인형에 넋을 뺏기다니......." "이 인형, 하루 이틀 빌려줄 수 없을까요?" 하고 백영철이 물었다. "뭣하시게요? 인형을 빌려서......." "조금은 관심이 가는군요.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어느 사건 피해자가 똑같은 인형을 갖고 있었는데, 현장에는 없었다 이럽니다. 이 인형이 단서가 될 수도 있다는 기대를 주는군요!" "없어졌다는 인형과 이 인형이 똑같다는 건 뭘로 판단한 겁니까?" "분위기죠. 그리고 인형의 눈 빛깔." "곰의 눈빛깔?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압니까? 당신도 보신 적이 있나요?" "네. 피해자는 내 조카딸, 내 집에서 기거했으니까요!" 백영철의 대답에 헨리는 입을 다물었다. 이 사람이, 박주옥인가 하는 여인의 삼촌이었구나, 하면서 세상이 좁긴 좁다고 그는 생각했다. "좋습니다. 하루 동안, 내일 아침에는 돌려주시기를......." 백영철은 고맙다고 예를 표한 다음, 헨리에 대한 몇 가지를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가 미국 L A 잭슨 법률 사무소 소속의 변호사라는 것, 한국계 미국인이란 것, 방한 목적은 공/사용 겸용이란 것 등을 머리 속에 기억시키면서 밖으로 나왔다. 그는 한국에 친척이 전연 없다는 헨리라는 변호사가 강연숙과 자주 만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황여사의 뒤를 쫓아간 것 등에 대해서는 좀 더 캐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주옥이의 검시결과를 들려주겠나?" "그러죠! 이제야 겨우 그쪽으로 관심이 돌아왔군요!" 백영철은 자기 사무실 소파에 강재훈과 자리를 함께 하면서 물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니까, 같이 차나 나누고 헤어지자고 백영철이 강재훈을 끌고 온 것이다. 아직 여직원도 출근하지 않은 시간이어서 백영철이 손수 커피를 끓여 들고 나왔다. "주옥이의 사인은 목뼈가 부러진 것이 치명상입니다. 다리랑 하체 부분의 골절은 의사 말로는 사망 뒤에 입힌 것이라고 하더군요. 사망 추정 시간은 일요일 새벽 1시 전후, 술을 조금 마신 것 같지만, 취할 정도는 아니었구, 마약 상습의 흔적도 전연 없었다고 합니다. " "가만, 목뼈가 부러진 것이 치명상?" "네!" "그럼, 교통사고는 아니라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덤프트럭이라고 해도, 목뼈를 부러뜨릴 높이는 아니니까요!" "목뼈의 골절 원인은?" "외부로부터의 타격입니다." "흠,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검시 결과에 대해서?" "처음부터 백선배님이 생각했던 애로 아닙니까? 숨진 피해자를 뺑소니를 가장해서 버렸다는 것은.........." "그런 범인이 주옥의 목에 걸린 핸드백을 그냥 둬 둔 건 이상하지 않아?" "당황했겠죠! 주옥이가 죽은 것, 아니 죽인 것은 범인들이 예상치 못했던 것인지도 모르죠! 그래서 엉겁결에 짜낸 지혜가 뺑소니였을지도 모르죠!" "그 무술사범이란 일당이 범인인가?" "주옥이를 뒤쫓은 것은 그들이죠. 그리고 그 중의 하나는 월요일에 출국했다는 것도 수상하구요!" "무술사범들의 배후는?" "그 도장후원회는 태양상사 현회장이 회장으로 되어 있다는 것밖엔 아직...." "그렇담, 태양상사의 비밀을 주옥이가 쥐고 있었다는 얘기도 되는군!" "추리소설식으로 생각한다면 그렇죠!" "가만있어! 그래, 어쩜 이 인형이 그 비밀일지도 모르겠군! 주옥인 이 인형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거든!" 백영철은 그렇게 말하면서 인형을 강재훈 형사에게 건넸다. "아무래도 주옥이가 갖고 나갔던 이런 인형이 없어진 게 마음에 걸려! 하긴 북새통에 어디서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일단 이 인형을 잘 살펴봐 주게." "해부라도 해보라는 겁니까? 봉제인형을?" "웅담이 나올지도 모르지! 곰이니까! 그리구......." "그리구 또 있습니까?" "기분 같아서는 자네하고 함께 뛰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잖은가? 정말 잘 부탁하네!" 백영철은 강재훈의 두손을 잡고 흔들면서, "이젠 손을 떼구 회사일을 하도록." 한 현계환씨의 말이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OB로서 할 수 있는 한계를 분명히 하라는 뜻으로 그는 해석했다. 강재훈형사가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백영철은 사장실로부터 인터폰을 받았다. "조카딸은 정말 뭐라고 말할 수 없군. 안됐어!" "염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그건 그렇구...... 구로가와· 메이ㅅ이란 한국사람, 어떻게 됐지? 어렵다면 신문에 광고라도 낼까 하는데....... 오오무라라는 친구, 모레면 입경하니까 말야!" "대체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오후에 보고드리죠!" "그 중에도 알아보고 있었군! 과연 전직 수사관은 달라!" 사장의 만족해 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백영철은 전화 번호부를 뒤졌다. 구로가와·메이ㅅ. 현계환씨 말대로 라면 현명준, 태양상사의 회장이었다. 그가 일본 코오베 출생이라면, 오오무라가 찾는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태양상사 인사부 직원은 현명준 회장이 일본 코오베 출신임을 확인해 주었다. 백영철은 다시 태양상사 비서실로 전화를 걸어 현회장과의 면회신청을 했다.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전화에 나온 여비서는 깐깐하게 물었고, 백영철은 끈기 있게 참아서 마침내 현회장이 전화에 나왔다. "내가 현이오!" 묵직한 목소리에 백영철도 따라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전, F 여행사 백영철이라고 합니다. 전화로 실례함을 양해해 주셨으면......." "F 여행사! 용건은 뭐요? 여행사서......." "혹시 회장님의 창씨명--- 죄송합니다만 일제 때의 창씨명이 구로가와 메이ㅅ이 아니었나 하구요......." "여행사선 사람들의 몇 십년 전 먼지까지 터나요? 그때 창씨 한 게 지금 무슨 문제가 된다는 거요?" 목소리엔 완전히 불쾌함이 나타났고, 곧 전화를 끊을 태세였다. "죄송합니다. 실은...... 구로가와· 메이ㅅ을 찾아 달라는 일본의 유력자의 부탁을 받은 처지여서......." "그게 누구요?" "현회장님의 창씨명이 구로가와 메이ㅅ임이 분명하시군요!" "그래, 날 찾아 달라는 게 누구냐고 묻질 않소!" "오오무라·요시오라구 ......." "오오무라가? 새삼스레 왜 그런답디까?" "그러심 아시는 사이입니까?" "작년에도 다녀갔소! 그 친구 벌써 망령이 났나? 새삼스레......." "작년에도 만나셨어요? 그게 정말입니까?" "이봐요! 내가 당신한테 거짓말 할 이유가 뭐요? 벌 싱거운 일 다 보겠군!" 현회장의 전화가 끊기자 백영철은 이마에 땀을 닦으며, 의자에 벌렁 자빠졌다. 이상했다. 한쪽은 몇 십년 전, 젊었을 때의 친구를 이번 방한 때 만나고 싶다고 부탁을 하고 있는데, 그 상대자는 작년에도 만났다고 하고 있지 않는가! 어쩌면, 현명준이 구로가와·메이ㅅ이 아니거나 또 현명준회장이 알고있는 오오무라·요시오는 동명이인이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그건, 두 사람이 만나게 되면 판가름이 날 것이고 지금 또 다른 구로가와 메이순을 찾는다는 것도 어렵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사천 만 명이 살고 잇지만, 창씨명과 출생지와 연배가 똑같은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 동명이인을 헛짚고 있는 게 아니면, 뭔가 있다! 백영철은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생각하는 것이 형사시절 때의 패턴을 벗어날 수 없음에 혼자 쓴웃음을 흘렸다. 노천 주차장 한쪽 모퉁이에 차를 세운 현범----헨리 조는 시계를 봤다. 여섯 시 정각. 시간은 충분했다. "윤경식 사장이 일곱시 삼십 분에 태양상사 현회장과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고 문희경이 알려온 것은 조금 전이었다. 그 알림에 현범이는 서둘러 북두산업이 단골로 이용하고 있는 주차장으로 달려온 것이다. "만나는 장소는?" "몰라요! '거기서 뵙겠다' 고만 했으니까요!" 희경이의 말이었다. 일곱시 삼십 분 약속이니까, 빨라도 여섯 시 삼십 분 이전에는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계산한 현범이는 일찌감치 주차장에서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주변을 둘러본 현범은 제일 안쪽 구석에 주차해 있는 윤경식의 승용차를 확인한 다음, 운전석 시트를 뒤로 젖혀 벌렁 누웠다. 얼굴에는 신문을 덮어 낮잠을 즐기는 것처럼 했지만, 물론 신문엔 구멍을 뚫어 윤경식 자동차를 살필 수 있게 했다. 문희경은 정말 깜찍하고 밝았다. "김칠성 사장 때문이니까, 도와달라" 는 현범의 부탁을 한마디로 받아들여 주었다. 어젯밤의 일이었다. 물론 강연숙의 보증이 있어서. 문희경이가 단번에 현범을 믿은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었다. 윤경식사장을 찾았던 현범은 무어 패밀리라는 현범의 말에 보였던 윤사장의 미묘한 반응을 주목한 것이다. 그래서 강연숙에게 문희경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잭슨씨의 텔렉스 수신 때문에 처음 약속보다 훨씬 늦게 나타난 현범이는 강연숙으로부터 걸레조각이 되도록 윽박지름을 당했지만, 일은 제대로 된 셈이었다. 희경이는 재깍 윤사장과 현회장의 오늘 저녁 약속을 알려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 현범의 안주머니에는 잭슨씨가 박인규 변호사 사무실로 보낸 텔렉스가 들어 있는 것이다. 무어 패밀리는 태양상사에 대해 80만 달러의 채권이 있음. 이는 무어 패밀리에게 지불해야 할 파리의 아랍 픽서의 채무를 태양상사가 대불키로 한 것임. 이 텔렉스를 읽은 현범은 그러나 한동안 멍청해졌다. 무어 패밀리와 윤경식 사장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곤 짐작했었고 잭슨씨의 텔렉스는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텔렉스 내용대로라면, 태양상사와 무어 패밀리 사이에 북두산업이 끼어들 틈은 전연 없는 것이다. 뒷거래의 한 방법으로 태양상사의 규모로서는 무어 패밀리와 채무, 채권 관계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바로 태양이 북두산업을 재빠르게 손아귀에 넣은 직접 이유는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일곱 시가 거의 다 되었을 때, 현범은 몸을 일으켜 엔진을 걸었다. 저만큼 빌딩 입구에 윤경식이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윤사장은 문희경과 함께였다. 그 문희경은 주차장에서 나와 윤사장 앞에 박 멎은 자동차 문을 열어 윤사장이 타는 것을 기다린 다음 안으로 들어간다. -----사장이란 저런 재미도 있군! 현범은 윤사장의 자동차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바짝 붙어 따르다간 눈치를 챌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너무 쳐져 버리다간 놓칠 염려가 많았다. 더욱 하오 7시 전후는 오후의 러시아워. 현범은 모든 신경을 쏟아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윤사장 자동차는 남산 터널을 빠져 강남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봐! 차 좀 천천히 몰아! 미행하는 친구가 놓치면 쩔쩔맬 테니까!" 윤경식은 운전사에게 지시했다. 차는 한강 다리를 향하고 있었다. "사장님두 눈치 채셨군요! 떨어뜨려 버릴까요?" "말귀를 못 알아 듣는군! 저 차가 뒤를 쫓아 올 수 있게 적당히 몰라구 했잖아!" "알았습니다!" "미행당할 땐 미행을 떼어버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야! 역으로 이용해서 누가 뭣 때문에 미행을 하는지, 그걸 알아내는 게 중요해!" "알았습니다." "어때? 강변도로를 한 바퀴 돌아두 시간은 충분하겠지?" "네!" 윤경식의 지시를 받은 운전사는 차를 왼편으로 틀어 강변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러면서 백 미러를 통해 미행 차가 뒤따라오는 것을 확인하곤 씩 웃음을 흘렸다. 윤경식이 미행 차를 눈치 챈 것은 회사 주차장을 벗어 난 직후였다.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두번째 신호를 건너면서 미행임을 확인한 것이다. 최근에 일어난 몇가지 사건이 그를 아주 신중하게 만든 탓에 오늘도 미행 차가 있음을 재빨리 캐치한 것이다. 무엇보다 그에게 충격을 준 것은 박주옥의 죽음과 미국인 변호사 헨리 조였다. 특히 무어 패밀리의 의뢰라고 변호사가 찾아온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무어 패밀리와의 건은 이미 해결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태양의 무어 패밀리에 대한 80만 달러의 채무는 이미 일본의 오오무라 요시오에 의해 결재가 끝난 것이다. 그런데도 무어 패밀리가 새삼스레 변호사를 파견한 속셈을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이 아무리 무어 캄퍼니와 북두산업 김칠성 사장과의 비지니스에 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찾아온 변호사의 태도가 너무 건방졌던 게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주옥이의 죽음이 단순한 뺑소니 사고가 아닌 살인사건으로 경찰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도 마음에 걸렸다. 뺑소니든, 살인사건이든, 결과는 마찬가지겠지만, 수사에 임하는 농도의 차이는 각오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태양상사 현명준 회장의 의기소침이었다. 어쩌면, 현회장의 의기소침은 윤경식으로 봐서는 뜻밖의 수확일지 모르지만, 윤경식 자신은 현회장이 끝까지 활동적이고 강한 사람으로 있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꼬리를 감추고 도망갈 구멍을 찾는 상대와는 싸울 맛이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현회장이 눈에 띄게 약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평소와 다름은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윤경식만은 현회장의 변화를 느낄 수가 있었다. 그만큼 두 사람은 손발을 맞춰 왔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 현회장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북두산업의 김칠성 사장이 자살하고 부터라고 윤경식은 판단하고 있다. "바보같이 죽긴!" 그것이 현회장의 첫말이었고, 그 말의 뜻은 김칠성을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현회장 스스로의 탄식같이 들렸다. 북두산업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진두에서 지휘했던 현회장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센티멘탈리즘이었다. 아마도 김칠성 사장의 자살까지는 예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변화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현회장은 김칠성 사장에게 천만 원의 현금을 보냈고 미망인 명의로 뒨 모든 재산엔 손을 대지 않았다. "사람이 먹고 살 건 남겨 줘야지." 했던 현회장의 입장에선 김사장의 자살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그건 현회장의 나이 탓인지도 몰랐다. 육십을 넘긴 노인이 갖고 있는 삶에 대한 애착심이 그렇게 표현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때부터 현회장의 사업 의욕이 뚝 떨어져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사업의욕---- 특히 북두산업을 이용해서 추진하겠다던 프로젝트에 대한 의욕이 극히 소극적으로 바뀌었다. "네가 알아서 해! 북두사장은 너니까!" 윤경식에게 내뱉듯이 했던 말이었지만, 윤경식은 현회장이 계획하고 있던 프로젝트를 곧이곧대로 추진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가능한 대로, 그 프로젝트를 방해해서 현회장을 궁지에 몰아 넣자는 것이 윤경식의 계산이었다. 그랬던 것이 현회장이 스스로 손을 들었기 때문에 윤경식으로는 훨씬 손쉬워지긴 했어도, 그만큼 허전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오오무라 요시오의 방한도 현회장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한바탕 연극을 해서 압력을 넣지 않으면......." 오오무라는 윤경식의 연락에 그렇게 대답을 했었다. 그 오오무라가 꾸민다는 연극이 어떤 것인지를 오늘 알게 된 것이다. "오오무라는 친구, 느닷없이 구로가와 메이ㅅ이라구, 나의 창씨명을 대면서 찾아 달라고 나팔을 불구 다닌다는군! 이것 어떻게 된 거야?" 현명준 회장의 전화는 불쾌해서 못 견디겠다는 투였다. "내 과거를 들춰, 망신을 주자는 게야, 뭐야? 이것도 너 때문이야. 네가 빨리 빨리 일을 추진했음, 이런 일 없었을 것 아냐? 좌우간 추진 상황 가지고 저녁에 거기서 만나!" 그래서 지금 현회장이 말한 그곳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러면서 오오무라라는 능구렁이가 상당한 단수를 쓰고 있다고 윤경식은 혼자 씩 웃었다. 이젠, 사업가로서 그리고 재계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지위를 굳힌 현명준 회장이었다. 그런 현명준 회장의 창씨이름을 들먹이는 것 자체가 현회장으로서는 불쾌했을 것이다. 더욱 구로가와 메이ㅅ이라면, 해방직후 코오베 일대를 주름잡던 폭력배 리더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자연히 밝혀지게 마련인 것이다. 그것은 현회장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란 걸 오오무라 요시오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쪽 말을 듣지 않으면, 네 속 구린 것 다 파헤치겠다고 협박을 하고 나선 것이다. 오오무라가 말했던 한바탕의 연극이란 결국 현회장을 협박함으로써 그를 계획대로 움직이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건 즐거운 일이지만 지금 자기를 미행하고 있는 것은 누굴까, 윤경식은 전연 짐작이 가지 않았다. "미행차, 어떡할까요? 이젠 슬슬 떼버리구, 곧장 가야겠는데요! 시간이 다 된 것 같구......." "괜찮아, 그곳까지 달구 가! 거기서 봐서 창고로 몰아 넣어! 혼자 안되겠음, 몇몇 불러서......." "알았습니다!" 운전사의 귀가 움직였다. 그는 긴장할 때는 항상 귀가 쫑긋하고 움직이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모두들 토끼라고 별명을 붙였지만, 토끼치고는 아주 믿음직한 토끼라고 윤경식은 생각했다. 강변도로를 한 바퀴 돈 윤경식 사장의 차가 영동의 번화가를 지나 한적한 삼층 빌딩 앞에 멎었다. 흑갈색 벽돌로 된 빌딩은 한눈에 고급 살롱임을 알 수 있었다. 현범은 그 빌딩을 지나 다음 네거리에서 유턴한 다음 살롱 건너편에 파를 세웠다. 그는 조금 망설이다가 옆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가 장동렬에게 전화를 걸었다. "꽤나 바쁘시군. 지금 어디 있어?" "영동이야. 근데, 너네 삼촌 병원의 특실환자, 알아봤어?" "응! 그런 환자는 없대!" "그럴 리가......." "삼촌은 한 마디로 없다고 했어! 하지만, 느낌으로는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이야! 삼촌이 어디서 그런 얘기 들었냐구 꼬치 꼬치 캤거든!" "병원엘 같이 한 번 가볼까? 자넨 원장의 조카니까 어느 정도 끗발이 있을 것 아냐?" "좋겠지! 근데, 아침에 자네 집에 형사가 다녀갔담서?" "응!" "무슨 일이야?" "글쎄, 그걸 모르겠어! 왜 찾아왔는지......." "조심해! 나쁜 짓은 아무리 숨겨두 냄새가 나는 법이니까! 또 어느 양가집 규수 헌팅한담서 일 저지른 건 아니겠지!" "예끼!" "영동은 왜?" "실은, 누굴 미행하고 있어!" "스릴 있어 좋겠다! 나에게 전화한 건 물론 미행을 도와달라는 뜻은 아니겠구......." "물론, 미행 상대자가 술집에 막 들어갔거든! 금방 쫓아가긴 뭣하고 해서......." "뭐야! 시간 메우려고 전화한 건가?" "미안. 끝나면 또 연락할게!" 현범은 전화를 끊은 다음, 어깨를 펴고 살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살롱 안은 아늑했다. 은은한 조명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우선 들어선 손님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에 충분했다. 현범은 홀 한쪽 테이블에 앉았다. 홀에는 손님이라곤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런 고급 살롱에 들어와서 홀에 앉아 스카치 한 두잔 마시고 갈 뜨네기가 있을 까닭이 없음을 현범은 알고 있었다. 윤경식 사장은 예약된 룸에 들어갔을 게 분명했다. 어느 방일까? 현범이는 물수건을 들고 다가오는 웨이트레스에게 윙크를 했다. 이 웨이트리스를 잘 구슬러 윤사장과 현회장이 만나고 있는 방을 확인해 볼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은....... 두 사람의 얘기를 엿들을 수 있으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만, 그건 불가능 할 것이다. ---- 직접, 우연을 가장해서 직접 부딪쳐 볼까? 그는 스카치 온더록을 주문했다.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길래, 오오무라가 저러고 나서는가?" 현회장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물어뜯을 것같이 날카로웠다. 윤경식 사장이 예약된 방에 안내되었을 때, 현회장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웨이트리스들을 물린 다음, 현회장은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하다"는 윤경식의 사과를 무시한 채 입을 연 것이다. "그 팔십 만 불은 이미 다 갚지 않았던가! 그런데 영수증 한 장 받아내지 못하고, 새삼 협박을 당하고 있는 건 뭔가! 어떻게 됐어?" "오오무라씨가 무슨 마음을 먹고 있는지...... 회장님을 협박하고 있다는 건 금시 초문입니다." "팔십 만 불은 다 지불되었지?" "네, 저쪽에서도 영수증과 일련 서류를 인편에 보냈다고 합니다만......." "인편? 그게 누구야? 그래 받았어?" "그게 통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오무라씨가 보낸 사람은 스즈키라고 하는 사설탐정이라고 합니다만, 서울에 들어온 이후 증발되고 말았습니다." "증발? 처음부터 안 온 것 아냐?" "그렇진 않습니다. 도착했다는 전화를 제가 받았으니까요. 강원도 K시에서 사흘 뒤 서울 올라온다고, 그때 만나자고 전화를 걸어 왔더군요." "그리곤?" "행방불명입니다. K시에 그가 묵었던 호텔까지 확인이 되었습니다만......." "영수증이 이쪽 손에 안 들어 왔다면, 팔십 만 불 갚았다는 건 거짓말이 되잖아? 오오무라가 노리는 건......." "그렇지 않을 겁니다. 오오무라는 회장님과 손을 잡고 ......." "마약 밀수출이라면, 흥미없네! 손을 떼겠어!"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습니까? 새삼 손을 뗀다구 해서......." "알아! 하지만 여태까지 제3국에서 이루어졌던 것. 서울에서 태양상사 이름으로는 할 수 없네! 그건 오오무라에게도 분명히 해둔 것이야!" "북두산업의 인형을 이용한다는 계획은 중집니까?" "그건, 자네 일이야. 북두산업 사장은 자네 아닌가! 자네가 알아서 하면 되잖아!" "하지만, 오오무라씨는 회장님의 개런티가 꼭 필요하다면서, 저 같은 건 상댈 않고 있는 형편입니다." "......" 현회장은 입을 다물었다. "어떻습니까? 회장님. 오오무라씨가 오면 회장님과 조용히 담판을 짓는 건...... 한국에서 마약밀조 수출이란 불가능하다는 걸 설명하면, 저쪽도 납득이 갈 것 아닙니까?" "......" "팔당별장에 초청해서 조용히 담판을 짓도록 해보시고, 안되면......." "안돼면?" "오오무라씨가 활동을 못 하도록 손을 쓰는 건 어떻습니까?" "펄펄 나는 사람을 어떻게 해서 활동 못하게 한다는 건가?" "방법은 회장님두 짐작이 가실 것 같습니다만...... 지금까지두 그랬던 것처럼......." "무슨 뜻인가?" "박주옥일 기억하시죠? 태양의 경리부 여직원, 제가 북두루 데리고 왔던......." "날 협박하는가? 분명히 해두지만, 박주옥이의 뺑소니 사고는 난 전연 모르는 일이야!" "물론이시죠! 오오무라씨라고 사고를 당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습니까!" "그러나 뺑소니는 안돼! 너무 자주 일어나면 사고로만 끝나지 않게 돼!" 현회장은 눈을 감은 채 어금니만 주억거렸다. 그런 현회장은 이미 옛날의 정한함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만약에, 오오무라씨가 교묘하게 일을 벌인다면, 태양상사나 현명준 회장이 감당할 수 없음은 분명한 일이었다. 특히 실패로 끝난 이란 프로젝트에 엄청난 커미션이 사전에 거래된 것도 그렇지만, 이란 프로젝트 내용 자체가 엄청난 일이었다. 표면엔 카페트 공장과 송유 파이프공사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이란 북부 오지에 흩어져 있는 마약 밀재배를 기업화하자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세계 마약원은 세 곳이었다. 중남미 정글, 동남아 정굴, 그리고 중동의 사막 오지. 이 삼대 밀매지 가운데서, 중동지역이 가장 기업화에 뒤떨어져 있었다. 한때 어느 나라가 반공식적으로 손을 댔다가 외교문제가 된 다음부터 버려둔 채 있었다. 뒤떨어진 기업화가 하나의 미끼가 되어 미국의 신디케이트가 움직였고, 마침 이란 진출에 열을 쏟는 태양상사와 손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란 플랜트를 따 주는 대신에 협조하라는 조건을 태양상사는 이란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묶어서 동의한 것이다. 물론 태양이 직접 손댈 생각은 없었다. 현지의 밀재배자들을 조합형식으로 묶어 뒤를 보살펴 준다는 선에서의 협조였다. 그 과정에 중동 픽서에게 건넨 돈이 백만불. 현금은 이십만 불이었고, 팔십만불은 중동에 이미 투자하고 있던 신디케이트의 투자분을 이쪽이 인수하는 형식이었다. 그 팔십만불은 무어 패밀리의 무어 뱅크에 대한 채무로 남았고, 무어 뱅크는 이를 일본의 오오무라 요시오에게 넘긴 것이었다. 태양의 현회장은 지하은행을 통해 만든 비밀자금으로 오오무라에 대한 채무를 결재했다. 그 오오무라가 새삼 제의해온 것이 한국으로부터의 마약 밀수출이었다. 한국엔 산림녹화에 따른 입산금지 지역이 많으니까, 이를 이용해서 밀재배, 가공해서 수출하자는 것. 마침 북두산업이 개발한 향기나는 인형 속에 십그램, 백 그램씩 숨겨 넣으면 한일 양국 세관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렇게 되면, 마약전문 감식견의 취각을 인형에서 나는 향기로 혼란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오오무라씨가 일본에서 실험해 본 결과 훌륭한 방법임을 확인했다고 했다. 이 제의를 현회장은 받아들였다. 우선 이란 프로젝트 때문에 헛날린 백만불을 메울 수 있다는 것도 매력이었지만, 무역환경이 옛날과 같지 않아 비밀자금조성이 점점 어려워졌다는 것이 현회장을 움직인 것이다. 오늘의 태양상사가 있기까지 현회장의 힘이 된 것은 비밀자금이었다. 회사와는 전연 관련없이 필요할 때 거금을 던질 수 있었기 때문에 태양상사는 국내외의 중요 프로젝트에서 경쟁상대를 눌러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지금은 여의치 않게 되어 초조해 하고 있을 때 오오무라의 제의를 받은 것이다. "우선 북두를 손아귀에 넣어, 일 이년 지난 뒤 도산시켜 버리면......." 현회장의 계산이었다. 그 일·이년 사이에 충분한 자금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마약의 일본 국내가격은 그램당 이십만엔. 일 킬로그램이면 2 억 엔이 된다. 인형 1 로트 수출 때 1 톤만 숨기는 것으로 해서 매월 1 로트의 인형을 수출한다면 ....... 그랬던 현회장이 소극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김칠성 사장의 자살도 그랬지만, 뭣보다 북두산업이 윤경식 손에 넘어간 게 그의 용기를 꺾은 것이다. 이영길이 사장이거나, 윤경식이 사장이거나, 다를 바 없지만, 적어도 윤경식이가 북두의 사장이 되기 위해 뛰어다닌 것을 전혀 몰랐다는 게 그를 상심시킨 것이다. ----- 나도 늙었나?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오오무라의 입을 막거나, 아니면 그의 제의대로 따르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이다. 그의 제의를 따를 생각은 전연 없었다. 남은 방법은 ...... 하고 생각하던 현회장은 감은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는 윤경식이가 살롱 주인---정진대와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 "뭔가?" "별것 아닙니다." "별것 아닌데, 귓속말을 나눠? 그리구 아무도 못 들어오게 했는데, 정군은 왜 들어왔어?" 현회장은 못마땅한 듯이 얼굴을 찡그리며 따졌다. "실은...... 저를 미행했던 친구가 홀에서 이러쿵 저러쿵 더듬고 있다는 얘깁니다." "자넬 미행해? 형산가?" "아닌 것 같습니다. 타고 다니는 자동차가 렌터카라고 하는 걸 보면......." "그래서?" "좀 데려가서 교육을 시키는 게 좋겠다구 지시했습니다." "잘해! 어설프게 해서 꼬리 잽히지 말구!" 현회장의 다짐에 정진대는 머리를 숙여 보이고 나갔다. 11. 지하 우정(地下 友情) 오오무라. 요시오는 건장한 체구의 정력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백의 머리를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스포츠형으로 짧게 깎은 것이 공항 도착 로비의 복잡함과는 어울리지 않게 더욱 정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백영철은 F여행사 여직원이 들고 있는 깃발을 보고 성큼 성큼 다가서는 그를 단번에 오오무라라고 알아차렸다. 오오무라의 일행은 당초 소문과는 달리 십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 일행을 거느리기라도 한 것처럼 오오무라가 앞장을 섰고 그 옆에는 훨씬 젊은, 그러나 오오무라 못잖게 건장한 사내가 그림자처럼 따랐다. "오오무라 선생이시죠? F여행사 백영철입니다." "이거, 수고가 많군! F 여행사라면, 내가 부탁해 둔 게 있는데 잘 처리가 되었는지......." 오오무라는 큼직한 손으로 백영철의 등을 두들기며 말했다. 그의 자연스런 제스처엔 거물다운 여유가 있었다. "구로가와 메이ㅅ이라는 옛날 친구 분을 찾아 달라고 했던 것이라면 염려 안 하셔두 됩니다." "오, 그래? 어떻게 신문광고라도 냈었던가? 그를 찾기 위해서?" "아뇨. 운 좋게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과연, 운이 좋았군! 그런데, 당신 일본말이 아주 능숙하군!" "고맙습니다." "가만, 구로가와 메이ㅅ을 찾았다면, 한시 바삐 만나 보구싶군! 지금 곧장 그쪽으로 갈 수 없을까?" "지금 곧바로 말입니까?" "음, 구로가와에게 전화를 해봐주겠소? 지금 곧장 간다구...... 난, 전화 거는 동안 이 일행들을 먼저 호텔로 보낼테니까!" 오오무라는 백영철의 대답 같은 것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투로 일행 쪽으로 갔다. 백영철은 태양상사로 전화를 걸었다. 비서실에서 회장의 오전 스케줄이 비어 있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오오무라 요시오라는 일본인이 지금 그쪽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렸다. "어때, 연락이 닿았나?" "네. 오전 스케줄은 비어 있다고 합니다. 비서실 얘기로는......." "비서실 얘기? 그럼 구로가와가 꽤나 출세했다는 얘기 아니가?" 오오무라는 눈을 크게 뜨며, 두 팔을 쫙 벌려서 감탄했다. "네. 태양상사의 회장님입니다." "태양상사 회장? 아니 구로가와가 그 유명한 태양상사의 오너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거야말로 놀래 주는군!" 백영철은 감탄하는 오오무라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오오무라 옆에는 건장한 젊은이가 계속 따르고 있었다. 백영철도 깃발을 든 여직원을 불러 일행을 호텔로 안내하도록 지시한 다음, 오오무라를 자기 자동차에 태웠다. 다른 일행들이 전세 버스로 먼저 떠나는 것을 보며, 백영철은 엔진을 넣었다. 원래부터 오오무라는 승용차로, 다른 일행은 버스로 안내키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백영철은 차를 가지고 공항으로 온 것이었다. 차안에서 오오무라는 별 말이 없었다. 입을 일자로 꽉 다문 채 눈을 감고 시트에 기대 있었다. 차가 한강을 건널 무렵, 그는 입을 열었다. "태양상사 빌딩은 어디쯤 있나!" "시내 중심부입니다. 한 가지 물어봐도 좋습니까?" "물론!" 백영철은 룸 미러에 비친 오오무라의 얼굴에 여유 있는 미소가 번지는 것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오오무라 선생과 현회장, 구로가와 회장과는 어떤 사입니까?" "그건, 텔렉스로 알렸던 것처럼 소시적의 친구야!" "소시적이시라면?" "음, 종전 직후지. 코오베에서 구로가와와 나는 몇 번이고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도와주고 도와 온 사이였지. 그 뒤 그로가와가 귀국을 해버리자......." "오늘날까지 소식이 끊겼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오오무라 선생은 서울이 처음이신가요?" "그렇진 않지만......." "그렇담, 그동안 한 번도 현명준 회장을 찾으려는 노력을 않으셨군요! 오늘날까지!" "이건, 귀따가운 소리로군! 그렇게 되구 말았지!" 오오무라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빛났지만, 말씨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태연했다. 백영철도 입을 다물었다. 그쯤으로 우선 충분했다. 오오무라가 현명준 회장을 만나고 있었음을 확인한 것이다. 태양상사가 재벌급이긴 하지만, 외국인이 놀랄 만큼의 한국의 대표적인 상사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오오무라는, "그 유명한 태양상사." 라고 과장된 제스처를 썼다. 그리고 태양이 신축빌딩으로 이사간 건 일년 남짓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오오무라는 태양상사의 위치를 묻지 않고 빌딩의 위치를 묻고 있었고, 자기의 마지막 질문에 눈빛이 변했었다. 백영철은 오오무라와 현명준 회장 사이에 뭔가 있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것을 캐기 위해 현계환씨에게 알릴 것인가, 아니면 오오무라의 체한 동안 혼자 추적해 볼 것인가 망설이기 시작했다. "저 빌딩인가?" 태양상사에 가까이 왔을 때, 오오무라가 물었다. "네. 전 밖에서 기다리죠!" "아니, 그럴 것 없어. 같이 올라가자구! 뭣하면 비서실에서 기다림 될 테니까!" 오오무라씨는 백영철과 젊은 사내--보디가드를 데리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현회장의 비서는 오오무라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서는 오오무라씨를 회장실로 모신 다음, 백영철과 젊은 보디가드는 비서실의 소파로 안내했다. 백영철은 담배에 불을 붙인 뒤 회장실에 귀를 기울였지만,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적어도 몇 십년만에 처음 만난 사이라면 환호와 웃음소리쯤 문틈으로 흘러 나와도 좋을 법한데도 그런 기척은 전연 없었다. 백영철이 귀를 기울여 두 사람이 해후한 환호를 기다리는 것과 달리 실제로 현명준과 오오무라의 만남은 야단스럽지 않았다. 소파에 앉았던 현회장은 오른손을 들어 보였을 뿐이었다. "이건 너무 쌀쌀맞군. 손님 접대 치고는 ......." 오오무라도 나직하게 씹어 뱉았다. "그건 손님 탓이야! 난 협박당하는 게 가장 싫거든!" "협박이라니, 뜻밖이군!" "협박이 아님 구로가와. 메이ㅅ을 들먹이며 찾아 올 건 뭔가?" "역시, 구로가와. 메이ㅅ이 비위를 거슬렸군. 이쪽이 계산한 대로 된 건 아닌데두......." "그쪽 계산은 어떤 건대?" 현회장은 오오무라를 건네 보면서 물었다. "이쪽 계산은 일본인 오오무라가 옛날 친구 구로가와를 찾는다는 사실과 두 사람이 몇 십년만에 만난다는 얘기가 매스컴에 큼직하게 취급되는 걸 노렸던 게야. 그런데 병신 같은 여행사가 그걸 못했거든! 당신이 구로가와란 걸 너무 손쉽게 찾아낸 거야! 신문을 이용도 않구......." "그럴 필요는 뭔가? 새삼 나와 당신과의 얘기를 신문에 내야 할 이유는 뭔가?" "이쪽 사정이 급해 졌거든! 당신과 내가 손을 잡고, 예의 일을 추진한다는 걸 일본내의 아이들에게 알려야 할 필요가 생겼어! 당신이 내 앞에서 꿈쩍 못한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증명해 보여야 할만큼 나도 궁지에 몰린 셈이야!" "모를 소리로군!" "그럴 게야. 실은 저쪽 아이들이 두 패로 갈라졌다 이거야!" "아이들이 갈라져? 아니, 야쿠자 세계에도 반란이 일어나나?" "민주주의 시대니까! 떨어져 나간 쪽이 내가 추진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꾸미고 있어. 그런 참에 당신이 손을 씻겠다고 하니까, 이쪽이 열이 안 오르겠어?" "그래서 연극을 벌였군! 치사하게!" "암, 당신과 나는 종전(해방)직후 코오베 항쟁 때부터의 동지란 것을 아이들에게 알려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것뿐은 아니겠지?" "물론, 무어 패밀리로부터 넘겨받은 당신의 이란 프로젝트 실패 전모도 내가 갖고 있지. 일본 아이들에겐 당신이 내 옛동지였다는 걸 알리구, 당신에겐 이란 프로젝트 자료와 교환조건으로 내 일을 도와 달라는 마지막 카드를 던지러 온 거야! 이번 한국방문의 목적은......." 오오무라는 여유있게 웃어보였다. 완전한 협박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담, 오오무라, 당신두 꽤나 배짱이 두둑하군!" "무슨 뜻이야?" "내가 그런 협박을 당하기만 할 것 같아? 이렇게 단 둘이 마주 앉아 있는 곳은 내 사무실이야! 여기서 당신이 심장발작을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도 있어!" "알고 있어! 하지만 당신을 믿지! 태양상사 회장이 그런 위험한 짓은 않을 거라구! 나와 손잡는 건 앞으로 길어야 일년. 그 뒤는 프리야. 일년을 참을 건가, 아니면 전체를 잃을 것인가? 대답은 간단하잖아!" "나를 믿는다는 얘기군!" "암! 그렇지 않음. 이렇게 찾아오진 않았겠지!" "고맙군. 그렇담, 내일 하오에라두 다시 만나 조용히 얘길 나누자구. 그렇지, 내 팔당 별장은 어떨까?" "일본식의 그 별장?" "음!"] "좋지! 누구 누구와 얘길 하누?" "당신과 나, 그리고 예의 북두산업의 사장 윤경식." "윤이란 친구 믿을 만 한가?" 오오무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믿을 만 하잖구? 그는 이시다의 유복자야!" "이시다?" "잊진 않았겠지?" "잊을 까닭이 있나, 이시다를! 하지만 인연은 묘하군. 이시다의 유복자가 당신 밑에 있다는 건......." 오오무라는 비로소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현회장에게 물었다. "내일 몇 시쯤이 좋을까?" "글쎄...... 오후 서너 시쯤이 어떨까? 얘기가 끝난 뒤에 저녁을 할 수 있게......." "여섯 시로 해줘! 낮에는 골프 스케줄이 있어!" "호오, 골프? 오오무라씨도 꽤나 한가해 졌군!" "초대골프야! 이번 여행의 표면상 이유는 친선협회쪽 일이잖아! 내일 모레 이틀 동안은 골프야!" "일요일 골프는 나와 함께 가는 게 어때? 모처럼 두 사람만의 라운딩도 괜찮겠는데......." "당신과 골프?" "음, 일요일 밤엔 부산엘 한 일주일 다녀와야 할 일이 있으니까, 내일. 모레 이틀 뿐이야. 당신과 만날 수 있는 날은......." "좋지!" "별장에서 골프장까지는 내 차로 갈 수 있지만, 골프장에서부터는 차를 준비해야 해! 난 바로 떠날 테니까!" "그건 염려마!" 오오무라는 일어섰다. 그가 나가자, 현회장은 윤경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 하오 별장에서의 파티와 일요일 골프 약속을 알린 다음, "알겠나? 오오무라는 골프장에서 돌아올 때부터는 혼자야! 난 부산으로 가버릴테니까, 알았지?" 전화를 끊은 현회장은 소파 깊숙이 몸을 뉘였다. -----오오무라씨 일해의 환영 파티 주최자는 서울의 무슨 친선협회였다. 모인 사람들의 매너는 결코 세련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시골 장날의 주막집 같이 어수선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일류 호텔의 리셉션 룸에서 열리는 파티치고는 처음 생각하고 있었던 것만큼 거창스럽지 않은 것에 백영철은 조금 실망하고 있었다. -----도토리 키재기 같은 파티. 백영철은 그런 생각을 머리속에 굴리면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태양상사의 현명준 회장과 S 신보 주간부의 강연숙 기자. 현명준 회장과 오오무라씨의 해후를 취재해 줄 수 없겠느냐고 백영철이 전화로 부탁했을 때, 강연숙은 첫마디에 OK 해 주었다. "정말 고맙군! 첫마디에 도와줘서......." "너무 그러실 것 없어요. 취재한다고 해서 전부 보도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것보다 저도 백선생님께 의논드릴 일이 있던 참이었으니까 잘 됐죠 뭐. 파티장에서 뵙겠어요!" 의논할 일이 뭔지 몰랐지만, 강연숙의 싹싹한 응락에 백영철은 아주 홀가분한 감사를 느낀 건 사실이었다. 그가 현계환씨에게 들려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바로 그 일이었다. "오오무라씨의 특별 부탁인데, 이 일을 할 만한 사람은 우리회사에선 백고문밖에 없군요!" F여행사의 젊은 사장은 백영철의 귀사를 몹시 기다렸다는 투로 얘기를 끄집어내었다. "오오무라씨가 어떻게 하든 자기와 현명준 회장의 극적 해후를 매스컴을 통해 화려하게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거예요. 두 사람의 극적인 상봉을 계기로 한일 친선은 물론, 합작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이게 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는 겝니다. "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말입니까?" "네. 저쪽 희망은 그렇지만, 그렇게 대대적은 아니더라도 부탁한 오오무라씨의 체면은 세워 줘야겠지요. 백고문은 경찰생활 때 사귀었던 기자들도 많을 꺼 아니겠어? 어떻게 한 번 해주세요. 우리사 입장에선 오오무라 정도라면 잡아두고 싶은 고객이기도 하니까 말이오!" 사장의 설명을 들으며, 백영철은 오오무라와 현회장의 속셈이 뭘까 하고 생각을 하다가 강연숙에게 부탁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사건기자라면, 아직도 많은 얼굴들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부탁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강연숙이 거절하면, 할 수없이 사건기자들 가운데, 친숙했던 몇몇에게 부탁해 볼 수밖에 없겠지만, 오오무라와 현회장의 관계가 석연치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금, 앞질러 사건 기자들에게 오오무라씨를 노출시킬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 백영철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이 강연숙은 첫마디에 OK를 해준 것이다. 파티장 입구가 조금 술렁대면서 오오무라씨가 현명준 회장의 어깨를 감싸안은 채 들어왔다. 모였던 사람들의 박수로 그들을 맞았다. 오오무라씨의 정력적인 얼굴의 만족한 웃음과는 대조적으로 현명준 회장은 전연 표정을 허물지 않고 있었다. 오오무라씨는 백영철을 손짓으로 부른 다음, "기자들은 아직인가?"고 물었다. "기자들이라니?" 현명준 회장이 백영철을 대신해서 오오무라의 말을 받았다. "당신과 나의 극적인 해후를 숨겨 두기는 아깝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서울의 매스컴을 통해서 온세상에 알리자구 한거야!" "바보같으니라구!" 오오무라씨의 설명에 현명준 회장이 나직하게 씹어뱉은 다음, 말을 이었다. "싫어! 난. 난 그렇게 화려한 취미는 없어!" "그러지 말구, 우리 멋지게 폼을 잡아 우정을 표현하자구!" 오오무라씨가 현명준씨의 팔을 잡아 번쩍 들어올렸다. 그때 플래시의 섬광이 터지면서, "두 분의 얼싸안는 포즈!" 하고 주문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연숙이었다. 그녀의 옆에서 카메라 맨이 잽싼 움직임으로 플래시를 터뜨리고 있었다. "수고했어요, 미스 강. 자, 주스로 목이라도 축이지!" 백영철은 취재가 끝난 강연숙에게 음료수를 내밀었다. "괜찮아요. 목마를 만큼 대단한 것도 아닌걸요, 뭐. 어느쪽이냐 하면, 좀 시시한 초롱이었군요. 백선생님의 부탁은......." 강연숙은 장난기 서린 생글거림을 얼굴 가득히 담았다. 초롱이란, 상대방을 의식적으로 추켜세우는 기사를 뜻하는, 매스컴의 은어였다. 은어라기보다는 일본어의 직역이 그대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정도의 뜻은 백영철도 알고 있었다. 사장의 부탁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래도 어는 정도의 얘기거리가 있을 거라고 기대 했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강연숙의 취재의 통역을 맡았던 백영철은 스스로가 배알이 뒤틀릴 만큼 내용이 없었다. 현명준 회장은 한마디의 코멘트도 없었고, 오오무라씨 혼자 "현해탄의 휴먼스토리." 임을 강조했을 뿐이었다. "이봐요, 현회장! 이 기사는 우리 두 사람 우정을 재확인 해주는 것이 되겠지? 말하자면, 신뢰에의 영수증, 아니 각서가 되겠지?" 인터뷰를 마치며, 오오무라가 현명준의 어깨를 감싸며 했던 말이 백영철에겐 역겨움을 안겨 주었다. ----신뢰에의 영수증은 뭐구, 각서는 또 뭔가? 백영철은 저쪽에서 한무리의 사람들과 어울려 있는 현명준과 오오무라를 건너보며, 들고 있던 스카치를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자, 이제부턴 제 일을 백선생님이 도와주실 차례예요!" "참, 의논할 일이 있었다구 했지? 뭡니까? 결혼 상대자의 신원조사? 아니면, 애인의 행적조사?" "어머, 그런 것도 하세요?" "아니! 그런 거라면 거절할 참이란 걸 말해 두려구!" "꽤나, 고자세시군요! 하지만 안심하세요. 그런 건 아니니까......." "고마워요. 안심시켜줘서...... 뭡니까? 의논할 일이란?" "사람 하나 찾아 주셔야 겠어요!" "역시! 그런 거라면, 전문가들이 있을 것 아니오?" "백선생님두, 그런 전문가였잖아요!" "누굽니까? 미스 강이 애타게 찾아야 하는 행복한 사람은?" "그제 새벽, 백선생님이 형사랑 함께 찾아갔던 사람!" "헨리. 조라는 미국인변호사?" "네! 이틀째 전연 소식이 없어요! 혹시 모르세요?" 강연숙은 숨쉴 틈 없이 물음을 이어갔다. "그제 새벽, 미스터 조를 찾아간 건 무슨 일이었죠?" "별 다른, 특별한 이유 같은 건 없었지만......." "특별한 이유없이 형사가 새벽같이 밀어닥치나요?" "이건, 신랄한데! 실은 조금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지만, 지금은 오해가 풀려 벌일 아닌 것이 된 셈이죠!" "마음에 걸렸던 일은 뭐였어요?" 백영철은 강연숙의 되물음에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가 김칠성 사장 미망인, 황여사를 미행하고 있다는 걸 알았죠! 또 그가 미스 강 주변을 맴돌고 있었던 것도 마음에 걸렸구... 그것보다 그 친구와는 어떤 사이입니까? 미스 강은?" "어머,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내 파트너의 미국 동창이라구......." "그랬군요! 그가 한국에 온 목적은 뭡니까? 관광? 아니면 친지 방문?" "전부 노우예요. 그도 한국 어느 변호사 사무실에서 연수중이에요. 그 변호사와 죽은 김칠성 사장이 친구였기 때문에......." "뭐?" 백영철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글래스를 떨어뜨릴 만큼 놀랐다. 그런 백영철을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대던 강연숙이 간단하게 헨리. 조가 김칠성 사장 사건에 손대게 된 경위를 요점만 추려서 설명해 주었다. "그랬군! 서울의 한 중소기업 사장이 도산하고 자살한 것이 미국변호사가 관여할 만큼 국제적인 사건이 되었다는 건 미처 몰랐군!" "세계는 좁으니까요!" 강연숙은 자신의 유모어 센스를 자랑하듯이 덧붙이면서 생글거렸다. 하지만 백영철씨가 미간을 좁히는 걸 보곤 웃음을 거두었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세요? 김칠성 사장 사건이 국제적으로 된 걸 몰랐다는 뎨 쇼크라도 받으셨나요?" "아니, 그것보다 헨리라는 친구 언제부터 소식이 끊겼습니까?" "백선생님이 다녀가신 날 오후부터. 누굴 미행한다구 미스터 장---제 파트너예요. 미스터 장에게 전화를 건 뒤부터예요!" "미행? 누굴?" 백영철은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컸음에 스스로 놀랐다. "어머, 왜 그렇게 놀라세요? 무슨 짐작가는 일이라두?" "그런 건 아니지만...... 목소리가 갑자기 커져 버렸을 뿐이야!" "하긴, 또 걸. 헌팅이었는지도 모르죠! 미행상대가... 참 미스터 조가 박주옥이를 마지막 본 사람이었던 건 알고 계시죠?" "그가, 주옥이를?" "네. 주옥씨를 헌팅해서... 죄송해요. 주옥씨와 어떻게 해서 함께 디스코를 추다가 일을 당했다는 사람, 언젠가 말씀 드렸었죠? 그게 미스터 조였어요!" 백영철은 갑자기 머리가 혼란해짐을 느꼈다. 확실히 강연숙이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고, 그를 자기에게 만나게 해주겠다고 까지 약속했었지만, 그 약속시간에 그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마침, 그날 현계환씨와 함께 주한대사관 하야시를 만나는 약속이 겹쳤었기 때문에 백영철은 그를 더 기다리지 못하고 일어섰던 게 생각났다. "좀더 자세하게 얘기해 줄 수 없겠소? 헨리라는 사람에 대해서. 누굴 미행했는지 알 수 있는 방법,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해요!" 백영철은 자기가 조금은 허둥대고 있다는 생각에 아랫배에 힘을 주며, 심호흡을 했다. 멀리서 자동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지면을 타고 울려왔다. 타이어에 자갈이 튕기는 소리가 잡힐 듯이 들렸다. 그와 함께 언덕길을 로우. 기어로 올라오는 힘겨운 엔진소리도 바람결에 함께 실려왔다. 현범은 눈만 뜬 채 꼼짝도 않고 자동차가 다가오는 속도를 재고 있었다. 꼼짝도 않는 것은 주의력을 집중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현재 상태가 꼼짝할 수 없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배가 몹시 고픈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만약 지금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가 이 집으로 다가오는 것이라면, 자동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 뭔가 먹을 것을 갖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하다가 픽 웃고 말았다. 이 외진 산골집을 찾아 올 사람들이란, 그들뿐일 것이며, 여태까지 그들이 자기를 취급한 솜씨로 미루어 봐서 때 맞추어 먹을 것을 갖다 줄 만큼 친절한 까닭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일을 당한 이후 제대로 식사를 한 것은 한 두 번뿐이었다. 더욱 이곳으로 실려온 뒤론 여태 혼자 팽개쳐져 있었다. 팽개쳐진 곳은 지하실, 정확히 말해서 반 지하실 같은 곳이었다. 창고로 쓰여지고 있는 곳이라고 현범은 추측했다.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는 잡동산이 속에는 매캐한 곰팡내를 머금은 습기가 눅눅하게 서려 있었다. 짙은 습기가 스며 있는 시멘트의 꼭대기엔 조그만 공기창이 조명 역할까지 함께 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곳은 바깥에서 직접 출입할 수는 없고, 사닥다리로 이어진 주방이 유일한 통로인 것처럼 보였다. 사닥다리가 닿는 부분의 주방 바닥은 그 흔한 타일이 아니라, 마루였던 것을 현범은 기억할 수 있었다. 그 열고 닫는 부분에 큼직한 가구라도 갖다 올려 놓는다면, 그렇게하도 해버리면, 이 반지하실에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해져 버릴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해두지 않더라도 도망칠 수 없음을 현범자신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발과 손을 묶은 매듭에 힘을 주어 보았지만, 통증만이 더해왔을 뿐이었다. 묶인 매듭의 아래쪽---손과 발에는 혈액순환이, 묶인 만큼 지장을 받은 것일까, 조금씩 저려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바보같이! 술에 수면제 탄걸 몰랐다니! 현범은 몇 번이고 후회를 했지만, 되풀이한 후회만으로는 지금 묶여 있는 매듭이 조금도 헐거워지지는 않았다. 윤경식 사장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 함정의 시작이었다. 아니, 현회장과 윤경식이가 만나기로 한 살롱에 대해서 주의를 하지 않은 게 잘못이었다. 현범이 자신의 판단대로 두 사람이 뒤가 구린 것이 사실이라면, 은밀히 만나는 장소에는 그 나름대로 손을 써 두었으리라는 것쯤 미리 알고 주의를 했어야 마땅했다. ----살롱에서, 현범은 자기 테이블에서 서비스를 하던 호스테스와 얘기가 제법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는데 만족했었다. 은밀히 몇 장의 지폐를 건네주면서 현회장과 윤사장에 대해서 캐묻고 있었다. 몇 잔째 였을까? 현범이 다시 스카치를 추가 주문했을 때, 막 카운터에서 돌아온 호스테스가 현범의 귀에 대고 소곤거려 주었다. "지금, 현회장과 윤사장이 만나고 있는 옆방이 비었어요! 거기 가서 우리 조용히 마셔요! 혹시 아나요? 옆방의 얘기가 흘러 들릴는지?" 호스테스는 큼직한 눈을 감아 윙크를 해 보였다. "좋지! 남녀가 한방에서 조용히 마실 수 있다는 건, 예술일 수도 있으니까!" 현범이 호스테스를 따라 룸으로 들어간 지 십분도 안되어 졸음이 쏟아지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당했구나! 가물대는 정신을 가다듬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자기 앞에 건장한 사내가 나타났을 때, 현범이는 겨우 "당했구나" 는 말밖에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아니 잠에서 깬 것은 이튿날 새벽이었다. 창문도 없는 방이었다. 거기서 현범은 누구와도 만날 수 없었다. 단지 두번, 라면 냄비를 누군가가 문틈으로 넣어 주었고, 현범이가 먹은 다음 빈 냄비를 문틈으로 내어 갔을 뿐이었다. 아마도 그 손은 남자였을 것이라고 현범은 생각했다. 거기서 현범은 두 손만 묶였을 뿐, 다리는 자유로왔지만, 그렇다고 쉽게 도망갈 수 있는 그런 상태는 아니었다. 손발이 이렇게 처참하게 묶인 것은 이곳으로 옮겨진 뒤였다. 현범은 자기가 이곳으로 실려온 것이 이른 아침이었고 지금은 오후란 것 정도밖에는 짐작 할 수 없었다. 자기를 납치한 그들이 자기를 어떻게 처치할 것인지, 전연 짐작할 수도 없었다. 한 가지, 장동렬에게 누군가를 미행하고 있다고 걸었던 전화에 한가닥 기대를 걸고 있었다. 소식이 끊긴 것을 안 동렬이가 어쩌면 자기가 미행한 사람이 윤경식 사장이란 걸 알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안, 부지런히 쫓아다녀 문희경과 연락이 닿게 되면, 그 정도는 쉽게 밝혀질 것으로 생각되었다. -----자동차 멎는 소리와 함께, 두런두런 얘기 소리가 들렸다. 두런거리는 말소리와 발자국 소리. 현범은 차에서 내려 집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세 사람이란 걸 알았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지하실과 이어지는 사닥다리 언저리에서 멈추었다. 그와 함께 사닥다리 윗 부분의 마루가 열리며, 사람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구두, 그리고 길쭉한 다리에 이어 전체 모습이 드러났다. 얼마간, 통풍창을 통해 빛이 들어오곤 있었지만, 마루뚜껑 부분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밝음은 아주 강렬했다. 때문에 현범은 묶여 있는 손목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 사이로 지금 내려오는 사람이 영동 살롱에서 한 번 본 것 같은 중년의 남자란 것을 알았다. 그 남자는 히죽, 여유 있는 웃음을 보이며 다가왔다. "얌전하게 있어줘서 고맙군! 자 일어서서 위로 올라가지!" 현범은 얼굴을 가렸던 손은 내렸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너무 얌전해져서 말까지 잊었나? 이봐, 위로 올라 가자구!" "당신이 날 업고 올라가던지, 아니면 묶은 걸 풀어 주든지 해야 할 것 아냐?" "묶인 채로는 못 걷겠다, 이런 말씀이군! 미국 변호사두 뭐 용빼는 재주는 없군!" 사내는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린 다음, 양말 목에 꽂혀 있던 나이프를 뽑았다. "쓸 데 없는 짓 생각했다간, 본전 생각날 게야!" 사내는 그렇게 말하면서 나이프로 현범의 손과 발목의 매듭을 잘랐다. 아주 조심스럽고, 날쌘 솜씨였다. 이쪽이 어떻게 해볼 틈을 전연 주지 않는 그런 솜씨였다. 현범은 이 사내를 상대로 한바탕 해본다는 생각은 어림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닥다리를 올라 가면서도 사내는 허점을 보이지 않았다. 현범이가 사닥다리를 다 올라 갈 때까지는 그는 밑에서 지키고 있었고, 현범이가 마루 위에 몸을 내밀었을 때는 식탁 위에 윤경식이가 빙글거리며 앉아 있었다. "여어, 미스터. 헨리! 무어. 패밀리가 지금 당신을 봤음 아주 즐거워하겠는데......." "역시 당신이었군! 여긴 어디야?" "여기? 여긴 보다시피 주방이야. 지금부터 당신에게 멋진 식사를 대접 해 줄 식당두 되구!" "그건 고맙군! 뭘 대접해 줄 건가?" "음, 생선초밥과 튀김!" "일본식이군!" "그렇지! 오늘 저녁은 이 별장에서 일본인과의 만찬이 있거든! 당신두 같은 걸 먹어 둬야 얘기가 맞을 것 같아 한발 앞서 대접해 두려는 거야." "일본인과의 만찬? 당신이?" "천만에. 이 별장 주인---태양상사 현명준 회장의 만찬이야. 난 그 준비가 끝나면 되돌아 가야하니까, 시간이 얼마 없어! 자 생선초밥부터 먹여 줄까?" 윤경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하실에 내려왔던 남자가 냉장고에서 생선초밥과 튀김을 내 왔다. 일인 분씩 담긴 것일까? 똑같이 생긴 도시락들이 냉장고에 가득 들어 있었다. 현범은, 어떻게 되었든 먹을 수 있게 된 것에 안심했다. 그는 생선 초밥과 튀김을 차근 차근 먹기 시작했다. "보기보단 당신 배포가 있군! 하긴 그렇잖고는 무어. 패밀리의 일을 할 수도 없겠지만......." "칭찬해줘서 고맙군, 하지만 당신들 배짱도 그만하면 괜찮은 것 같아. 무어. 패밀리로부터 80만 불씩이나 빚을 진 걸 보면......." "흥, 그건 결재가 다 끝난 옛날 얘기야!" "결재가 끝났다구?" 현범은 씹고 있던 것을 삼키면서 되물었다. 잭슨씨의 텔렉스엔 그런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걸 모르고 있는 걸 보면, 당신이 피래미인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좋아! 당신의 평생은 오늘 내일 중 여기서 끝이 나게 되어 있으니까! " "죽이겠다는 거야?" "천만에... 당신이 죽는 거야! 죽이면 살인이지만, 죽으면 뒤가 깨끗해서 좋거든!" "죽지 않는다면?" "운명은 거슬릴 수 없는 일이야. 운명을 거슬렸기 때문에, 죽지 않아도 될 일에 죽어야 했던 사람이 있었지!" "그게 누구야?" "북두산업 김칠성 사장! 당신의 의뢰인과 합작사업을 추진했다던 사람!" "그가 어떻게 해서 운명을 거슬렸으며, 죽었다는 얘기야?" "음, 최초에 그가 가지고 있던 봉제인형의 특허권을 태양에 양도했어야 했지! 그걸 안했기 때문에 회사는 도산이 되었구, 자신도 마침내 죽어야 했거든!" "북두산업 도산과 김칠성 사장의 자살은 당신의 연출 덕분이란 얘기군!" "내 연출이 아니라, 그 사람의 운명이었겠지!" "어떻게 도산을 시켰지? 북두산업을......." 현범은 마지막 생선초밥을 입 속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저쪽 구석에 있는 나이프를 두 사람이 눈치채지 않게 숨겨 둘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아까부터 재고 있었다. 다행히 두 사람은 현범의 그런 노림을 눈치 챈 것 같지는 않았다. "너무 많이 알려구 하는군, 당신은!" "당신 말대로 죽어야 한다면, 알고 나서 죽는 게 좋잖아? 저 세상까지 궁금증을 갖고 간다는 건......." "하긴... 도산은 간단해! 수표를 부도내게 하면 되는 게야. 부도날 수표가 업으면, 그걸 만들어 내면 되거든!" 윤경식은 말을 마치곤 일어섰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지시하기 시작했다. "오오무라는 백영철의 차를 타고 오기로 되어 있으니까, 당신은 몸을 숨기도록. 백영철이가 금고털이 정진대를 여기서 만난다면 곤란하니까......." "알았습니다!" "손님 맞는 건 미스 리가 할 테니까, 당신은 이 친구를 다시 밑에 내려다 놓도록. 그리고 현회장이 도착하거든 목욕탕에 불을 지펴." "이런 날씨에도 더운물 목욕입니까?" "두 사람은 노인이야...... 특히 일본식 목욕을 즐기는 게 취미야! L.P가스는 도착 되었겠지?" "네. 어제 저녁에 다 갖춰 뒀습니다." "좋아. 난 먼저 갈테니까, 실수 없도록." 윤경식은 현범에게 손을 들어 보이곤 밖으로 나갔다. 그와 엇바뀌면서 들어서는 여인을 보고 현범은 비로소 눈을 크게 떴다. 여인은 살롱에서 자기에게 서비스를 했던 호스테스였다. -----현회장 별장을 나선 윤경식 사장은 이만큼 비탈길을 내려 와서 별장을 쳐다봤다. 미국인 변호사라는 젊은 친구와 정진대, 미스 리가 거기 남아 있었고, 두어 시간 뒤면 현회장과 오오무라씨가 도착하게 되어 있는 것이 즐거웠다. 그것으로 내일이면 모든 것이 원만하게 해결되는 것이다. 그는 휘파람을 불면서 액셀러레이터를 힘차게 밟았다. 운전사도 데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오후 자기가 이곳을 다녀간 걸 알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게 되는 것이 즐거웠다. 12. 별장의 불 된장국 끓는 냄새에 백영철은 눈을 떴다. 버릇대로 벌떡 일어나던 그는, 오늘이 일요일이란 걸 알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웠다. 모처럼 게으름을 피워 보고 싶어서였다. 어젯밤 늦게 시골 내려갔던 부인이 안산소식을 들고 올라온 게 그의 마음을 한껏 푸근하게 해 준 것이다. 더욱 아침 일찍 부엌에서 번져오는 된장국 냄새가 기분 같아서는 몇십 년 만에 맡는 것 같기도 했다. 묘하게도 마누라가 집을 비운 날부터 엉뚱하게 바빠졌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주옥이의 변도 그랬고, 현계환씨의 부탁으로 스즈키라는 일본인의 행방을 쫓게 된 것도 그랬지만, 오오무라와 현명준의 기묘한 관계가 그를 더욱 부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제 오후, 팔당의 현명준 회장 별장까지 오오무라씨와 그의 보디가드를 태워다 준 것으로 일은 일단락이 지어진 셈이다. 오늘 하오 너댓 시쯤 H 칸트리 클럽으로 오오무라를 맞으러 가는 것이 남았긴 하지만, 그게 그렇게 부담스런 일이 아님은 물론이었다. 또, 현계환씨가 캡이 되어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는 수사에 호기심이 자극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지금 거기 끼여들어 함께 다닐 수 있는 처지는 못 되었다. 언제고 수사가 일단락이 되면 현계환씨가 그 잔잔한 미소를 흘리며 대포라도 마시러 가자고 연락 해 올 것이 분명했다. 한 가지, 헨리. 조라고 했던 미국인 변호사의 행방불명 사건이 남아 있지만 그것도 강재훈 형사에게 연락을 해뒀으니까 큰 걱정은 안해도 되었다. 요는, 백영철 자신은 다시 평범한 월급쟁이----중소여행사의 애매한 고문자리에 앉아서 담배나 피며 소일하면 족한 그런 생활로 되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때문에 일요일 같은 날은 마누라가 아침을 지어 놓고 깨우러 올 때까지 게으름을 마음껏 피워도 좋은 것이었다. 때맞추어 마누라가 조간이라도 들고 들어와 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기대하고 있을 때, 방문이 열렸다. "조간인가?" 백영철은 이불 속에서 소리만 내 보냈다. "신문보다 전화예요!" "없다구 그러지...... 일요일 새벽같이 무슨 전화야!" "어머, 당신 새벽은 아홉 시부터예요? 일어나서 전화 받아요! 치안본부 현이란 분이에요!" "뭐? 치안본부 현?" 백영철이 후딱 방 밖으로 뛰쳐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그의 부인이 혀를 끌끌 찼다. "아직도 저이가 젊어도 한참 젊었네!" ----전화는 현계환씨로 부터였다. 목소리가 어지간히도 다급했다. "그, 오오무라란 일본사람이 간 곳이 팔당이라구 했지?" "네!" "댐에서 양수리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산 기슭이라구 했지? 현명준 회장의 별장이란 곳......." "네! 무슨 일이라두 있었습니까? 간밤에?" "간밤이 아니구, 오늘 새벽이야! 준비하고 있어, 내가 그쪽으로 들를 테니까 같이 가보자구!" "무슨 일입니까?" "불이 났다는 게야! 팔당의 외진 곳에 있는 별장에!" "방화입니까?" "알 수 없어! 가보기 전엔... 길거리에 나와 있어요! 오분이면 그쪽으로 갈테니까!" "알았습니다!" 백영철은 전화를 끊자마자 서둘러 준비를 했다. 세수도 생략한 외출 준비니까, 시간이 걸릴 턱이 없었다. 그가 아파트 앞 도로에 닿았을 때, 저만큼 패트롤 카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현계환씨가 말한 대로 시간에 맞추어 나온 건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아쉬웠다. 마냥 게으름을 피우며, 된장국에 아침식사를 즐기려 했던 소박한 기대가 박살이 난 데 대한 아쉬움이었다. 패트롤 카에는 현계환씨와 또 한사람, 백영철로서는 낯선 얼굴이 타고 있었다. "일요일 아침부터 미안! 하지만 현장엔 백형이 함께 가주는 게 여러가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참 인사하지! 이쪽은 화재 감식 전문의......." 현계환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낯선 얼굴은 꾸벅 머리를 숙였다. 김이라고 했다. 백영철은 인사를 나누면서 어느새 화재 감식 전문가를 동승시킨 현계환씨의 민첩함에 놀랐다. "이렇게, 패트롤 카를 타보는 것도 몇 해만이군! 때로는 괜찮은 것 같아!" 현계환씨는 사건현장에 출동하는 것 같지 않은 여유를 보였다. "두 사람도 잘 알겠지만, 현장엔 현지 경찰이 출동했을 거야! 그들이 주인이란 것 잊지 말길! 우린 어디까지나 비공식의 응원 부대야!" 현장이 가까워지자 현계환씨는 두 사람의 주위를 환기시켰다. 불이 났다는 곳은, 짐작한 대로 현명준 회장의 별장이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불은 고비를 넘긴 뒤였다. 소화작업 때문이 아니었다. 목조건물이 거의 다 타버린 뒤에 더 탈 것이 없어서 저절로 불길이 숙어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소방차가 출동해서 소화작업을 벌이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고 마을 사람들이 진화하기에도 너무 외진 곳이었다. 처음엔 산불이 났다고 신고가 되었을 정도였으니까, 설명이 더 필요치도 않았다. 그래도 주변엔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고, 가까스로 도착한 소방차가 고비를 넘긴 불더미에 물 호스를 들이대고 있었다. 백영철은 사람들을 헤치며, 겨우 정복 경찰관을 찾아냈다. "이곳 책임자는 누구요?" "당신은?" "치안본부서 왔소! 책임자는 누구요?" 정복경찰은 백영철의 치안본부란 말에 긴장하면서, 저쪽에서 지휘하고 있던 사복경찰을 불러왔다. 백영철은 그를 데리고 현계환씨 쪽으로 다가 갔다. "이 사람이, 현장 책임자입니다!" "음, 수고가 많소!" 현계환이 사복의 손을 잡은 다음, "진화된 뒤에도 함부로 현장엔 들어가지 말도록!" 하고 못을 박았다. 그런 다음 현계환씨는 패트롤 카의 무전기를 통해 앰뷸런스와 함께 감식반의 응원을 수배했다. 현계환씨와 함께 화재 현장에 들어선 백영철은 "방화살인"의 네 글자가 머리를 세차게 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건 자기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란 것을 옆에 서 있는 현계환씨의 좁혀진 미간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 네 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남자 셋 여자 하나. 남자 셋은 모두 한방에 쓰러져 숨져 있었고 여인은 남자들이 쓰러진 옆방에서 숨져 있었다. 네 사람 모두 몸부림친 흔적 같은 것은 없었지만, 쓰러진 방향은 제 각각이었다. 네 구의 시체 모두 일단은 형체를 알아 보기엔 어려울 정도로 불에 탔었다. "이 상태로는 신원을 확인하기에 퍽 힘이 들겠군!" 현계환씨는 미간을 찡그린 채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신원파악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우선 이곳의 세 사람입니다만, 현명준 회장, 오오무라, 그리고 오오무라의 비서겸 보디가드에 틀림없을 겁니다." "저 쪽의 여자는?" "아마도 별장 관리인이거나......." 두 사람의 대화는 달려온 경관에 의해 중단되었다. "뭐야?" "네, 저쪽 뒷쪽 모퉁이에서도 두 구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어디야?" 두 사람은 경관을 앞세운 채 달려갔다. 불탄 곳에서 오십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 검정양복의 사내가 풀섶에 엎어져 있었다. 백영철은 엎어져 있는 사내의 손목을 쥐었다. 아직, 맥이 뛰는 것 같았다. 그는 엎어진 사내를 바로 눕힌 다음, 가슴을 헤치고 귀를 갖다 대었다. 실낱 같았지만, 심장이 뛰고 있었다. "이 사람, 살았어! 어이, 구급차로 옮겨!" 백영철은 무턱대고 소리를 지르면서 사내의 얼굴로 눈을 돌렸다. 사내의 입 언저리엔 거품이 말라붙어 있었다. 독살? 하고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쓰러진 남자는 정진대였다. "이봐, 이 친구도 아직 살았어!" 저만큼 현계환씨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백영철은 달려온 경관에게 정진대를 빨리 앰뷸런스로 옮기도록 지시하고는 현계환씨 쪽으로 달려갔다. "살았습니까?" "음, 어쩌면, 괜찮을 것 같기두 하지만, 빨리 응급처치를 해야겠어!" "알았습니다. 저쪽 친구두 아직은 맥이 뛰고 있더군요! 앰뷸런스로 옮기도록 했습니다." "살아난 사람이 둘! 됐어, 그들이 열쇠를 쥐고 있을 테니까!" 현계환씨의 목소리는 밝았다. 백영철은 현계환씨 발 밑에 쓰러져 있는 남자 옆에 주저 앉았다. 그의 맥박은 정진대보다도 훨씬 강했다. 맥을 짚던 그는 그 남자의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왜! 아는 사람인가?" "네. 이틀 전에 행방불명 됐던 친구입니다. 강재훈을 통해 수색원을 냈던 미국인 변호사입니다." "미국인 변호사?" 현계환씨도 놀라면서 백영철 옆에 허리를 꺾어 앉았다. "네. 헨리. 조라고 하는 한국계입니다만......." 백영철의 말을 들으며, 현계환씨는 헨리. 조를 찬찬히 살폈다. "이 친구, 꽤나 고생을 한 것 같군! 이것보라구, 이 손목의 상처... 음 발목도 다쳤군! 게다가 구두도 신지 않은 맨발!" 백영철은 현계환씨의 말을 쫓아 헨리의 손목과 발목의 상처를 살폈다. 그건 묶였던 흔적임에 분명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마음껏 게으름을 피워 보겠다고 생각했던 백영철의 일요일은 그렇게 해서 엉망이 되어 버렸다. 백영철은 병원복도의 공중전화로 현계환씨를 찾았다. "음, 막 돌아오는 길이야! 그래, 두 사람, 의식은 회복되었나?" "아직... 그런데 두 사람 모두 일산화탄소 중독이라는군요! 의사들 얘기로는...." "일산화탄소 중독?" "네, 쉽게 말해서 연탄가스를 먹은 것과 같은 거라는군요!" "바보같이! 연탄가스를 왜 먹어?" 현계환씨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미안, 백형보구 화를 낼 건 아니야. 그만 피곤해서 그렇게 된 거야. 아마 내일 아침이면 알 수 있을 게요. 화재와 그 네 사람의 사망원인 말야! 감식반에게 철야를 해서라두 내일 아침 일찍 결론을 연락하라구 지실했으니까......." "일단은 뭐랍디까? 방화 살인의 혐의가 짙은 것 아닙니까?" "그게, 그런 게 아닌 모양이야! 화재 감식반의 미스터 김의 말로는 자연발화거나 실화 같다는 거야!" "네?" "서둘러 놀랄 것 없어! 내일 아침이면 정확한 결론이 나올 테니까! 참 백형이 말했던 그 미국 변호사 얘기, 정리해서 내일 아침에 좀 갖다줘요!" "뭣하심, 지금 가서 보고 드릴까요?" "아니, 난 일본 대사관 하야시를 만나야 해... 어쨌든 오오무라의 변사는 알려줘야지. 내일 아침에 만나요!" 현계환씨가 말을 마치는 것을 기다려 백영철은 수화기를 내렸다. 그는 저만큼 떨어져서 담배를 피우고 서 있는 강재훈 형사를 손짓으로 불렀다. "두 환자, 잘 지켜야 할 것 같아!" "뭔가 있습니까?" "응, 불은 방화가 아니라, 실화거나 자연 발화 같다는 얘기야!" "그런 바보 같은 얘기가 어디 있어?" "나 보구 화 내 봤자지! 감식반의 과학적인 얘기니까 믿을 수밖에. 어쩜 이 두 사람이 더욱 중요하게 될지 모르니까, 잘 지키게!" "의식불명의 두 사람이 도망이라두 갈까 봐 겁이 나나요?" "내가? 천만에! 난 지금부터 집에 가서 한숨 푹 잘 일만 남았어! 남은 일은 경찰이 해야 할 일들이니까, 수고하라구!" "아니, 선배님은 저녁두 안 사주시구 그냥 갑니까? 매정하게?" "미안, 오늘은 아무래두 마누라가 끓인 된장국이 먹고 싶어!" 백영철은 강재훈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백선생님!" 백영철은 지금 막 자기가 나온 병원 현관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거기엔 강연숙이가 어떤 청년과 나란히 나오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엇, 미스강이 웬일이야?" "백선생님은? 어디가 불편하세요? 병원에서 뵙게 되다니......." "그냥, 좀 일이 있어서... 그것보다 미스 강이야말로 어디가 나빠졌나?" "아녜요. 이 병원, 이 사람, 미스터 장의 삼촌 병원이거든요!" 하면서 연숙은 장동렬과 백영철을 소개했다. "참, 미스터 조의 행방 찾으셨어요?" "음, 찾긴 찾았지만, 아주 상태가 좋지 않아! 그것보다 그 친구가 누굴 미행한다고 했는지 좀 알 수 없을까?" "짐작이 가긴 하지만......." 백영철의 물음에 장동렬이 대답을 했다. "장형의 짐작으로는 누굽니까?" "억측일지 모르지만, 현명준 회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건 무슨 근거롭니까?" "현범이가 주목하고 있었으니까요. 태양상사를......." "그럴 듯 하군요!" "그것보다 백선생님, 미스터 조는 지금 어디 있나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생명을 던져 어느 사건에 휩쓸렸거나 관련이 되어 있는 상탭니다. 곧 발표가 되겠지요. 경찰에서......." 현계환씨는 건너편에 자리한 백영철에게 담배를 권하면서 눈은 들고 있는 레포트에서 떼지 않은 채 골똘히 읽고 있었다. 이윽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일이 아주 고약해졌는데...." "감식결과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단순한 사고야!" 현계환씨가 내민 레포트를 백영철은 받아 읽기 시작했다. 1.사망자 네 사람의 사인 사망자는 모두 불이 나기 전에 절명했고, 독물 중독 흔적 현재로 없음. 혈액을 비롯한 장기, 위의 내용물은 고열로 인해 감식조건이 최악 상태임으로 감식에는 시간이 걸리겠음. 그러나 현재로서는 혈액중 알콜농도가 0.05 내지 0.36 퍼센트로 상당히 취한 상태이며, 헤모글로빈의 일산화탄소 함유량이 5 내지 75퍼센트로써, 사인은 일산화탄소인 것으로 추정됨. 위 내용물의 소화상태로 봐서 사망 추정 시간은 식사 뒤 2 시간 전후, 토요일 하오8시 전후로 추정됨. 2.화재 원인 가장 심하게 탄 곳은 목욕탕 벽과 주방쪽. 특히 목욕탕의 타일벽 속의 나무 기둥의 연소상태로 봐서 발화지점은 목욕탕 쪽으로 추정됨. 목욕탕은 순 일본식으로 무쇠솥이 목욕탕을 겸하고 있음. 프로판가스의 버너 위에 무쇠솥이 녹아 흘러내린 것을 보면, 목욕물을 데우기 위해 가스를 점화한 뒤 잊어 버려 목욕탕 물이 증발한 뒤 과열로 발화한 것으로 보여짐. 3.문제점 자연발화에 일산화탄소 중독사라는 결론을 역으로 쫓아가면 일산화탄소가 대량으로 발생한 원인과, 더욱 철제 목욕탕이 과열로 발화되기까지 피해자 네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었길래 모르고 있었느냐가 문제점으로 지적됨. 이 관계는 가스 전문가의 의견과 검증이 필요한 것으로 사료됨. 백영철은 보고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현계환씨를 건너다 보았다. "맹랑하지? 지금 가스 전문가와 감식반, 그리고 수사팀의 합동회의를 소집했어. 백형과 나도 옵저버로 참석 해 볼까 하는데?" "제가 참석해도 무방하시다면......." "비공식이니까. 수사회의에 민간인이 참석 할 순 없지만, 백형은 이번 사건에선 우리 어시스턴트니까, 멤버들도 찬성하겠지!" 두 사람은 일어서서 회의실로 향했다. "그 두 사람, 아직 의식불명이지?" 조현범과 정진대의 용태를 현계환이 물었다. "네, 젊은이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정진대라는 중년은 어렵겠다더군요. 오늘 아침 얘기로는 ......" "그렇겠지! 일산화탄소 중독이라면......." 수사회의는 참으로 무겁고 끈끈하게 계속되었다. 관심의 초점이 된 일산화탄소 문제에 대해서 가스 전문가는 정말 명쾌하게 설명을 했다. "프로판가스 자체는 실제로 인체에 무해합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일산화탄소 중독은 부주의 아니면, 부식한 게 원인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프로판가스가 불완전 연소를 했을 때, 일산화탄소가 발생합니다. 이번 경우는 불완전 연소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되겠습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얹힌 가스 탱크와 불에 녹은 버너를 가리키면서 설명을 계속했다. "이 가스통은 압력이 육백 오십 밀리의 준공업용입니다만, 압력조절기가 고장이 나서 칠백 팔십 밀리까지 압력이 올라갔던 것 같습니다. 가정용인 이 버너와는 용량이 맞지 않아, 불완전 연소가 계속되었고, 이 경우 점화와 동시에 목욕탕 안에는 1퍼센트 평균의 일산화탄소가 발생합니다. 이렇게 발생된 일산화탄소가 목욕탕 문을 통해 집전체에 번져 네 사람이 실신 절명했고, 그 뒤에 과열로 발화했으리라고 추정됩니다." "그런 경과라면, 이건 단순한 사고란 얘기가 되는군요!" 강재훈형사가 불만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겠지. 주군가가 가스통 압력을 올려놓지 않았다면......." "주군가가 손을 썼다는 얘깁니까?" 현계환씨의 말에 수사팀의 캡이 반문을 했다. 현계환은 이번 수사팀의 실제적인 리더였지만, 캡은 따로 있었다. 현은 내부지휘, 캡은 일선수사관의 지휘를 맡고 있었다. 사건을, 현계환씨는 북두산업의 도산과 김칠성 사장의 자살, 박주옥 사건, 강원도 산골의 변사체, 일본인 스즈키의 실종(교통사고로 추정하고 있지만), 그리고 이번 현회장 별장의 사건 등을 모두 한가닥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횡적인 협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때문에 자기가 실제적인 리더로서 이를 지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가능성이 있을 것 같군! 뭣보다 별장에서 죽었거나 변을 당한 사람들의 구성이 재미있잖아? 일류상사의 회장, 일본인 픽서--어쩌면 야쿠자의 대부 같은 오오무라, 금고털이 전과6범, 그리고 미국인 변호사...... 이들이 한곳에 모일 수 있었던 건 우연이라고 보기엔 어렵다는 게 내 생각이야!" "그러심, 손을 썼을 누군가는 누굽니까?" "그게 범인이겠지! 우리가 찾아야 하는... 다음, 강재훈 형사는 보고할 것 없어?" "네." 강재훈 형사는 청운도장을 중심으로 한 그동안의 박주옥 사건 수사 결과를 보고했다. "어쩐지, 청운도장의 냄새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연수생에 비해서 주변의 얘기로는 씀씀이가 컸다는 겝니다. 즉 연수생의 수업료에 비해 도장측의 지출이 엄청 많다는 것, 그리고......." 강재훈은 몽타즈를 두 손으로 들어 참석자에게 보였다. "그래서, 청운도사를 찾았지만, 입산수도 중이란 것밖에 잡아내지 못했습니다. 원생들이랑 관계자들의 얘기를 종합해서 몽타즈를 작성했습니다. 이를 가지고 청운도사를 추적할까 해서요......." 백영철은 강재훈이가 쳐든 몽타즈를 보곤 벌떡 일어섰다. "그건, 정진대야! 금고털이 정진대!" ----회의가 끝난 건, 점심 때가 지나서였다. 현계환씨는 회의에서 대두된 문제점을 중심으로 캡과 새로운 대책을 세워 지시한 다음, 백영철을 돌아보며, "백형, 또 한 번 수고를 해 줘야겠어! 아무래도 피해자 가족 중엔 백형이 제일 가까우니까......." "피해자 가족이라고 하시면?" "백형, 조카딸이 살해되었잖아!" "네! 무슨 일입니까? 제가 해야 할 일은?" "점심이나 먹으며 얘길 하자구! 금강산 아니라, 수사도 배가 고파 가지고선......." 구내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현계환씨는 지나가는 말처럼 백영철에게 오오무라와 현명준의 관계를 짧게 설명했다. "수사회의 땐 숨겼지만... 그 두 사람, 코오베에서 한바탕 잘 놀았더구만. 삼십년 전이야. 두 사람이 단짝이 되어 반대파와 처절하게 싸웠지만, 졌다는 게야. 궁지에 몰린 오오무라는 표면상 현명준과 등을 돌리고 반대파에 투항했대. 반대파는 그 대가로 현의 목숨을 요구 했다더군!" "......." "그 다음이 재미있어! 오오무라는 현과 짜고 엉뚱한 사람을 불에 태워 죽였다는 거야. 현은 그뒤 교묘하게 귀국을 했구......." "엉뚱한 사람은 누굽니까? 현 대신 죽은 사람......." "현의 부하였다든가, 친구였다는 한국사람이었다고 해! 이름까지는 모르겠다는 거야! 하야시의 얘기로는......." "그런 관계였군요!" "어머, 미스터 조가 장병원에?" 강연숙은 TV뉴스를 보다가 발딱 일어나서 편집국으로 전화를 돌렸다. "미스터 장? 뉴스 봤어?" "응, 지금 막--." "그럼 빨리 나와요! 어서 가 봐야잖아요!" "어딜?" "뉴스 봤담서, 뭐예요?" "현범이가 우리 삼촌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 "맞아요!" "이러지 마! 그 사건 때문에 이쪽도 눈코 뜰 새가 없다구!" "경제부도 사건기자가 있나요?" "이봐! 태양상사 회장이 참사했다는 건 경제부에서도 빅 뉴스야! 주간부하곤 달라!" 장동렬의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기자, 강연숙은 약이 올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긴, 경찰은 실화에 의한 사고라고 발표했지만, 사건이 크긴 컸다. 어쩔 수 없이 동렬이가 마감한 뒤, 병원에 가 볼 수밖에 없다고 그녀는 체념을 했다. 경찰은 혼수상태인 두 사람의 의식이 회복되는 것을 기다려 경위를 취조하기로 했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지금 가봤자 얘기도 나눌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장병원 삼층의 특실 입원실 복도는, 조금 살벌할 정도로 경비가 삼엄했다. 팔당 별장 화재 사건의 생존자가 입원하고 있는 병실은 특실 5 개 중의 오른쪽으로 두 번째 병실이었다. 응급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던 그들은 오늘 하오 갑자기 특실로 옮겨진 것이다. 복도---특실 입구에 사복이 한 사람, 그리고 병실 문 앞에도 사복이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몇 시간이 지나자 사복들의 경계는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밤이 이슥해지자 아예 의자 위에서 졸고 있었다. 병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사복은 강재훈 형사였다. 아직도 청운도장을 비롯해서 박주옥이 뺑소니 사건의 수사에 시간을 쪼개 쓸 만큼 몰리고 있었지만, 병실보초 명령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는 병실 속의 환자를 아직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태. 그가 명령을 받고 달려왔을 때는 이미 '면회사절' 의 팻말이 걸려 있었다. 강연숙이 장동렬을 억지로 끌고 장병원에 도착한 것은 밤 10시가 가까워서였다. 병원 수부의 직원들은 원장의 조카--장동렬에게 퍽 친절했다. "삼층 특실 코너엔 누구도 접근하지 말라는 원장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니까......." "단념하라는 거군요! 할 수 없죠!" 강연숙이가 너무 싹싹하게 말을 들었기 때문에 장동렬은 조금 어리둥절했다. 신문사에서부터 졸라 대던 것에 비해선 너무도 뜻밖이었다. 연숙은 어리둥절해 하는 동렬을 무시한 채, 병원 직원과 한참 깔깔대며 얘기를 나누었다. "그렇군요! 삼층 입원실 중에, 특실코너는 오른쪽이군요! 할 수 없죠! 우린 가겠어요!" 동렬은 연숙에게 끌려 밖으로 나왔다. "자, 지금부턴, 우리 둘만의 시간이 되는군!" "좋아 하지 마세요! 지금부터 아주 바빠질 테니까!" 연숙은 동렬이를 끌고 병원 뒤쪽으로 돌아갔다. "이봐! 입구는 저쪽이야!" "알아요! 잠자코 따라 오기나 해요! 시끄럽게 해서 산통 깨지 말구!" 동렬이는 연숙에게 끌려 병원 뒤쪽 비상계단 앞에 섰다. "여기서부터 올라가는 거예요! 자 앞장서요!" "이 계단으로? 이봐, 난 고소 공포증이 있어!" "겨우 삼층이에요! 삼층 정도는 고소 축에 들지도 않아요!" "이렇게까지 할 건 없잖아?" "동렬씬 그럴지 몰라도, 난 안 그래요! 자 올라가요!" 비상계단이라곤 하지만, 벽 위에 쇠파이프로 만든 수직계단, 양쪽은 손잡이도 없었다. "이리루 올라가두, 어느 병실인지도 모르잖아!" "괜찮아요! 외부인사는 경계를 해도 병실에서 나온 사람은 괜찮을 거예요! 이쪽이 아님 저쪽, 화장실 갖다온 시늉으로 딴 방엘 들어감 되잖아요!" "이런! 꾀 하나는 조조로군!" 동렬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침 계단이 끝나는 병실의 창문이 열려 있었다. 두 사람은 조심 조심 계단을 올라 열려 있는 창문으로 기어 들어갔다. "누구에요!" 여인의 부르짖음과 함께 불이 켜졌다. 주춤 엎드려 있던 연숙이 생글거리며 일어섰다간, 상대방 여인의 얼굴을 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길쭉한 입원실 복도엔 촉광 낮은 형광등이 더욱 졸리게 만들었다. 꾸벅대던 강재훈은 저쪽 복도 끝에서 의사 한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곤 다시 눈을 감았다. ---개인 병원은 친절하군. 밤 늦게도 회진을 해주구....... 그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조금 긴장하기 시작했다. 한밤중의 회진, 어딘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누이며, 감은 눈을 실낱같이 떴다. 의사는 태연하게 목에 건 청진기를 흔들면서 다가왔다. 자고 있는 강재훈을 곁눈질한 그는 병실 문을 살며시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병실엔 테이블 라이트가 겨우 물체를 알아볼 수 있게 켜져 있었다. 의사는 환자 베드 쪽으로 다가갔다. 손으로 시트를 걷어 올리던, 의사는 주춤했다. 사람이 없었다. 베개를 모아서 형체를 그럴듯하게 만들어 뒀지만, 빈 침대였다. 그는 잽싸게 왼손으로 또 한쪽의 침대 시트를 걷어치면서 오른쪽 손의 나이프를 쳐들었다. 거기엔 사람이 있었다. 의식불명의 환자는 아니었다. 벌떡 일어난 침대의 환자는 잽싸게 나이프를 든 의사의 손목을 쳤다. "결국, 와 주었군! 기다리구 있었는데......." 백영철이었다. 백영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안에 불이 밝혀졌다. "꼼짝 말어! 움직이면 쏜다!" 어느 새 강재훈이 뒤에서 피스톨을 겨누고 있었다. "당신이었군! 윤경식 사장!" 한참만에 백영철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비겁하군! 함정을 파다니......." 윤경식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악을 썼지만, 이미 거의 얼굴에는 기름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강재훈 형사가 그에게 수갑을 채웠다. "백선배가 환자였으리라곤, 꿈에도 몰랐습니다. 어떻게 된겁니까?" "그렇게 됐어! 실은 현계환씨의 아이디어야! 만약 별장 화재사건이 방화살인이었다면, 생존자를 없애기 위해 반드시 나타나리라고 했었거든! 그 분이...." 두 사람이 복도로 나왔을 때, 거기엔 현계환씨가 빙긋 웃고 서 있었다. "백형, 정말 고마웠어!" "아뇨, 주옥이의 외삼촌 입장을 배려해 주신 것에 뭐랄 수없이 감사할 뿐입니다." 백영철이 머리를 숙였다. 그때, 백영철은 현계환씨 등뒤로 강연숙이가 쫓아오는 게 보였다. "엇, 미스 강이 웬일이야?" "어머, 백선생님, 살아났어요!" "살아나다니... 미스터 조가?" "아녜요! 자살했던 김사장, 김칠성 사장이 살아났단 말예요!" 백영철은 연숙이 뒤에 황인희 여사가 머리를 숙이고 서 있는 걸 볼 수가 있었다. 13. 에필로그 묵비권으로 버티던 윤경식이 입을 연 것은 체포된 지 닷새 뒤였다. 경찰이 그의 어머니를 동원, 설득한 것이 효과를 본 셈이다. 아니, 윤의 어머니를 통해 대부분의 열쇠를 찾아냈기 때문에 윤이 더 버틸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그는 태양상사 현회장의 지시로 북두산업 도산극을 연출했다. 자금회전이 빠듯한 북두산업의 수표용지를 금고털이 정진대를 시켜 훔쳐내여, 거액의 부도를 조작한 것이 일의 시작이었다. 단 한가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김칠성 사장의 자살이었다. 북두의 도산을 어디까지나 경제적인 현상에 국한시켜 뒤탈이 없게 주의를 기울였던 윤으로서는, 비록 자살이라고 해도 김칠성 사장의 죽음은 전혀 뜻밖이었고, 그것 때문에 현회장으로부터 호된 꾸중을 들어야 했다. 주간지에 김칠성의 자살에 의문점이 많다는 기사가 났을 때는 눈앞이 아찔했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그는 어쩌면 김칠성 사장이 스즈키의 시신을 이용해서 자살극을 꾸몄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스즈키라는 일본인이 오오무라의 의뢰를 받고, 풍년농원을 은밀히 답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밤길 교통사고를 위장, 죽여 버린 것을 그때 처음으로 후회했다. 하지만 큰일을 위해서는 스즈키를 죽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스즈키를 처치한 이유는 첫째, 비록 오오무라라고는 하지만, 풍년농원의 내막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그를 처치함으로써 오오무라와 현회장 사이에 상호 불신의 틈을 만들어 놓자는 노림도 있었다. 적어도 윤경식은 자신의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 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필요가 있었다.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손을 잡고 마약관계 장사를 계속해 왔다. 태양상사가 단 시일 내에 그렇게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엔 마약자금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회장은 그런 일은 언제나 윤경식에게 핸들링을 맡겨 왔었다. 현회장의 신임은 그만큼 두터웠다. 그 두터운 신임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현회장에 대한 살의(殺意)로 바뀌어 갔다. 10년쯤 전이었을까? 현회장은 윤경식을 사위로 삼고자 제의했을 때 윤의 어머니가 한사코 반대했다. "알겠냐? 경식아. 현회장이 네겐 은인같고 아버지 같지만, 실은......." 끝내 윤의 어머니는 엄청난 충격을 아들에게 안겨 주었다. 현명준은 오오무라와 짜고 자신이 살기 위해 친구이자 부하였던 윤의 아버지를 꾀어 불태워 죽였다는 것이다. 사십 년 전 소위 코오베 항쟁 때였다고 했다. "알겠냐? 네 아버지 일본성은 이시다(石田)이었다. 믿겨지지 않으면 한 번 일보엘 가서 조살해 보렴!" 그때부터 윤은 기회를 노리면서 발톱을 숨겨온 것이다. 그 숨겨온 발톱이 이번 팔당별장의 방화살인으로 정체를 나타낸 것이다. 그는 오오무라와 현을 동시에 제거한 뒤 두 사람의 돈줄을 그대로 차지, 끝내는 태양상사까지 수중에 넣을 계획을 세운 것이다. 북두를 도산시키면서, 우선 현회장이 외곽 행동부대로 이용하고 있던 정진대의 청운도장을 일단 자기 관할로 옮겨 놓았다고 했다. 압력이 높은 준공업용 가스 탱크에 용량이 낮은 버너를 부착시켜 L.P가스를 불완전 연소시킴으로써 일산화탄소 중독사를 유도한다는 계산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절묘했다. 거기 덧붙여 불까지 나주었으니까 더 바랄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내 계획은 완전범죄였다. 그런데 어디서 어떻게 계산착오가 생겼는지......." 진술을 마친 윤경식의 탄식이었다. "완전범죄? 어림없는 소리 말아! 네 계산착오는 말야, 완전범죄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데서 비롯된 게야!" 강재훈 형사가 윤에게 내뱉은 결론이었다. 사건이 매듭지어진 한달 뒤 조현범이 퇴원했다. 그의 퇴원을 축하하기 위한 조촐한 모임을 황인희 여사가 준비했다. 김칠성 사장 부부, 박인규 변호사, 백영철씨, 강재훈 형사, 장동렬-강연숙 커플이 멤버였다. "어떻게 살아 올 수 있었는지, 다시 한 번 얘기해 주세요!" 축배가 끝난 다음, 연숙이가 현범에게 졸랐다. "벌써 몇 번째 같은 얘길 해야 합니까?" "그래두 재미 있잖아요?" "하긴, 아직 자세히 듣지 못한 사람도 있으니까, 다시 한번 되풀이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동렬이가 눈길을 김칠성 사장에게 보내며 거들었다. 김칠성 사장의 위장자살은 아직도 매듭이 지어지지 않았다. 박인규 변호사의 노력으로 구속은 면했지만, 앞으로의 일은 장담할 수 없는 형편에 놓인 것이다. 따라서 최근까지만 해도 검찰과 경찰에 거의 매일 출두하는 등 쫓기는 마음이어서 한가하게 남의 얘기를 들을 시간이 없었다. 그런 김사장을 위해 다시 한번 되풀이 해 보라는 동렬의 말에 현범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식당으로 끌려 나갔다가 다시 지하실에 갇힐 때만 해도 난 죽었다고 생각했지. 헌데 천우신조랄까, 쓰러져 있는 옆에 부러진 헌 낫이 한 자루 있었어! 그게 날 살려준 거야! 묶인 끈을 자르고 가까스로 밖으로 나왔을 땐 뒤통수가 띵하고, 토할 것 같은 게 죽는 줄 알았어!" "살려고 뛰어나온 게 죽을 지경이었담, 앞뒤가 안 맞네요!" 연숙의 비양거림을 무시한 채 현범은 말을 이었다. "아마, 그때까지 상당한 양의 일산화탄소가 집안 전체에 번졌었나 봐! 뒤뚱거리며 밖으로 나오다가 정진대와 부딪쳤지! 잡힐까봐 정신없이 도망쳤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병원이었어!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 "몇 번 되풀이된 얘기라 김이 빠져버렸군. 김사장은 어떻게 해서 자살했다 다시 살아났소?" 백영철이 물었다. 김칠성은 눈을 감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는 밤길을 달리다가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태웠지만, 이미 그가 죽은 걸 알고는 자신의 자살체로 이용키로 했다고 했다. "그래서 집으로 전화를 걸어 눈 딱 감고, 장사를 치뤄 달라고 했었지. 마누라가 잘 해줬어요!" "난, 열녀니까요!" 황인희 여사는 즐겁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그뒤 김칠성은 자기를 도산에 몰아넣은 일당 중에 수표에 이서를 한 정진대를 추적하여 풍년농원에 이르렀고, 거기서 뜻밖에도 박주옥이가 갇혀 있는 것을 구해 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누구에게도 내가 살아 있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주옥이도 마취시켜 구해냈죠! 마취제 말입니까? 정진대 일당들이 갖고 있었죠. 그들은 마약과 마취제로 사람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는 풍년농원의 마약 샘플을 주옥이에게 맡겨 P호텔로 갖고 오도록 지시했다. 그동안 자신은 일당들을 경찰에 고발할 수 있는 증거를 더 모으기로 했다고 한다. "그랬던 게 안양에서 과로로 쓰러지는 바람에 주옥이가 그렇게 됐어. 내 대신 집사람을 P호텔로 보냈었지만......." "그래요. 그 아가씨 사망 소식이 가져온 쇼크가 겹쳐 장병원에 죽 입원을 하고 말았어요. 정말, 그날 밤 저 아가씨가 창문으로 기어들어 왔을 땐 기겁을 했었어요!" 황여사가 뒤를 받아 설명했다. "하지만, 자네가 한 일에 대한 벌은 달게 받을 각오가 되었지?" "어머, 이이가 무슨 벌을 받아요?" 박인규 변호사 말에 황여사가 펄쩍 뛸 듯이 대들었다. "시체 유기, 위계에 의한......." "알아! 내 사망 신고를 취소시키기 위해선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쯤 각오하고 있어! 그것보다 북두산업의 일인데......." 김사장은 현범에게 눈길을 돌렸다. "어머, 미스터 조에게 맡길 생각이세요? 북두산업을?" 연숙이가 뜻밖이라는 듯이 물었다. "그래줬음 좋겠어. 내가 자유로워질 동안 만이라두. 아무도 없잖아?" "하긴, 미스터 조라면 잘 할거예요. 변호사보다 탐정솜씨가 놀랍듯이, 탐정 솜씨보다 경영솜씨가 뛰어날는지 모르죠!" "맡고 안 맡고는 미스터 조가 결정할 문제야. 미스 강이 서둘 일이 아니야!" 박변호사가 말했지만 연숙은 아예 들은 척도 않은 채 현범쪽으로 몸을 돌렸다. "미스터 조, 맡아 주는거죠?" "천만에요. 맡을 수 없습니다. 미스 강은 동렬이가 있는데 내가 어떻게 맡습니까?" "뭐예욧?" 연숙이가 눈을 치켜뜸과 동시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끝나기도 전에 강재훈 형사는 백영철을 한쪽 구석으로 잡아 당겼다. "백선배님. 여행사엔 한달 휴가계를 내셨다구요?" "휴가계? 내가?" "네. 현계환씨 얘기로는......." "현계환씨가? 그렇게 말했어?" "네. 백선배님은 아무래도 풍년농원 가까이 있는 그 주막 뒷마을이 석연치 않다고 생각 하신다면서요?" "스즈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그 주막 말인가?" "네. 그래서 그 마을에서 한달 동안 휴양을 하면서 마을 사람들과 풍년농원 관계를 한 번 훑어보실 예정이라고...." "그 예정도 현계환씨가 말했던가?" "네. 아무래도 현직 경찰관은 한달 동안 휴가를 얻을 수도 없구...... 또 이번 사건이 단순한 방화살인으로 매듭 지어졌지만 배후엔 마약조직이 있었다, 그런데 그건 깨끗이 해결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그 마을에서부터 손을 댈 수밖에 없지만,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백선배님이 휴양삼아 한번 나서 보겠다고 결심을 했다는 얘깁니다." "......." "풍년농원이 마약 밀재배겸 가공기지였다면 코앞에 있는 그 마을 사람들이 몰랐을 리가 없구, 또 일본인 스즈키가 교통 사고로 그렇게 감쪽같이 도깨비놀음으로 덮어 버린 것도 이상하다면 이상하구......." "모두 현계환씨가 자네에게 들려 준 얘기이가?" "현계환씨 얘기가 아니라, 백선배님이 그 분한테 한 얘기를 그 분이 나한테 옮긴 것이죠!" "음!" "그리고 이건...... 이번 일에 수고도 컸고 모처럼 휴가니까 보태 쓰시라고 현계환씨가 보내신 겁니다." 백영철은 강재훈 형사가 내민 봉투를 받았다. 손에 쥐어지는 촉감은 상당한 금액으로 느껴졌다. 그 양감은 어느덧 현계환씨가 자기에게 부탁하는 간절함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 곳이 수상하다면, 그리고 아무런 증거가 없어 수사착수가 곤란하다면 그 증거를 내가 찾아 주지! 난 민간인이니까, 한달쯤 그 곳에서 머슴살이라도 할 수 있겠지. 백영철은 스스로 다짐했다. 그건 죽은 주옥에 대한 안타까움을 더는 길이기도 했다.